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묘(太師廟)의 위패(位牌)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선 광해군(光海君) (1608) 때에 삼성(三姓)의 대표 김태(金兌) 권함(權) 장흥효(張興孝)가 합의(合議)하여 위패를 세 분이 같게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으로 고쳐 성(姓)과 휘(諱)만 다르게 개제주(改題主)하여 삼태사의 묘소(혹은 단소)의 위치와 위패의 위치가 같게 하여 나란히 모시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안다. 이 역사적 사실 속의 삼성(三姓) 대표 중 김태(金兌, 1561~1609) 선생이 오김(吾金)의 대표이다.
  선생의 자(字)는 사열(士悅)이고, 호(號)는 수월당(水月堂), 구담(九潭), 오동정(梧桐亭) 등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닦고 퇴도(退陶) 선생의 연보를 편차하였으며, 임진왜란 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선생이 지키고 있는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달려가 손수 격문(檄文)을 지어 국민의 충의(忠義)로운 마음을 고동(鼓動)시켜 의병(義兵)을 일으켜 모으고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으로써 흉봉(凶鋒)을 막아 엄연하게 강회(江淮)의 보장을 성취토록 하였다.
  선생의 이모저모를 삼종제(三從弟) 청음(淸陰) 선생은 묘갈(墓碣)에 새겨(銘) 다음(국역)과 같이 전한다.
 이르노니(曰), 구담(九潭) 선생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성은 김씨요 휘는 태(兌)이고 자는 사열(士悅)이며 호는 구담이라 했다. 사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삼은 것이다. 또 다른 호가 있는데 오동정(梧桐亭)이라 하며 그가 뜰에 심어놓은 오동나무로 말미암아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비조(鼻祖)는 태사(太師)라 하며 휘(諱)는 선평(宣平)이다. 신라 말엽에 고창군(高昌郡) 성주(城主)로서 군대로 고려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에게 원수를 갚았으므로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봉되고 사당을 지어서 백세를 제향토록 하였다. 그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를 삼으니 자손들이 드디어 안동인(安東人)이 된 것이다.
  태사가 계신 후 사백여 년 동안 경사로움이 이어졌다. 고려 말에 휘 득우(得雨)가 있었는데 전농정(典農正)을 지냈으며, 3세(世)를 지나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이른 휘 영수(永銖)는 선생에게 고조부가 되며, 나와도 동고조부가 된다.
  증조부의 휘는 영(瑛)이요, 호는 삼당(三塘)이라 하는데 관직이 이조참의였고, 할아버지의 휘는 생락(生洛)이며 벼슬은 사포서 별좌이다. 아버지의 휘는 기보(箕報)요 창균(蒼筠)이라 했는데 퇴계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고 벼슬은 음관(蔭官)으로 세 고을을 두루 돌아 다스렸다.
  어머니는 숙인 영천이씨(永川李氏)로서 효절공(孝節公) 현보(賢輔)의 손녀이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가운데가 곧 선생으로 가정(嘉靖) 신유(辛酉, 명종16, 1561)년 5월 9일에 태어났다. 나면서 모습이 뛰어나 이마는 넓고 눈동자는 빛났으며 총명하고 영특했다. 그 말을 배울 때가 되자 이미 글자를 알았고, 한 번 보면 그대로 외웠고 외운 것은 일생 동안 잊지 않았다.
  7세가 되던 해에 이미 글자를 모아 글을 지었으며, 지으면 꼭 구절을 맞추었는데, 그 중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글귀가 있어 사람들이 외우는 일이 많았다고 하니, 신구(神駒)가 물에서 뛰쳐나와 발을 쳐들어 한 걸음에 천리를 달리려는 기세와 같았다.
  창균공이 말하기를 “일찍이 퇴도(退陶) 선생의 가르침을 들었는데 처음 글을 배우려는 사람은 반드시 뜻을 세우는 일을 우선으로 삼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야 한다.”고 하셨다면서, 책을 가지고 서애 류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배울 것을 명했었다.
  그가 저술하는 데 있어서는 월나라의 칼이 숫돌에 갈리는 것과 같아 금석도 그 앞에서는 굳은 것이 되지 못하였다.
  칠양(七襄)으로 문장을 이루기를 기약함과 같고 넓은 근원을 가진 냇물이 강과 바다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그 정신의 상쾌함은 혁혁(奕奕)하고 그 음조(音調)는 유유(溜溜)했다. (이하 8자가 떨어져나감)
  선생에게 있어 문장은 오히려 여사(餘事)였다.
  무릇 밝게 통한 자질과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제할 재주를 가지고 산야에서 도를 지키며 영화의 길에는 생각을 두지 않은 것은 선생의 조집(操執)과 이력(履歷)이요, 이기(理氣)의 오묘함을 궁구하고 음양을 상량하여 어려운 곳을 파헤쳐서 얼음이 풀리듯 풀어내는 것은 선생의 학식이며, 낙동강 가에서 친구들을 모아 친목을 도모하고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보내어 군인을 모집하고 진지를 구축하여 적을 방어한 것은 선생의 충의요, 무력과 위엄에도 굴하지 않고 곤액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으며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선한 사람을 좋아하기를 자기 몸처럼 하는 것은 선생의 기절(氣節)이었다.
  이와 같은 재주와 덕을 가지고 임금을 섬겼으며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 수 있었는데, 운명의 길이 뜻과 어그러짐이 많아서 하늘이 나이를 빌려주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만력(萬曆) 기유(己酉, 광해 1, 1609)년 2월 18일 별세하니 그 나이가 49세였다. 묘는 풍산 역동 유좌(酉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서 진사 언박(彦璞)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남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기송(記誦)했다고 한다. 자라서 선생에게 시집 와 32년을 함께 살았으나 늘 하루같이 남편을 섬겨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2년만에 삼종질(三從姪)을 데려다가 양자를 삼았는데 그의 이름은 진원(震遠)이다. 그의 생부는 계종(繼宗)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고, 생모는 풍산류씨(豊山柳氏)로서 아들 3형제를 낳았는데, 둘째가 바로 진원이다.
  아! 선생의 재기와 덕량으로 배운 학문을 펼 수가 있었다면 생용(生鏞)과 보불()이 그리 멀지 않아서 이르렀을 것인데, 재주를 다 쓰지 못하고 덕을 다 채우지 못한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인가? 운명이던가!
그 아들이 지극히 착해서 능히 그의 업적을 이으니 불식(不食)의 보(報)와 다하지 못한 복이 있음을 믿겠노라. 천리(天理)의 확실함이 참으로 이와 같단 말인가! 명(銘 )하여 말하노라!
  하늘이 재주 있고 덕 있는 사람을 내리셨는데, 궁할 때 쓰고자 하나 미치질 못하네. 이것은 천명이 있음일 것이니, 공경하여 그 몸을 닦아 뒷자손들을 넉넉하게 하소서! 후손이 반드시 창성할 것이며 보시(報施) 또한 두터울 것이니라.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겸(兼)령(領)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 세자사(世子師) 삼종제(三從弟) 상헌(尙憲) 쓰다(撰).


