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제현의 원을 푼, 올곧은 선비 삼당공(三塘公) 휘(諱) 영(瑛, 1475~1528) 선생의 삶을 연보, 행장, 묘갈명 등을 통하여 살펴본다.

  • 1475년(성종 6년 을미)
    안동부 풍산현 소요산(素耀山) 아래 옛집에서 출생.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비문은 “군의 어머니께서 몸에 태기가 있었을 때 해와 별이 밝게 빛나는 꿈을 꾸셨기 때문에 어려서의 이름을 몽천(夢天)이라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말을 잘 했고, 글을 지을 줄 알아 날로 수백 낱말을 기억하여 크게 고향 마을에서 칭찬을 받았다.”고 적었음.
  • 1480년(성종 11년 경자) 나이 6세
    종조부 보백당(寶白堂, 휘 係行) 선생에게 글을 배움. 보백당 선생께서는 기특히 여기고 매우 사랑하셔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장차 우리 집안을 크게 빛낼 사람은 이 아이로다.”라 함.
  • 아버지 장령공(휘 永銖)을 따라 영덕관아(盈德官衙)로 감.
  • 1482년(성종 13년 임인) 나이 8세
    장령공이 영덕 읍내에서 문치를 숭상하여 크게 향교를 보수하고 이 고을 아동들을 가르침에 선생께서도 따라 배웠는데 문장의 뜻을 잘 이해했고 또한 그의 사장(詞章)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한 고을이 모두 신동이라 불렀음.
  • 1485년 (성종 16년 을사) 나이 11세
    장령공을 따라 영덕에서 서울로 돌아옴.
  • 1489년(성종 20년) 나이 15세
    12월 증조모 상락김씨, 즉 비안공(휘 三斤) 부인께서 돌아가심.
  • 1490년(성종 21년 경술) 나이 16세
    2월 증조모 김씨부인을 피실(예천군 稷谷)의 비안공 묘 앞쪽에 안장함.
  • 1491년(성종 22년 신해) 나이 17세
    진사 김광려(金光礪)의 따님 상주김씨에게 장가드심.
  • 1493년(성종 24년 계축) 나이 19세
    영천군 관아로 장령공을 뵈러 가심.
  • 1494년(성종 25년 갑인) 나이 20세
    12월 성종이 승하함.
  • 1495년(연산군 원년 을미) 나이 21세
    2월에 장령공을 모시고 고향 시이미(素山)로 돌아옴.
    생원·진사 양과시에 합격함. 약관 때부터 문명이 자심하던 터에 생원·진사의 사마시에 합격하니 빛나는 소문은 더욱 알려져 한 때의 명사들이 마음을 기울여 사귀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음.
  • 1496년(연산군2년 병진) 나이 22세
    「삼구정사시사(三龜亭四時詞)」를 지음.
    삼구정은 장령공께서 어머니 예천권씨 부인을 모시고 노니셨던 곳으로, 정자 앞뜰에 거북 모양으로 생긴 큰 돌이 세 개 놓여 있었으므로 이름한 것이니, 어머니의 장수를 바라는 뜻에서였음. 선생의 「삼구정사시사」는 삼구정에서 바라본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경치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정을 노래한 시로서 당시의 여러 명사들이 화답했음.
    이 해 겨울 할머니 예천권씨 부인 향년 88세를 일기로 돌아가심.
  • 1497년(연산군 3년 정사) 나이 23세
    봄에 할머니 예천권씨 부인을 역골(驛洞)의 판관공 묘소 뒤쪽 건좌에 안장함.
  • 1498년(연산군 4년 무오) 나이 24세
    맏아우 서윤공(휘 번)이 진사시에 합격함.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가 지은 서윤공 묘비문에 이르되 “나의 좋은 친구 승지김공(承旨金公)은 문장과 행적이 한 세대에 으뜸이고, 계씨도 재덕이 승지공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이다. 처음에 서로 성균관에 들어가니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가 장화(張華)의 문하(門下)에 든 것 같아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 이름을 사모하게 되었다.”라 했음. (주 : 육기와 육운 형제는 중국 진(晉)나라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음)
  • 1501년(연산군 7년 신유) 나이 27세
    막내아우 장이 요절함. 이 동생은 능히 시와 서에 통달했고, 글씨의 범도가 뛰어났는데 13세로 요절하니 선생께서 매우 애석히 여김.
    겨울에 금교(金郊)의 우역(郵驛) 관아로 아버지 장령공을 뵈러 감. 당시 조정에서는 서방에 나쁜 짓들이 남아 있어 걱정됨에 장령공을 천거하여 정삼품의 품계로 승진시켜 금교(金郊) 도찰방(道察訪)으로 삼음. 선생께서는 가서 뵈옵고 그곳에 머묾.
  • 1502년(연산군 8년 임술) 나이 28세
    7월 12일 장령공의 상을 금교관(金郊館)에서 당함.
    선생이 두 아우(?과 珣)와 함께 서울로 영구를 모심.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도우고 많은 부조를 내림. 서울의 사대부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와서 조문함.
    8월에 발인하여 풍산으로 와서 역골 선영 아래 임시로 장례함.
  • 1503년(연산군 9년 계해) 나이 29세
    3월 3일 장령공을 판관공 묘소 오른편 동향 유좌에 개장함. 장령공의 행장이 이루어지매 대제학인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에게 비문을 부탁함. 허백당은 일찍이 선생의 문장을 인정하였더니, 비문 속에서 “맏아들 아무가 널리 배워 문장에 능해서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남았다.”고 말하였음.
  •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 나이 30세
    삼년상을 마침.
