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 풍산들은 눈이 멀리 하회마을 가는 길목에 넓게 펼쳐져 있다.
낙동강이 안동에 가장 크고 넓은 들을 만들었다. 약 10여리의 벌판 이름 그대로 풍요로운 곳 그 풍요로움을 바라보는 아늑한 마을 소산리(素山里) , 『 시미-흰산』라는 우리말 이름은 정겹다.

바로 이 소산리(素山里) 가 우리 안동김씨의 텃밭이다.
입향조는 세종때 비안(지금의성)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 9世)으로 전한다. 삼근(三近)의 두 아들은 계권(係權)과 보백당 계행(係行10世)이다. 그의 자부(子婦:계권의婦) 권씨가 다섯아들을 데리고 시미에 낙향했는데 장남은 승려가 되어 세조때 국사(國師)가 된 고승 학조대사이다. 다섯 아들은 학조(學祖)-영전(永銓) -영구(永勾)-영추(永錘)-영수(永銖)이다. 그 5형제중 막내 수 영수(永銖)가 세아들을 두었다. 세아들의 이름은 영(瑛 호三塘)-번(王+番)-순(珣)이다. 그 중 번(王+番)의 손자가 극효이며 극효의 아들이 상용(尙容)-상헌(尙憲). 김번의 후예인 장동파가 서울에 옮겨 세도를 구가하는 동안 큰집인 삼당(三塘)의 후예들이 작은 집의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뼈대있는 가문의 전통을 이으며 소산(素山)을 지켰다.

마을 한 복판에는 김번(金 王+番)이 지어 증손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에서 돌아와 만년을 보냈다는 청원루(淸遠樓)등 장동(壯洞)집의 유적인 남아 안동김의 본바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우람한 위세의 처마가 아직도 서슬이 날카롭다. 본래는 41칸이었으나 현재 7칸이 남아있다. 김상헌은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적인 강화(降話 항복)하는 것을 극력 반대한 척화주의(斥和)의 핵심인물이었다. 인조는 겨울 남한산성앞  삼전도 벌판에 무릅꿇고 세 번이나 머리가 땅에 닿는 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리도록 절을 하는 삼배고두래의 굴욕을 격었다. 청의 사신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이마를 땅에 박는 과정에서 인조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다고 전해진다. 김상헌은 단식을 하며 반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현판을 [淸遠樓 청을 멀리한다 ]로 지었다.   

 


안동김씨 소산(素山) 입향조인 삼근(三近)의 맏손자 영전(永銓1439-1522)이 88세되는 노모를 즐겁게 해 드리고자 1496년에 건립한 것으로 1947년 중건으로 오늘에 이른다. 삼구정(三龜停)이란 이름은 십장생 중의 개 하나인 거북이와 같이 생긴 세개의 바위가 정자 뜰에 있어서 붙여진 것인데, 노모의 장수(長壽)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