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初期의 文臣으로 淸白吏로 推仰 받는 寶白堂 金 係 行은 安東 地方의 巨儒 退溪 李 滉 鶴鳳 金 誠 一, 西涯 柳 成 龍으로 이어지는 朝鮮朝 儒敎社會의 선비 精神의 뿌리를 이르킨 人物로 평가된다. 文章과 詩에 자신만만 했던 하도의 李모 선비가 이곳을 찾았다가 실력을 겨루기도 전에 흙투성이 일꾼들이 시를 짓는것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 이곳에서 은거하며 淸白한 姿勢를 孤苦히 지키면서 일생을 살았다.

金係行은 太師公 金宣平의 10세손으로 本貫은 安東이며 자는 取斯 號는 寶白堂 諡號는 定獻이다. 1431년 (세종13년) 풍산 拂頂村에서 比安현감을 지내신 三近의 둘쩨 아들로 태어나셔서1517년(중종12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15세에 東學에서 공부하셨으며 17세에 (세종29, 1447년) 에 進士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 金 宗 直과 交遊하며 周易과 近思錄등을 講論 하며 學文을 成熟시킨다. 1462년 보백당선생 32세가 되던해 성주향교 교수로 재직학고 있을때의 일이다. 그때 國師로 있던 長姪 學祖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다. 고을의 수령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거동하실 필요는 없다" 며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를 듣고도 가지않는 보백당은 "공무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 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薦擧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 하겠느냐"며 물리첬다고 한다.

1480년(성종11년) 보백당 50세에 式年 文科에 及第하여 司憲府 監察, 고령현감, 弘文館應敎, 司諫院 正言등을 거치며 直言을 서슴치 않았다가 權臣들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4년 뒤 六曹의 官職을 거처 弘文館 副修撰, 大司諫 , 大司成등 三司의 요직과 弘文館 副提學 등을 역임하며 忠諫으로 일관 해 왔으며, 연산 3년 戚臣들의 暴政을 諫하다 시정 되지 않아 낙향하시어 豊山 提에 조그마한 정사를 짓고 扁額을 寶白堂이라 하고 후진양성에 정성을 다 하셨으며 보백당이라는 호는 평소 이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선생꼐서는 평소 청념과 충간으로 연산군의 폭정과 척신들의 잘못을 시정코자 노력해 오셨으며 畢齊 선생과 교유 하신것 등으로 士禍에 연루되어 수차례에 걸처 옥고를 치르시기도 하였다.

1501년(보백당 71세)에 묵계리 별저 황학산 기슭 송암동에 "말년에 쉬어 지낸다는 " 는 뜻으로 晩休亭을 짓고 自適하며 後進 養成에 힘썼다.
만휴정 앞쪽에는 높이 20여 미터가 되는 송암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상부에는 넓다란 바위가 있고 정자 맞은편 바위에는 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글씨가 새겨저 있다. 보백당 76세때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전해 듣고 "10년이나 섬겼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게느냐" 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자질들에게 "청백을 가법으로 여기고 공근을 대대로 지켜가며 부모에 효도 하고 형제끼리 우애를 지켜 화목하라"(家傳淸白世守恭謹孝友敦睦)" 교만하거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명을 훼손하거나 실추시키는 일을 하지 말며 상제는 오직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勿以驕恣 薄行 墜毁家聲 喪祭惟在誠敬 勿務爲豊侈)고 하시고 유훈으로 "우리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고 하셨으니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 이를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보백당 사후 170년이 지난 1687년에 지방사림들의 공의로 선생의 청백정신과 충절의 行蹟을 顯彰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1706년 溪書院을 創建하고 朝鮮初 (태종-세종)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淸白吏로 錄選되신 凝溪 玉 沽 선생과 함께 재향되었으며 1870년 (고종7년) 서원 철폐령으로 毁撤 되었다가 1907년 復設令을 받고 1925년 講堂만 復元하여 오다가 1988년 5월 復元을 마무리하고 매년 陰 8월 5일 享祀를 지내고 있다, 1859년 (철종10년) 조정에서는 諡號를 定獻公이라하고 贈職으로 吏曹判書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不典의 勅命을 받고 不遷位를 모시고 있다.

평소의 성품과 같이 유물로는 교지 506점 등과 실기등이 있으며 19대 孫이신 金胄顯(전 경상북도 교육감) 씨는 선조의 청백한 삶과 충절의 정신을 후세에 널리 顯彰하고 이시대 公職者들이 본받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후손들의 조그마한 성금으로 ' 寶白堂文化學財團을" 설립하고 매년 12월에 청백리 공무원과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320여명 에게 150백만원을 지급 하였다. 묵계서원은 이곳 종택과 함께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1980.6.7.)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