    선생께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영화로운 봉양을 못함을 한스러이 여겨, 상례를 마침에 양진(良辰)이나 가절(佳節)이면 어머니를 삼구정으로 모시어 색동옷으로 춤을 추며 기쁘게 모시기를, 장령공이 그 어머니 권씨 부인을 효양하시던 것과 똑 같이 함.
  • 1505년(연산군 11년 을축) 나이 31세
    권곤(權琨)의 비문을 지음.
    권곤은 충재(沖齋) 권벌(權撥)의 할아버지임. 당시 선생의 나이 갓 서른을 넘긴 젊은이인데도 충재 옹이 선대의 비문을 선생께 부탁했으니, 선생의 문학이 일찍부터 성취됐음을 알 수가 있음.
  • 1506년(중종 원년 병인) 나이 32세
    별시문과(別試文科) 정과(丁科)의 제7인으로 합격함.
    예문관에 뽑혀 검열(檢閱)에 오름.
    12월 3일 임금이 하명하여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하고 휴가를 주어 정업원(淨業院)애서 공부하도록 하니 여기에 뽑혀 참여케 됨.
  • 1507년(중종 2년 정묘) 나이 33세
    대교(待敎)에 오름.
    6월 10일 예문관의 봉교(奉敎)인 김흠조(金欽祖)·정충량(鄭忠樑), 시교인 이희증(李希曾), 검열인 권벌(權撥)·이말(李抹)·정웅(鄭熊)·윤인경(尹仁鏡)·윤지형(尹止衡) 등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여 김종직(金宗直)과 더불어 화를 입은 양심 있는 선비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호소함. 연산군 무오년(1498)에 이극돈이 사화를 일으킴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당시의 명현들이 모두 그 화를 당함.
    중종이 반정하매 공론이 점차 일었지만 큰 화의 뒤끝이라 사기가 침체되어 감히 무오의 잘못된 일을 고치자고 먼저 나서서 말하려는 이가 없었던 때에 선생께서 유독 분연히 주장하여
    “화가 사필(史筆)에서 나와 사림(士林)에게 연루됐는데 이에 신원(伸寃)되지 못한다면 이는 나라에 올바른 사관(史官)이 없는 것이다.”라고 역설함.
    상소문 내용은 다음과 같음.
    “무오년에 역사를 편수한 관원이 한갓 사사로운 혐의로 한 것이고,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은밀히 대신들에게 부탁하여 노여움을 일으키게 하니, 유자광이 따라 주창하고 이에 동조하여 은밀히 상계(上啓)함으로써 끝내 큰 화가 된 것입니다. 이는 몰래 그릇된 허물을 덮으려 해도 끝끝내 덮을 수가 없는 것이니 당시의 사실이 후세에 누를 끼친 것을 드러나게 밝혀야 합니다. 하나는 만세 사가(史家)의 법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렸고, 이는 임금께서 살생을 좋아하는 마음을 열게 한 것이 됐습니다. 그 죄 당연히 용서할 수 없거늘 오히려 상을 주었으니 신(臣)들은 슬픔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모두 무오의 화로 사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신 등이 김일손(金馹孫) 등을 애석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가(史家)의 법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없어져서 만세의 공론이 사라질까 두려워할 따름입니다.”라고 강조했음.
    임금이 답을 내리되 “김종직·김일손 등이 연좌로 죄를 받은 것은 과연 애매한 사실이 있으니 벼슬을 다시 회복하고 그 나머지도 아울러 추증(追贈)하라. 당시의 추관(推官)인 윤필상·노사신·유자광 등에게 상으로 내린 물건과 무오사국(戊午史局)의 누설된 일들을 일기청(日記廳)으로 하여금 살펴 아뢰도록 하라.”고 함.
    〈선생의 6대손 계광(啓光)이 손수 기록한 것을 보면 삼당 선조께서 지은 예문관 소(疏)의 대략이라 했음.〉
  • 1508년(중종 3년 무진) 나이 34세
    봉교(奉敎)에 오름.
    동료와 함께 이극돈의 죄를 추고(追考)할 것을 계청(啓請)함.
    선생께서 봉교(奉敎)인 이희증과 대교(待敎)인 윤인경·정웅·검열인 권벌·문근·김희수·소세양 등과 함께 논증했으니 대략 다음과 같음.
    “무오사국에서 누설한 죄는 버려두게 하시더라도 무오년부터 갑자년까지 올바른 도의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며 나라가 거의 위험한 지경에 간 것이 실로 이 때부터 시작됐으니 극돈의 죄를 추론하여 사림의 분함을 물어주옵소서.”라 함.
    임금이 답을 내리되 “극돈이 죽은 지 이미 오래이고 또한 사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대신들과 상의하여 기죄(棄罪)했으니 굳이 추죄할 필요가 없다.”고 함.
    다시 동료들과 함께 상소했으나 그 상소의 글과 이에 대한 비답(批答)은 모두 일실(逸失)됨.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로 옮김.
    홍문관 수찬(修撰) 겸 지제교(知製敎)로 승진함.
    선생은 문장과 덕망이 일찍부터 관리들 사이에 알려져 예문관에서 홍문관에 이르도록 늘 지제교(知製敎) 세 글자를 동반하니 당시 사람들이 양대년(楊大年)에 비교했음.(주 : 지제교(知製敎)는 임금이 내리는 교서(敎書) 등의 문장을 작성하는 중요한 직함이며 문장력이 뛰어난 중견관리가 겸직함)
    농암 이현보가 영천 군수로 가게 됨을 전송함. 증시(贈詩)가 있음.
  • 1511년(중종6년 신미) 나이 37세
    2월 9일 종조부 보백당(寶白堂) 선생에게 회갑의 헌수(獻壽)를 올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됨.