기해보(己亥譜)에 나타난 증승지공(贈承旨公) 휘(諱) 태(兌)



 계자(系子) 진원(震遠)은 9세가 되어서 선생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때 선생께서는 이미 하세한 뒤였고 그 부인 김씨가 와서 후사로 삼기를 청하였다. 생부인 안악공(安岳公)이 허락하기를 꺼려했으나 삼종(三從)인 선원(仙源)과 휴암(休庵) 두 분이 여러 번 글을 보내어 권하였으므로 드디어 허락했다고 한다.
 진원은 출계한 뒤, 집이 가난하여 배움 그 자체에도 어려움이 많았으나 출중한 재주와 바탕으로 이를 능히 이기고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참하(參下)로 기용된 뒤 전적(典籍), 전랑(銓郞) 등을 거쳐 개성경력(開城經歷)을 지내다가 53세에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 전적으로 있을 때 심기원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일등(一等)에 책록되고, 이로 인하여 선고(先考)인 선생께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兼)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수찬관(修撰官)이 증직되고, 선비(先)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직첩이 내렸다.
  선생의 저술은 활자화되지 않은 채 종손 중적(重)과 그 후손이 진세(塵世)를 떠나 은거(隱居)하면서 방 안의 상자와 시렁 가득 쌓아두고 관수(管守)하다가, 중적공(重公)의 증손(曾孫)이 서거하여 장사(葬事)지내러 산에 간 사이에 집에 있던 고손부(高孫婦)가 모두 태웠다고 전하여 오니, 하(夏)와 은(殷)의 중간에 있었다고 하나 알려지지 않은 나라 기송(杞宋)과 같이 증명할 길이 없어 천추의 한이 된다.
 세간에 흩어져 현재까지 전하는 선생의 글로는 시(詩) 4편, 제문(祭文) 1편, 기(記) 1편, 격문(檄文) 1편이 있다. 그리고 보내온 글로는 서애 유성룡의 시 4편, 우복 정경세의 시 4편, 매창 정사신의 시 3편, 옥봉 권위의 시 2편, 검간 조정의 시 2편, 겸암 노경임의 시 4편, 서애 유성룡의 편지글 4편, 운천 김용의 만사 1편과 영전에 바치는 시 1편, 우복 정경세의 제문 1편, 창석 이준의 제문 1편이 전해오고 있다.
 이 글들 가운데서 선생의 시 1편(<오동정판상운>)과 격문 1편(<화왕산성창의시의 격문>), 그리고 유서애 선생이 보내온 시 1편을 소개한다.


