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의 훈계자손가 訓戒子孫歌 중에서>   

안동군 풍산읍 소산리 안동김씨 입향조는 세종때 비안(지금의성)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 9世)으로 전한다. 삼근(三近)의 두 아들은 계권(係權)과 보백당 계행(係行10世)이다. 그의 자부(子婦:계권의婦) 권씨가 다섯아들을 데리고 시미에 낙향했는데 장남은 승려가 되어 세조때 국사(國師)가 된 고승 학조대사이다. 다섯 아들은 학조(學祖)-영전(永銓) -영구(永勾)-영추(永錘)-영수(永銖)이다. 그 5형제중 막내 수 영수(永銖)가 세아들을 두었다. 세아들의 이름은 영(英 호三塘)-번( )-구( )이다. 그 중 번( )의 손자가 극효이며 극효의 아들이 상용(尙容)-상헌(尙憲). 김번의 후예인 장동파가 서울에 옮겨 세도를 구가하는 동안 큰집인 삼당(三塘)의 후예들이 작은 집의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뼈대있는 가문의 전통을 이으며 소산(素山)을 지켰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많은 왕족과 사녀(士女)들이 피난가 있던 강화성을 지키게끔 특명을 받은 이는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어찌나 탐욕하고 못됐던지 김포-통진에 있는 나라 곡식을 피난민 구제라는 명목으로 실어와 놓고 그 곡식을 먹어본 사람은 그의 친지이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한다. 병비(兵備)는커녕 강화 대안에 적병이 몰려았다는 소식을 듣기가 바쁘게 자기가족과 치부한 가산만을 싣고 야음에 도망쳐 버린자다. 단 한번의 접전도 없이 입성한 적병들은 방화-노략질로 강화섬을 쑥밭으로 만들고 도민들을 굴비처럼 역어 참살했다. [갓난 아기가 눈위에 기어다니다가 혹은 죽어가기도 하고 살아서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기도 했다]고 당시 기록에 적혀있다.

강화섬의 개펄에는 지금도 불그레한 펄풀이 피는데 [경징이 풀]이라 부른다 한다. 수 많은 사녀들이 펄밭에서 집단으로 죽음을 당하면서 오랑캐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경징아!! 경징아!!] 도망친 김경징을 원망하고 피를 흘렸으며 그 피에서 피어난 원한의 풀이라하여 경징이 풀이라 부른다 했다. 당시 강화에는 김경징이와 너무나 대조되는 다른 한분이 계셨다. 남한산성에서 끝내 척화(斥和: 화해를 거절함)를 했던 김상헌의 형님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다. 그는 원임(原任) 대신으로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피난해와 있었다. 호병(胡兵:오랑캐)이 강화성 남문 앞에 밀어닥치고 성안은 아비규환으로 들떠 있을 때 일이었다. 선원은 대신의 정장을 하고 남문의 다락위에 올라갔다. 그 다락위에는 김경징이 도망치는 바람에 한번도  터뜨려보지 못했던 화약궤가 쌓여있었다. 그는 그 화약궤에 올라앉아 하인에게 [오늘따라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를 피우고 싶다. 잉걸불을 가져오라] 불을 가자다 바치자 열세살인 손자를 끌어안고 화약궤에 불을 붙였다. 피난가시라고 울부짖어대던 문아래 사람들을 피신시킨 다음 폭사를 했던 것이다. 그는 다락에 올라오기전에 입었던 옷을 벗어 나의 무덤으로 삼으라고 하인에게 주고 올랐던 것이다.

경징이와 대조되어 선원이 역사에 보다 굵직하고 뚜렷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경징이는 그 때 그 비극을 끝으로 죽었어야 했다. 한데도 그 후의 국난이 있을때마다 얼마나 많은 경징이가 탄생해 왔던가 ! 도망치는 경징이를 보고 [내가 이칼로 너를 만 토막내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고 말했다던 선원(仙源).  그 김상헌의 뜻을 여염에 널리 펴기위해 그의 충정을 적은 한글 고서 {선원강도록(仙源江都錄}이 발견되었다길래 선원주의(仙源主義)의 뜻을 오늘에 되새겨 본 것이다.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에서>   

1637년 정월 적이 강화에 입성하자 선원선생은 남문에 올라 안쪽에 화약궤를 쌓아놓고 좌정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는 모두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서손 수전과 종자 한분이 끝내 물러가지 않았고, 별좌, 권순장 생원 김익겸이 함께 죽겠다고 애원하므로 할 수 없이 묵인하고 선원은 평소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갑자기 담뱃대를 가져오라고 하여 불을 당겨 화약궤에 불을 당겨 화약궤에 부치니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누각은 산산히 공중으로 날아가 간곳이 없고 문루에 있던 사람은 자취도 찾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앞서서 계하에 있던 사람이 상용선생에게 "배를 마련해 두어 급할 때 대비하십시오"하고 권했으나 그는 "전하께서 적에게 포위당해 계시어 안후를 알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께서 모두 여기 계시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죽을 뿐이요. 어찌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요" 하고 응하지 않아 그 뒤에는 아무도 감히 권하지 못했다. 상용선생은 위인이 성실 순후하고 겸손 신중하였으며 겉과 속마음이 한결같았고 덕이 높은 군자로 알려져 있다.