    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 겸 지제교(知製敎)가 됨.
  • 1512년(중종 7년 임신) 나이 38세
    6월 어사(御使)에 제수되어 평안도에 내려감.
    이조정랑(吏曹正郞) 겸 지제교가 됨.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災傷敬差官)을 받음.
    9월에 청하객관(淸河客館)에 노님. 제시(題詩)가 있음.
  • 1515년(중종 10년 을해) 나이 41세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으로 승진함.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받음.
    당시에 권세에 아부하는 간신이 모사하여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니 선생께서 경연(經筵)에 들어가 대답한 말씀이 너무 강절(剛切)하여 이로부터 벼슬길에 거슬림을 당함.
  • 1516년(중종 11년 병자) 나이 42세
    의정부(議政府)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곧 사인(舍人)으로 승진되고 지제교를 겸함.
  • 1517년(중종 12년 정축) 나이 43세
    12월 17일 보백당 선생에게 조곡(弔哭)함.
    보백당 선생이 자신의 병이 위독하자 이미 15일 누운 자리로 선생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오래 경연(經筵)에 있으면서도 임금을 바르게 보필하여 시대악(時代惡)을 없애도록 구제하지 못했으니 매우 부끄럽다. 너는 더욱 가다듬어 이 늙은이처럼 되지를 말아라.”고 하시고,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으나 오직 있다면 청백이 보물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 함.
    선생이 이 교훈을 받들어 조정에 있기 20여 년 동안에 역시 청백(淸白)으로 칭찬을 받음.
    군기사(軍器寺) 부정(副正)이 됨.
    이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나감.
    선생이 늙으신 어머니 때문에 지방 고을을 자청함.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청렴으로 자신을 지켜 한 돌 만에 돌아오는데 행장이 아주 간단할 뿐이었음.
    영남루(嶺南樓)의 시가 있음.
  • 1518년(중종 13년 무인) 나이 44세
    사재감(司宰監) 부정(副正)으로 들어옴.
    김제군수(金堤郡守)가 됨.
    선생이 장령으로 있을 때부터 직언을 잘 하였기 때문에 권세 있고 존귀한 이의 미움을 잘 샀기에 서울에 있기를 싫어하고 외직을 구하였으니 아는 이들은 한스러이 여김.
  • 1519년(중종 14년 을묘) 나이 45세
    홍문관 응교(應敎) 겸 지제교에 오름. 선생이 군수 된 지 몇 달 안 되어 부름을 받았는데,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동시에 선발되니 세상에서 사람을 얻었다고 칭찬이 자자함.
  • 1520년(중종 15년 경진) 나이 46세
    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 겸 지제교가 됨. 그 때 인종이 세자로 있었는데 성인스러운 자질은 하늘이 주고, 학문이 날로 흡족하고 풍부하여 비로소 시강원을 개설하고 경술(經術)의 선비를 선발하였는데, 선생과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이 동시에 선발됨.
    6월 17일 어머니 김씨부인(金氏夫人) 의 상을 당함.
    그 때 김씨부인은 둘째 아들 서윤공의 임소(任所)에서 요양 중이었으니 이에 선생이 천 리의 분상(奔喪)에서 슬퍼함이 그지없었음.
    9월 7일 어머니 김씨 부인을 장령공 묘소 뒤편으로 모셔 옴.
    어머니 김씨부인의 행장을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에게서 지어 받음.
  • 1521년(중종 16년 신사) 나이 47세
    8월에 고·비위(考·?位)의 묘석을 세움. 장령공의 비문은 계해년(1503)에 이루어 놓았으나 아직도 세우지 못했다가 이 때 비로소 세움.
  • 1522년(중종 17년 임인) 나이 48세
    6월 17일 어머니 김씨부인의 삼년상을 마침.
    선생은 이로부터 세상에 나설 뜻이 없어 비록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여도 항상 임천(林泉)에 뜻을 두어 장동(壯洞) 청풍계(淸風溪) 수석(水石)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모정(茅亭) 한 채(태고정 : 太古亭)를 짓고 그 앞에 세 못을 파놓고 공사(公事)를 마친 여가에는 곧 그곳에서 소영(嘯詠)하며 홀연히 진세(塵世)를 벗어날 생각을 가졌으니 삼당(三塘)이란 호는 이 때문에 있게 됨.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됨.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승진함.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의 시 「花山養老宴韻」과 「汾江愛日堂韻」에 화답함. 을묘년 가을 농암 선생이 와서 양로연을 베푸니 시골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지어 선생의 화답을 원했으나, 선생이 당시에 부름을 받고 미처 화답하지 못했다가 이제 추화(追和)한 것임. 선생이 양친을 여읜 뒤로 지극한 슬픔이 맺혀 이따금 시사(詩詞)에 나타나니 역시 효성이 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음.
    애일당(愛日堂)의 구경첩(具慶帖) 속에 선생의 수필(手筆)이 있음.
    백부 합천공(陜川公)이 돌아감.
  • 1523년중종 18년 계미) 나이 49세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옮김.
    김굉(金?)을 영남관찰사로 전송함. 증시(贈詩)에 “힘써서 남도(南道)를 밝혀달라.”는 권면의 뜻이 담겨 있음.
  • 1524년(중종 19년 갑신) 나이 50세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옮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겸 지제교(知製敎)로 특채됨.
  • 1525년(중종 20년 을유) 나이 51세
    사건이 있어 대호군(大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형조참의(刑曹參議) 겸 지제교가 됨.
    경명군(景明君)의 묘표(墓表)를 지음.