松爲籬落竹爲
(소나무로 울타리 삼고 대나무(落竹)로 삽작하니)
一曲淸流數架亭
(한 굽이 맑은 냇가에 두어 칸의 정자일세.)
天心月到孤桐院
(하늘 가운데 달뜨는 밤중 되어 오동원이 고적하고)
野色煙晴細草坰
(들판에 안개 걷히니 동막이에 어린 풀도 잘 보이네.)
榮途袞冕非吾願
(벼슬길의 곤룡포와 면류관은 내 소원 아니고)
晟世絃歌宛爾聽
(밝은 세상의 음악소리 웃으면서 듣누나.)
河水深源潭水畔
(냇물의 근원 되는 연못가에서)
祥輝夜夜仰奎星
(상서로움 빛나는 밤마다 규성(奎星)을 바라보노라.)


  엎드려 생각하건대, 해동의 팔역(八域)이 위급하여 사느냐 죽느냐 하는 어려운 때를 만났도다.
  돌이켜보면 이 교남(嶠南) 지방이 아직도 효제(孝悌)와 충의(忠義)의 풍속에 힘을 입어 왕정(王政)을 펴는 국가로서는 선비가 많고 성왕의 덕화를 입은 유민(遺民)들이 많이 있도다.
  밖으로는 오랑캐라는 이름을 듣고 있지만 내부는 완전히 중화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본래부터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존중하여 오랑캐의 비인도적 행위를 배격했기 때문이며, 임금을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데 하늘과 땅이 도는 순리에 따르는 것을 기약한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도다.
  아! 나무가 썩으면 벌레와 좀이 자연히 발생하니 아까운 일이로다! 집에 불이 났지만 그곳에 사는 제비와 난새는 변함이 없도다! 정료(庭燎)와 완개(玩愷)가 나오자 예(禮)와 악(樂)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섬나라 오랑캐가 도적이 되어 침입했도다! 오로지 문치에 편안하고 무비에 소홀한 지 오래 됨으로 말미암아 혹독한 벌과 독벌레의 쏘임을 받았으며 그것 때문에 승냥이와 이리 떼의 탐욕을 펴게 했도다! 만억(萬億)이나 되는 군대가 사다리가 이어지듯 배를 이어 건너왔고, 삼천 리 강토가 기왓장이 깨어지고 풀이 바람에 쓰러지듯 짓밟혔도다! 아직도 은혜를 입은 하늘이 있는데 어찌 군대를 써서 싸움을 승리로 끌어갈 땅이 없겠는가! 비린내 나는 티끌이 바다에 넘치니 적세(賊勢)가 조량(나쁜 놈들이 함부로 날뛰면서 행패를 부림)하는 것이 원통하고, 피가 뿌려져서 비 오듯 하늘에 가득하니 백성들의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이 애처롭도다!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은 모두 잡혀갔고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도 겁탈과 노략질에 희생되었도다! 이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종묘와 사직을 지키던 금성(金城)과 탕지(湯池)도 파열되었고, 북쪽 변경지대인 수천 리 길을 옥가(玉駕)가 파천(播遷)했도다! 새가 깊은 숲 속으로 달아나는 것은 참으로 그물을 피할 수 있는 땅이 있어서가 아니고, 짐승이 깊은 골짜기로 도망가게 되면 도리어 함정에 말려들게 되는 법이다. 만약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도와서 일을 성사시킬 자원이 없겠는가!
  섶 위에 누워서 원수 갚기를 다짐한 지 삼 년 만에 회계(會稽)의 수치를 씻을 수 있었고, 밭의 한 이랑을 가지고도 끝내 하우씨(夏禹氏)의 구주(九州)를 다스린 공적을 회복한 일도 있었도다.
  문사는 붓을 던지고 창을 잡을 수 있으며 벌목하는 연장도 병기로 쓸 수가 있다. 몸을 바쳐서 군대에 들어가면서 누가 당시의 제갈량이 되지 못하라는 법이 있으며, 적과 더불어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사람이 지난날 수양(중국 하남성 귀덕부에 있는 지명. 안록산의 난 때 당나라 현종이 장순과 허원을 보내 최후의 방어지로 삼아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인 곳)보다 많을 것이다.