<강화군청 홈페이지참고 http://www.ganghwa.incheon.kr>  

김상용 1561-1637(명종 16-인조 15)
- <서윤공파, 문충공파 - 15세>
선조중기의 문신 자 경택, 호 선원·풍계, 시호 문충
1582년(선조15) 진사가 되고 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었으며 상신 정철, 판서 김찬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좌랑 응교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98년(선조 31)에 승지가 되었고 이해 겨울에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을 거쳐 정주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였고 광해군 때에도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후 집권당인 서인의 한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예조·이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27년(인조5년) 정묘호란때에는 유도대장으로 있었다. 30년 기로소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32년(인조10) 우의정으로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마침내 허락 받았다. 36년 병자호란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고 그 서체는 이왕체(왕희지와 왕헌지)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를 겸했으며 시조(時調)로 유고에 오륜가 5편, 훈계자손가 9편 등이 있고 그밖에 가곡원류 등에 여러편이 실려있다. 강화의 충렬사 양주의 석실서원, 상주의 서산서원, 안변의 옥동서원, 정주의 봉명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주요저서 : 《선원유고:규장각소장》 《독례수초》 주요작품 : 《오륜가》(5편) 《훈계자손가》(9편)  글씨에 '숭인전비의 전액', '군수 장인정비의 전액' 등이 있다.

 

仙源遺稿(奎4459), 金尙容(朝鮮)著.
          2卷 2冊 木板本 29× 21cm.
          四周雙邊 半郭:18.7×16cm.
          10行 21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金尙容(1561∼1637)의 遺稿이다. 詩와 文을 上下冊으로 나누었고 序,  神道碑銘,  跋 이 있다. 金尙憲의 跋과 申翊聖의 序에서 出刊의 經緯를 大略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저자의 동생인 金尙憲이, 跋을 쓴 1639년(仁祖 17)에 遺稿를 모아 公의  두아들  光煥, 光炫이 번갈아 申翊聖에게 序를 부탁하여 1640년에 出刊한것 같다. 金尙容의  字는 景擇, 自號는 仙源·楓溪. 安東人으로 掌令 金번의 曾孫이다. 1582년(宣祖  15) 司馬에 中하고 1590년에 及第하여 檢閱을 拜했다. 兵刑佐郞, 正言, 司書,  修撰,  應敎를 歷任하여 1598년 承旨에 올랐다. 1601년에 宮闕이 너무 엄해 輿論을 上疏할 수  없는 것을 大諫하여 왕의 비위를 상케하여 定州牧使에 左遷되고 3년후에 官을 물러났다.  光海朝에 都承旨, 大司憲을 거쳐 刑曹判書를 拜했다. 1632년(仁祖 10)  右議政을  拜하였다. 丙子胡亂에 廟舍를 따라 江都에 들어갔다가 이곳에 위험이 닥치자, 초門에  火藥을 쌓고 친히 점화하여 屍體를 남기지 않고 殉國하였다. 爲人이  惇厚謙愼하고,  容貌和粹하여 君子의 풍도가 있었다. 山水를 좋아하여 晩年 楓磎에 齋를 지었다. 書는  各體를 잘 하였다. 동생 尙憲과 함께 文章은 節義로써 著名하다. 遺稿는 大部分이  詩로  散文은 極少하다. 卷首에 申翊聖의 序, 金尙憲의 碑銘(幷序)과  祭式遺訓이  있고,  卷末에 仙源遺稿補遺, 金尙憲의 跋이 있다. 上卷:五言絶句(新昌院樓上 이하 22수),  七言絶句(次趙生韻四首 이하 240首), 五言律詩(次趙生韻三首 이하  97首),  五言排律(原州叔主挽 이하 4首). 下卷:七言長律(黔毛浦 이하 166首), 五言古詩(梨津 이하 28首),  七言古詩(相思曲 이하 1首), 雜著(慶尙道觀察使尹承勳敎書,  葬坤兄哀詞,  蒼龍校銘,  烏竹杖銘, 座右銘, 宗廟祈雨祭文二首, 南郊賜祭戰亡將士祭文, 祭女嬪南司禦文,  仙源居士自述墓銘, 疏箚 7 등). 仙源遺稿補遺는 記夢說이다. 詩 607首는 遺稿의 8割 以上을  占하며  七言絶句, 七言長律, 五言律詩가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