    농암(農巖) 문간공(文簡公)이 지은 경명군묘지(景明君墓誌)에 선생이 지은 것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참의(參議) 김공(金公) 아무는 창협(昌協)의 6대 백조(伯祖)”라 함.
  • 1526년(중종 21년 병술) 나이 52세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으로 승진함.
  • 1527년(중종 22년 정해) 나이 53세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지제교로 옮김.
    6월 16일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임명됨.
  • 1528년(중종 23년 무자) 나이 54세
    7월 19일 서울 집에서 돌아가심. 선생이 수년래 풍증을 앓아왔고, 또 둘째 아들의 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쳐서 병의 원인이 됨. 부음이 전해지자 조야에서 애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음.
    교하군(交河郡) 북탄포(北炭浦) 금승리(金蠅里)(현 坡州郡 炭縣面 洛河里)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례함.
    선생의 외가 능성군(綾城君)의 영내(瑩內)를 따른 것임. 김씨부인도 같은 곳에 장례했는데 쌍분(雙墳)임.
  • 1529년(중종 24년 을축) 선생 돌아가신 지 1년
    가장(家狀)이 이루어짐. <글은 일실(逸失)됨>
    맏아우 서윤공(庶尹公) 번(?)이 지음.
    묘갈명(墓碣銘)이 이루어짐. 대제학(大提學)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이 짓고, 신분(申?)이 전각(篆刻)과 아울러 씀.
  • 1672년(현종 13년 임자) 선생 돌아가신 지 144년
    묘비를 다시 세움. <옛 묘비가 오래 되어 마멸되어 6대손 계광(啓光)이 마침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무렵 다시 세움.>
    묘갈명(墓碣銘)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씀. <선생의 손자 현감(縣監)인 기보(箕報)가 퇴계 문하에 유학했을 적에 쓰기를 청하여 소장했다가 이 때 다시 새긴 것임>
    종5대손(從五代孫)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수항(壽恒)이 추기(追記)하고 아울러 전각(篆刻)함.
  • 1829년(순조 29년 을축) 선생 돌아가신 지 301년
    유집(遺集)과 연보(年譜)가 이루어짐.
    종십대손(從十代孫) 대사헌(大司憲) 양순(陽淳)이 감정함.
  • 1834년(순조 34년 갑오) 선생 돌아가신 지 306년
    10월 29일 사림(士林)이 안동 역양서원(?陽書院)을 짓고 위패(位牌)를 봉안했으며 선생의 손자 창균공(蒼筠公 : 휘 箕報)도 함께 배향함.
    종십삼대손(從十三代孫) 대사성(大司成) 정균(鼎均)이 봉안문(奉安文)을 짓고, 예조참판(禮曹參判) 풍산(?山)의 유태좌(柳台佐)가 제향(祭享) 축문(祝文)을 지음.
  • 1942년(임오) 선생 돌아가신 지 414년
    시향일(時享日 : 음력 10월 1일)에 문중에서 뜻을 모아 묘비가 오랜 풍상에 글자가 마멸되매 새로 다시 세움.
    종십오대손(從十五代孫) 비서승(秘書丞) 동강(東江) 영한(?漢)이 추기(追記)하고 종십사대손(從十四代孫) 동돈녕(同敦寧) 영운(穎雲) 용진(容鎭)이 씀.


삼당공 유필


  공의 휘는 영(瑛)이고, 자는 영지(英之)이며, 성은 김(金)씨이니 안동인(安東人)이다. 시조의 휘는 선평(宣平)이시니 신라 말에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토벌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은 태사이셨다. 고을 사람들이 그 공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니 자세한 것은 퇴계 선생의 기문(記文)에 있다.
  중세에 휘 희(熙)는 판도판서를 지내셨고, 휘 자(資)를 낳으시니 위위주부동정이시고 이 분이 휘 의(義)를 낳으시니 판례빈시사이시고, 이 분이 휘 득우(得雨)를 낳으시니 전농정이시고, 이 분이 휘 혁(革)을 낳으시니 합문봉례랑이시고, 곧 공의 4대조이시다. 할아버지의 휘는 계권(係權)이시니 한성판관이시고, 아버지의 휘는 영수(永銖)이시니 남대장령이시고, 큰 재질과 두터운 소망이 한 세대에 존중되었다. 어머니는 숙인 강릉김씨이시니 현령 박(博)의 따님이시고, 판서 추(錘)의 증손이시다. 성화 을미년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豊山懸) 소요산리(素曜山里) 집에서 공은 태어나셨다. 태기가 있을 때에 해와 별이 빛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여 어려서는 이름을 몽천(夢天)이라 하였다.
  태어나시면서 총명하고 영특하시어 말을 하면서부터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고 하루에 수 백 단어를 기억하셨다. 종조부 보백당(寶白堂)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번거로이 가르치지 않아도 문리가 절로 통함에 보백당께서 기특히 여기고 아끼면서 “다음날 우리 집안을 키우며 크게 빛낼 사람은 바로 이 아이로다.”라고 말하셨다.
  경자년에 장령공이 영덕읍재(盈德邑宰)가 되시어 향교를 크게 수리하고 그 고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칠 때에 공은 겨우 일곱·여덟 살이었다. 날마다 공부하는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람들을 놀라게 할 따름이니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 하였다. 장령공은 성품이 엄하시고 법도가 있으시어 항상 자제들을 타이르되 “나는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어 배움에 때를 잃어 독서나 문장을 잘 익히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너희는 나와 같이 되지 말아라.”고 하셨다. 또한 어머니께서도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자제를 가르침에 규칙이 있었으며 문리를 해득하시어 공부에 채찍질을 하시매 공이 교훈을 받들고 덕성을 배양하시니 문사(文詞)가 숙성하실 뿐만 아니라 을묘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다 합격하시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소문이 더더욱 빛나 한 때의 명사들이 모두 진정으로 사귀기를 원하였다.
