청음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청의 항복요구에 항서(降書)를  찢고, 긴 세월동안 심양(瀋陽)에 잡혀가 갖은 곤욕을 치르면서도 의기(義氣)를 지킨 선비다. 그가 주장했던 척화론(斥和論)은 당시 정세로 보아 비현실적이었다는 사가들의 지적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척화롱느 효종(孝宗)의 북벌정책으로 이어져 민족사의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얼마나 청렴.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는가는 몇 가지 일화에 잘 드러난다. 이종형제였던 유희분(柳希舊 )이 사형을 당하자 청음은 상복을 입고 가서 곡을 하려했다. 사람들이 말리며 "지금 가서 곡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청음은 "유희분이 사형을 당한 것은 역적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권세를 좆은데서 비롯된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비록 그 집에 드나들지 않았으나 죽은 뒤 친척간에 드나들지 못할 의(義)는 없다. 따라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겠다"고 했다. 그의 고결하고 의리에 밝은 인품을 엿보게한다.
청음의 아버지 도정극효(都正克孝)는 해학을 즐겨한 인물이었다. 친구와 해학을 하다가도 청음이 오며 입을 다물고 "우리집 어사 오신다"고 했다. 아들의 직간함을 높이 산 농담이었다.

김상헌(金尙憲)의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시호는 문정공이다. 선조3년(1570년)에 태어났다. 월정 윤근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26세때 정시문과(庭試文科), 36세때 문과중시에 각각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다. 정언, 교리, 대제학등을 역임하고 인조반정 이후 대사간, 도승지 대사성 이조판서 등을 거친다.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 때 그는 예조판서로서 비변사당상을 겸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하자 산성안의 백성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어야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화(和)전(戰) 양파로 나위여 격렬한 논쟁을 계속한다.  명분보다 현실에 적응을 주장한 최명길(崔鳴吉)등은 세자를 볼모로 강화르 주장한 반면 그는 척화론(斥和論:항복을 하지말자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이후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조선왕국은 삼가 대 청나라의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엎딜어 생각건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을 소국(조선)은 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대국의 명을 받들어 그 심국(瀋國:제후의 나라)이 되고자 합니다. .......]의 내용을 보고는 비분강개함을누르지 못해 찢어버리고 대성통곡을 한다. 그는 인조에게 [군신경심사수(君臣誓心死守임금과 신하가 죽기로 맹사하고 지키자]를 거듭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죽기를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6일동안 단식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마침내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그는 안동 소산(素山)으로 내려가 청원루(淸遠樓)을 짓고 은거한다. [청나라를 멀리하라]는뜻에서 였다.

오늘날 청원루는 경북도에 의행 유형문화재 제 199호로 지정되어 있다. 1639년 청나라가 조선군사 5천명을보내 명나라 침략을 도우라는 강경한 요구를 해온다.
그는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빌미가 되어 심양으로 잡혀간다. 인조는 중사(中使:왕명을 전하는 내시)를 보내 어찰과 초구(모피방한복)를 보낼 정도였다. 이 때 그는 오랑캐 땅을 향하여 떠나며 소회(所懷)를 담은 시조 한수를 남긴다.

 

병으로 인해 의주에 머물던 그는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붙잡힌 이계가 " 조선이 여전히 명을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는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또 다시 최명길 등과 함께 심양으로 잡혀간다. 심양에서 그는 공교롭게도 최명길과 같은 감옥생활을 한다. 최명길은 청음이 자신의 이름을 낚으려는 마음이 있다고 오해했었으나 같이 감옥생활을 하면서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정의를 지키는 그의 자세]에 감복한다.  

이와 함께 청음도 [주음을 걸고 자신의 뜻을 지키는] 최명길의 생각이 결코 오랑캐를 위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청음이 [조용히 두사람의 생각을 찾아볼 때 백년의 의심이 풀리는 구나(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라는 시를 최명길에게 보내자 최명길은 [그대의 마음은 돌과 같이 단단하여 돌릴 줄 모르지만 나의 마음은 둥글둥글 오로지 한 길만을(爾心如石難轉  吾道如環信所隨)]이라고 답시를 보냈다고전한다.
1645년 (인조23년) 그는 욕된 볼모살이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온다.
1652년(효종3년)83세를 일기로 경기 양주에서 타계한다.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무정공이라는 시호를내
   린다. 이후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청백리에 오른다.    청음은 무장에 능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소로는 [野
   人談錄] [豊岳問答] [讀禮隨抄] 등이 전한다. 13대 후손
   인 김을동(안동시 목성동 49-3)은 " 청음은 80평생동안
   자신의 뜻을 꺽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公私를 분명히 한
   청백리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