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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성종11년) 보백당 50세에 式年 文科에 及第하여 司憲府 監察, 고령현감, 弘文館應敎, 司諫院 正言등을 거치며 直言을 서슴치 않았다가 權臣들의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4년 뒤 六曹의 官職을 거처 弘文館 副修撰, 大司諫 , 大司成등 三司의 요직과 弘文館 副提學 등을 역임하며 忠諫으로 일관 해 왔으며, 연산 3년 戚臣들의 暴政을 諫하다 시정 되지 않아 낙향하시어 豊山 提에 조그마한 정사를 짓고 扁額을 寶白堂이라 하고 후진양성에 정성을 다 하셨으며 보백당이라는 호는 평소 이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선생꼐서는 평소 청념과 충간으로 연산군의 폭정과 척신들의 잘못을 시정코자 노력해 오셨으며 畢齊 선생과 교유 하신것 등으로 士禍에 연루되어 수차례에 걸처 옥고를 치르시기도 하였다.
1501년(보백당 71세)에 묵계리 별저 황학산 기슭 송암동에 "말년에 쉬어 지낸다는 " 는 뜻으로 晩休亭을 짓고 自適하며 後進 養成에 힘썼다. 만휴정 앞쪽에는 높이 20여 미터가 되는 송암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상부에는 넓다란 바위가 있고 정자 맞은편 바위에는 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글씨가 새겨저 있다. 보백당 76세때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전해 듣고 "10년이나 섬겼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게느냐" 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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