  임술년에 장령공께서 금교(金郊)의 임지에서 돌아가시매 공이 천 리의 분상(奔喪)에 슬퍼하심이 예도에도 지나칠 정도이셨다. 이미 선영에 장례하시고 행장을 지으시고서 대제학 성현(成俔)에게서 갈문을 받았다. 상을 마치매 항상 일찍 아버지 여읨을 슬퍼하여 어머니를 효도로 봉양하되 마음 편하게 해드리는데 정성을 다하셨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이면 항상 가마로 삼구정(三龜亭)에 모셔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거문고를 울려 즐겁게 해드리기를 장령공께서 어머니를 모시던 때와 똑같이 하셨다.
  중종 병인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합격하셔서 예문관에 선발되어 검열(檢閱)이 되시고 정묘년에 대교(待敎)로 옮겼을 때 김점필재(金?畢齋)를 비롯한 화를 입은 제현들의 억울함을 씻는 상소를 하셨다.
  상소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사학이 있고, 사학(史學)이 있은 뒤 시비가 분명해졌고, 시비가 분명해진 뒤에 천하 만세의 공론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학 때문에 사형(死刑)을 받고 후손들에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에서 여러 성왕(聖王)이 이으시어 더욱 사학을 중시했는데 폐한 임금(燕山君)에 이르러서 두서너 간신이 임금을 악으로 인도하여 역사의 사실로 변란이 있었으니 이런 일은 옛날에 일찍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화는 갑자년으로 만연되어 선비들이 다 쓰러지고, 종묘사직이 위태로이 되어 국운이 끊기니, 사가의 필법이 이로부터 모두 폐하여 만세의 공론이 사라져서 전하지 못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과규(科規), 조례를 만들어서 당시 추관에게 상을 내렸던 것을 회수하고 사법(史法)을 변란한 자는 경중에 따라 형벌을 내리시고 역사의 사실로 형을 받은 이를 모두 추봉(追奉)하여 공론을 통쾌하게 하옵소서. 전하의 이러하신 일은 천고(千古)에 뛰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사기가 꺾여 모두가 무오의 화를 경계하여 감히 기개를 펴서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홀로 분연히 동료들에게 이르되 “무오·갑자년에 화를 입은 이들이 모두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분들이며 사문(斯文)이 떨치지 못할 것이다.”라 하면서 동료들을 일깨워 손수 소를 써서 항고(抗告)하셨다.
  임금께서는 이에 화를 입었던 모든 분들에게 신원하게 하고 벼슬을 추증(追贈)하였으니 선비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무진년에 봉교(奉敎)로 옮겨 동료들과 다시 이극돈(李克墩)의 추죄(追罪)를 청하여 드디어 극돈의 벼슬을 추탈(追奪)하였다. 홍문관 박사로 옮기셨다가 수찬으로 승진하여 지제교를 겸하셨다. 신미년에 사간원 정언이 되고, 이어 홍문관 교리가 되셨다. 그리고 임신년에 이조정랑이 되셨다. 곧 경상도의 재해로 말미암아 경차관(敬差官)이 되셨다. 을해년에는 장악원 첨정과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셨다. 그 때 권신(權臣)과 간신(奸臣)들이 일을 맡아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함에 공이 경연에서 입대(入對)했을 때 말씀이 강경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굽히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병자년에 의정부 검상이 되셨다가 곧 사인으로 승진되었고, 정축년에 군기사(軍器寺) 부정(副正)이 되셨다가 어버이의 늙으심을 이유로 하여 외직을 찾아 밀양부사가 되셨다. 너그럽게 백성을 다스리고 청렴으로 자신의 몸가짐을 삼았다. 한 돌 만에 돌아가는데 행장이 매우 쓸쓸하고 거문고와 책뿐이었다. 무인년에 다시 사재감 부정으로 들어가셨다가 김제군수를 임명받았다. 공이 장령일 때에 세도가에게 미움을 사서 조정에 있기가 싫어 외직을 구했으니 아는 이들은 안타까이 여겼다.
  기묘년에 홍문관 응교로 부름 받아 복재(服齋) 기준(奇遵)과 함께 선발되니 당시에 쓸 만한 인물을 얻었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경진년에 필선으로 옮기셨다. 당시에 세자의 풍모 뛰어나시고 숙성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하니 시강원(侍講院)을 개설하여 경학사(經學士)를 선발하매 공과 양곡(暘谷) 소세양(蘇世讓)이 함께 선발되었다. 좌우에서 보필하니 공로가 매우 많으셨다.
  그 해 여름 어머니 숙인 김씨의 상을 안음현(安陰縣) 관사에서 당하셨으니 둘째 아들 번(?)의 임지에 따라가셨던 것이다. 공과 두 아우가 모셔다가 장령공의 묘소 옆에 장례하였다. 여묘(廬墓)와 슬퍼하시는 절차를 아버지 상사 때와 똑같이 하셨다. 임오년에 상을 마치매 공은 이때부터 세상에 나설 뜻이 없었다. 일찍이 서울 장동(壯洞) 청풍계(淸楓溪)의 수석이 아름다운 곳을 사랑해서 그 위에 한 채의 초정을 짓고, 정자 바로 앞에다 세 못을 파서 날마다 노니시니, 훨훨 속세를 벗어난 기상이 있어 서울 장안에서 모두 삼당(三塘) 선생이라 일컬었다.