  어찌 다행스럽다고 하지 아니할까! 현풍의 옛 고을은 이에 홍의대장이 있는 곳이다. 시례(詩禮)가의 이름 있는 문벌이며 문무가 겸전한 장수이다. 효도하던 방법을 옮겨 충성하니 만 번이라도 죽을 수 있는 계책을 마련했고, 집일에서부터 나랏일을 처리하니 일생을 바칠 각오가 서 있다. 초년에는 유학(儒學)인 사서와 오경을 강마했고, 만년에는 나라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는 병서인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익혔다.
  새재의 큰 길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중외를 보장할 수 있는 관문이 없고, 화왕산의 외로운 성은 바야흐로 남북을 왕래하는 요충지로서 돌담을 이미 쌓아 이루었으니, 삼 리를 축성한다면 칠 리의 영수(水)를 이루어 만약 한 사람의 군인으로 지켜도 만 명을 대적할 수가 있다.
  군대란 정예함을 귀하게 여기고 많은 것을 주요시하지 않으며 장수는 지모를 소중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충성과 신의로 무장된 군대는 지금부터 근왕(勤王)으로 옮기고 예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노와 방패가 가는 곳에 적은 없거늘 하물며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천명을 받드는 군대를 일으켰고 또한 도독(都督)은 위엄을 가다듬었다. 이미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한 무리들과 진실로 동심 협력한다면 난을 진정하고 치세로 돌아가게 하는 데 어떠한 어려움이 있겠는가? 나와 같이 늙고 병들어 난리 중에 죽지 못한 사람도 너희들 충분(忠憤)과 함께 죽기를 바라도다! 가벼운 갖옷과 느슨한 띠로도 전쟁에 나아가고 아름다운 노래와 투호하던 솜씨로도 적을 맞아 싸울 것이다.
  높은 곳을 점령하여 아래서 올라오는 적을 막는 데는 돌을 많이 모아서 마구 던지고, 험난한 곳에 의지하여 중요한 곳을 지키려면 가만히 궁노수(弓弩手)를 매복시켜 적의 침공을 예비해야 한다. 과감하게 끓는 물을 뒤집어쓰고 불구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용맹을 다해야만 흙을 모아서 산을 만드는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길이 화부(花府: 花山府의 약칭. 안동의 옛 이름)에서부터 열렸으니 이미 뜻이 같은 사람들이 동참할 것을 알려왔고, 성은 진양(晉陽) 가까이 있으니 합세하고 후원할 병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서는 열사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되는 길이니, 생각해보건대, 하늘에 날아오를 듯한 기쁨으로 이 말을 들을 것이므로 감히 붓을 잡아 충성스럽게 알리는 바이로다.


薄暮山雲起
(어스레하게 저무는 산에 구름 일고)
中宵水月明
(한밤중 물 가운데는 달도 밝구나.)
一軒高桃臥
(외로운 집에 베개 높이 베고 누웠으니)
萬竹受風淸
(많은 대나무 바람에 씻겨 깨끗도 하네.)
落落悲前計
(낙락한 환경 속에 살아갈 일 막막하고)
悠悠念此生
(멀고먼 이 생애도 염려가 되누나.)
非無三寸舌
(세 치 혀가 없어서 말 못하는 것 아니지만)
還愧事縱橫
(도리어 얽히고설킨 일 있음을 부끄러워하네.)

  <金而靜金士悅以編次退陶先生年譜在玉淵書堂余病未往會而連夜月色淸甚吟寄四絶(김이정(金而靜) 김사열(金士悅)이 퇴도선생연보(退陶先生年譜)를 편차(編次)하기 위해 옥연서당(玉淵書堂)에 와 있었으나 내 병들어 가서 만나지 못하니 연일 밤 달이 매우 맑았으므로 절구 4수를 보내어 음미케 하노라.)>

증승지공(贈承旨公) 휘(諱) 태(兌) 묘소(墓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