  다시 장령이 되셨다가 내자시정(內資寺正) 승진하셨다. 계미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옮기셨고, 갑신년에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옮기셨다가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셨다. 을유년에 어떤 사건으로 대호군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형조참의로 승진되셨다. 병술년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셨다. 그리고 정해년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기셨다.
  공은 문망이 매우 두터워 임금의 사랑이 지극히 높았다. 수찬에서 참의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직함을 가질 때마다 지제교(知製교) 석 자가 늘 따라다녔으니, 당시의 논자들은 양대년(楊大年)에 비유하였다.
  그런데 공이 풍증을 앓았고 또 아드님을 잃어 병이 더 악화되어 가정 무자년 7월 19일에 서울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쉰 넷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교하현(交河縣) 낙하(洛河) 나루의 오향(午向) 언덕에 장례하였으니 바로 외할아버지 능성공(綾城公)의 영내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시고 용의가 단아하시어 금옥과 같은 모습에 시와 예의 가훈을 이어 마음과 몸을 닦되 성실하고 거짓됨이 없는 것으로서 근본을 삼았다.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여 살아계셔서나 돌아가셔서나 따질 것 없이 있는 정성을 다하여 여한이 없도록 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우애가 두터우셔 침상과 이불을 함께 하여 서로 돕고 힘써 형제 세 분이 모두 대·소과에 선발되니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평생에 사물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독서를 지극히 졸아했으며, 성리의 깊은 뜻에 잠겨 사(邪)와 정(正)의 갈림길이 분별하여 날마다 문인이나 씩씩한 선비들과 강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천성에서 태어난 것이어서 사람들이 비구름이 섞어치듯이 밤낮으로 마음이 변하는 이를 보면 곧 침을 뱉듯이 버리되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현명한 사우와 노닐었으니 조정암·이희재·이음애·권충재·김모재·이농암·권기정·박눌재·김허백·소양곡 등과 사귀어 도의로 서로 인정하고 연마하여 성취했으니 사우·교유 양록을 보면 그 연원이 내린 것을 알 것이다.
  학문은 경술을 근본으로 하고 행동은 인륜의 상도에서 드러났으니 마음에 간직된 것이 바르기 때문에 밖으로 펴나는 과단성이 있고 확실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 있어 임금을 섬김이 어떤 여건에서도 한결같았으니 몸소 상소하여 대현들의 억울함을 씻을 수가 있었고, 임금의 면전에서 간신의 죄를 공격할 수가 있었다. 끝내 사가(史家)의 공론이 사라지지 않게 되고 사문(斯文)의 정맥(正脈)이 떨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그 공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문장은 전중 섬세하고 화려하며 더욱 시에 뛰어나서 당세를 크게 울렸고, 한완(翰宛)이나 관부(官府)에 출입하면서 항상 임금의 교서를 맡아 짓는 지제교의 직함을 맡기가 20여 년이었다. 구양수가 임금의 제교(制敎)를 지었던 표성주의(表聖奏議)의 여러 편보다 많이 세상에 전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거의 산일(散逸)되어 겨우 국사(國史)의 기록에 소장(疏章) 얼마와 기아(箕雅)나 여지승람(與地勝覽)에서 볼 수 있는 몇 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남은 금조각이 더욱 귀하고 보배스럽다.
  충재(?齋) 권충정공(權忠定公)이 일찍이 공에게 그 선대의 비문을 부탁하였으니 공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문학의 여망이 얼마나 일찍 드러났던가 하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문장은 공에게 지극한 것이 아니고 뜻하신 일이나 아름다운 풍모는 모두 경학(經學)에서 나온 것으로 옛사람에게서 찾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수(壽)가 겨우 중년에 마쳐서 크게 시행함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천하 사람들이 복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행장·치적은 서윤공(庶尹公)의 서술에 있었는데 세대가 오래 되어 전해지지 않고 갈문(碣文)은 소양곡(蘇暘谷)이 지은 것이요, 또 대현(大賢)의 손수 쓰신 마음의 글씨로 묘도(墓道)에 장식되었고, 그 나머지는 선세(先世)의 가장(家狀)이나 갈문(碣文) 및 제현(諸賢)의 기록에 보이니 말하여 놓은 것은 믿을 만하고 고증할 만한 것들이다.
  성(成) 허백(虛白)이 지은 장령공 갈문에 “아드님 아무는 널리 배우고 문장이 능하여 세상에 큰 이름이 있다.”라 하였고, 서윤공 갈문에는 “내 유익한 벗 김 아무는 문장과 행동이 한 세대에 이름이 높아 당시의 무리들이 그 이름을 흠모하였다.”라 하였고, 권(權) 충재(沖齋)의 교유록에는 “김 승지 아무는 문학의 여망이 있어 일찍이 한원(翰苑)에 있어서 점필재를 상소하여 신원하였다.”라 하였고, 성 허백의 사우록(師友錄)에는 “김낙재(金樂齋 : 선생의 또 다른 호) 아무는 사람됨이 단아하고 문장이 전중하다.”라 하였으니, 오! 이런 것들은 공의 실적에 대한 대략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부인은 상주김씨(尙州金氏)이시니 진사 광려(光勵)의 따님이시고 부사 자철(自喆)의 손녀이시다. 2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생락(生洛)이니 별좌(別坐)요, 다음은 생한(生漢)이다. 생락이 3남을 두니 규보(奎報)는 좌승지의 증직이 있고, 기보(箕報)는 현감이고, 성보(星報)는 목사이다. 규보가 2남을 두니 양(樑)은 이참(吏參)의 증직이 있고, 다음은 식(植)이다. 기보가 3남을 두니 극(克)과 증좌승지인 태(兌)와 원(元)이다. 양이 1남을 두니 광수(光燧)로 동중추에 이판의 증직이 있다. 극이 1남을 두니 참봉인 희맹(希孟)이다. 태는 진원(震遠)을 양자로 삼으니 경력이었다. 원이 2남을 두니 희진(希振)과 희발(希撥)이다. 광수가 1남을 두니 중일(重逸)인데 승지였다. 희맹이 4남을 두니 거 · 후 · 숙 · 견이다. 진원이 2남을 두니 수하 · 수은이다. 희진이 3남을 두니 인 · 연 · 암인데 암은 현감이다. 희발이 2남을 두니 성 · 선이고 선은 진사이다. 그 밑으로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후손 재근이 공의 유사(遺事) 한 벌을 나에게 주면서 덕행을 서술하는 장문을 청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후생이 고루하고 과문해서 어찌 일을 감당할 수 있겠나마는 다만 읽어본 공의 한원(翰苑)에 있을 때 올린 소(疏)·계(啓)의 글에서 오히려 선배님의 풍모나 절도가 뛰어났음을 깨닫게 하고 국가에서 사기를 북돋아주게 한 공 또한 끝내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윽이 그 채찍을 잡고 바라보고 사모하는 사정(私情)을 이길 수가 없어 삼가 유사(有事)를 보고 경개를 펴고 마음에 감동된 바를 이렇게 곁들여 다음 역사가들의 채택이 있기를 바라노라.
  어모장군(禦侮將軍) 전(前) 행(行)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 풍산(豊山)의 류심춘(柳尋春)은 삼가 짓다.


  김군(金君) 영지(英之)가 별세한 이듬해에 계씨 번(?)이 가장(家狀)을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자네가 우리 형님과 교분이 가장 친밀한 사이였고, 우리 형님을 알 만한 이가 자네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명(銘)을 써주도록 감히 청하노라.” 한다.
슬프도다! 김군의 명을 내가 어찌 차마 지어야 한다는 말인가?
  군은 안동인(安東人)이다. 원조(遠祖)의 휘(諱)는 선평(宣平)인데 고려 태조를 섬겨 공이 있어 안동부에서 대대로 식록(食祿)을 받아 자손들이 그곳에서 살아왔다.
  비안현감 휘 삼근(三斤)이 한성판관 휘 계권(係權)을 낳았으며, 판관이 사헌부장령 휘 영수(永銖)를 낳았는데, 장령이 현령 김박(金朴)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화 을미년(1475)에 군을 낳으시다. 군의 어머니께서 해와 별이 밝게 빛나는 태몽을 꾸었으므로 아명을 몽천(夢天)이라 했고, 뒤에 본 이름을 영(瑛)으로 고쳤다. 나면서부터 총혜하여 말을 할 줄 알면서 글을 지을 줄 알아 날로 수백 단어를 기억하여 크게 동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홍치(弘治) 을묘년(1495)에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여 명성이 더욱 빛나서 한 때의 명사들이 진심으로 사귈 것을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병인년(1506)에 과거에 합격하셔서 예문관에 선발되었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봉교(奉敎)에 이르렀다. 무진년(1508)에 홍문관 박사로 옮겼다가 수찬으로 승진되었다. 신미년(1511)에 사간원 정언으로, 그리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임신년(1512)에 이조정랑을 지냈고, 을해년(1515)에 장악원 첨정으로 있다가 곧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었다. 병자년(1516)에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사인(舍人)에 승진했다. 정축년(1517)에 군기사(軍器寺) 부정(副正)으로 있다가 어버이의 늙으심 때문에 외임을 원하여 밀양부사로 나갔다가 무인년(1518)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재감(司宰監) 부정(副正)이 되었다.
  군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경연에서 사리를 논하다가 당로(當路)의 거슬림을 사서 서울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애써 외직을 원하여 김제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을묘년(1519)에 홍문관 응교로 역소(驛召)됐다가 경진년(1520)에 세자의 풍도가 숙성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하므로 비로소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하고 경학이 있는 사람을 특선하게 되니 필선(弼善)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곧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가 임오년(1522)에 상을 마치고 다시 사헌부 장령을 맡았다가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승진하였다. 계미년(1523)에 이르러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옮겼다가 갑신년(1524)에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냈고,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을유년(1525)에 일이 생겨 좌천되어 대호군(大護軍)을 받았다가 곧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병무년(11526)에 좌승지(左承旨)에 승진되어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을 겸했으며, 정해년(1527)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 수찬에서 참의에 이르기까지 직함마다 지제교(知製敎)를 겸하게 되었으니 대저 중선(重選)이었다.
  군이 수 년 동안 풍비(風痺)를 앓아 괴로이 지내왔는데 이어서 자제의 상까지 당하여 슬픔이 지나친 탓으로 병이 위독하게 되고, 끝내 일어날 수 없게 되니 가정 7년(1528) 7월 19일이었고, 수(壽)는 54세였다.
  군이 진사 김광려(金光礪)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으니 장자는 생락(生洛)이요, 차자는 생한(生漢)인데 군보다 먼저 요사했으며 딸은 어리다. 생락은 현령 박조(朴稠)의 딸에게 장가들어 일남일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생한은 도사(都事) 신억수(辛億壽)의 딸을 맞아 일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군의 자질과 용모는 단아(端雅)하고 성품과 도량이 화락(和樂)하며 평이(平易)하여 사람이나 물건을 대하는 데 있어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에 집의 살림을 위한 일에는 등한한 편이었으며 의지(意志)를 독실히 하여 힘써 배우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다. 취하여 고금의 일들을 논하게 되면 흔흔함이 거설(鉅屑)과 같았으며 효도와 우애에 있어서도 남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문장을 구사함에 있어서도 섬려(纖麗)하였으며 더욱 시에 뛰어났었다. 저술한 약간 권의 책이 있다. 내가 군과 함께 옥당(玉堂)에 들어가 전랑(銓郞)이 되었고 또 함께 동궁(東宮)을 섬겼으므로 더더욱 좋고 궂은 일에 두터운 의리가 있었다. 이제 이미 가버렸으니 어찌 옛날 생각이 떠올라 같이 슬퍼하지 않을손가?
  오, 슬프다! 명(銘)에서 말하노라.
  “낙동강물 신령이 있어 위인을 낳았도다. 군이 그 중에서도 참되었으니 바탕은 순후하고 아름답도다. 박옥(璞玉)에 박힌 백옥인 듯 다듬고 쪼지 않은 순수한 의용(儀容)과 늠름한 담봉(談鋒)은 칼날같이 예리하도다. 사람 속의 용(龍)이라 친찬 받아 소매를 날려 깃을 펴듯 하였도다. 왕정(王廷)에 드날려 공서(公署)의 장소나 궁중연락(宮中燕樂)에 늘 있었도다. 모든 미(美)를 겸하면서도 창끝 같고 송곳 같았도다. 그대 어찌 머물러주지 않는가? 하늘이 내었거늘 하늘은 어찌 또 빼앗아 가는고! 어찌할 수 없구나 하늘이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曺參判) 소세양(蘇世讓)은 짓다.
  <이 비문은 소세양(蘇世讓)이 짓고, 글씨는 이황(李滉)이 씀>


삼당공(三塘公) 휘(諱) 영(瑛) 묘소(墓所)
 


  공이 가정(嘉靖) 무자년(1528)에 별세하시어 교하 북쪽 낙하의 자좌(子坐) 오향(午向) 언덕에 장사지내니 곧 외할아버지 능성공(綾城公)의 묘 옆이다. 김씨부인(金氏夫人)도 같은 곳에 장사지냈으나 분묘를 달리 하였다.
  처음 공을 장례할 때 묘 옆에 비를 세우니 비문은 양곡(暘谷) 소공(蘇公)이 지었으며 산인(散人) 신분(申?)이 쓰고 전각(篆刻)하였다. 그러나 돌의 질이 매우 나빠서 세월이 오래됨에 깎여 흐려져서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자손들이 이를 안타까이 여기고 있던 터에 공의 손자 현감 기보(箕報)가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다가 일찍이 선대의 여러 갈문을 선생께 청하여 한 통씩 써 받아 가보로 간직하여 지금까지 전하니 자획이 분명하다.
  공의 육대손(六代孫) 계상(啓祥)·계광(啓光)·명석(命碩)이 서로 의논하고 새 돌로 바꾸려는데 마침 계광이 풍기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그 고을에는 돌이 나는 곳이므로 봉록(俸祿)을 일부 떼어서 석재와 석공을 구하여 좋은 글씨로 새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자손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오늘날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있고 없고를 말할 것 없이 이 선생의 한 글자 한 글자가 큰 보옥보다 나으니 이것으로써 새기는 것이 어찌 선조의 산소에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장차 공사하려 하는데 계상이 서울로 달려와 수항(壽恒)에게 그 전말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현감공이 이 선생에게 써주시기를 요구했던 것이 비록 오늘과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 예측해서 한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현인을 사모하고 선조를 받는 정성은 대강 살펴볼 수가 있다.
  지금까지 백여 년에 여러 번의 전란을 겪었어도 잘 보존될 수가 있어서 묘도(墓道)의 중요한 일이 되었으니 대현(大賢)의 마음의 획과 손자취에 실로 신명(神明)의 가호가 당연히 있었던 것이요, 또한 현감공의 정성된 효성이 암암리에 감동되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 또한 경이로운 일이로다.
  공의 내외손이 무릇 수백 명이니 많아서 적지 못하도다. 계상은 고향에 있어 선인으로 칭찬받고, 계광은 문과로 나아갔으며, 명석은 바야흐로 현감에 올라있다. 그 밖의 자손들의 현달하지 못한 이도 모두 효도와 우애를 잘 하며 순수하고 근면해서 대대로 끊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의 유훈(遺訓)이 미친 덕이라 하였다.
  공의 아우 서윤공(庶尹公)은 곧 수항의 오대조(五代祖)이시다. 이제 이 일에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의리가 있나니 드디어 삼가 위와 같이 적노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報國崇綠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兼) 영(領) 경연사감(經筵事監) 춘추관사(春秋館事) 김수항(金壽恒)은 기록하고 아울러 전서(篆書)까지 하노라.


  원비(原碑)는 퇴계 선생이 쓰고 선조 문곡공(文谷公)이 추기(追記)하심과 아울러 전서(篆書)하셨다. 세월이 오래 지나 마멸되어 읽을 수 없고, 오직 비 윗머리의 전서만 알아볼 수 있다. 온 종중이 의논하여 이제 비석을 바꾸려 한다. 족숙 용진(容鎭)에게 부탁하여 추서(追書)하게 하고 전각(篆刻)은 이내 옛 각자를 본떠서 그대로 새겼다.
  공이 한원(翰苑)에 있을 때 무오사화에 대한 소(疏)를 올려 제현(諸賢)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힘쓰고 뭇 간사한 무리들의 죄를 추정(追正)하시니 이에 사기가 퍼지고 국세가 떨쳐졌다. 이것이 바로 공이 조정에서 보인 대절(大節)이신데 비석에 실려지지 않았으므로 아울러 기록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여 실린다.
  종십오세손(從十五世孫) 영한(?漢)은 기록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