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神道碑의 번역문-안동화수회 [안동김씨의 뿌리]에서 참고>

지난 숙종 을해(乙亥) 시월(十月)에 우리 太師府君의 묘단(墓壇)이 비로소 이루어지니 지금 이백이십여년에 아직 현각(顯刻)이 없음은 대체 궐전(闕典) 때문이다. 後孫 瑞圭 壇所에 전성(展省)하고 합종(闔宗)에게 창언(昌言)하기를 부군(府君)의 풍공성열(豊功盛烈)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비(碑)가 없어도 전할것이나 선덕(先德)을 표게(表揭)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일층 공경하고 길이 잊지 않게 함은 비 뿐이니 비를 어찌 아니 세우겠는가.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드디어 돈을 모아 돌을 캐고 영한()으로 하여금 기록케 하니 학문이 천박하여 어찌 감히 승당(承當)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문간공(文簡公)의 지은 기문(記文)이 섬실곡당(纖悉曲當)하여 한 말도 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삼가 써서 序를 하니 始祖太師金公의 휘(諱)는 선평(宣平)이니 新羅末에 고창성주(城主)가 되었다. 고려태조가 견훤을 토벌함에 공이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더불어 군(郡)으로서 귀부(歸附)하니 태조가 드디어 병산(倂山-안동북쪽10여리)의 승첩(勝捷)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義聲이 더욱 떨치었으며 마침내 견훤을 멸하게 됨은 公 등 三人의 힘이다. 功을 봉함에 으뜸으로 公을 大匡에 拜하고 權幸과 張吉로 大相을 삼으며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의 號를 주고 太師의 벼슬을 시키며 고창을 안동부(安東附)로 승격(昇格)하였다. 公이 이미 卒함에 安東의 百姓이 그 功德을 생각하여 부사(附司)에 묘(廟)를 세우고 權 張 二公과 함께 향사(享祀)하여 지금껏 이어 오니 사실은 퇴계 이문순공이 지은 기문(記文)에 갖추어 있다. 대체 公이 고창(古昌)을 지킬 때에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역훤(逆萱)이 군부(郡附)를 장학(將虐)함에 의에 있어 반드시 보복하여야 될 것이나 공이 고독(孤獨) 한 조그만 성(城)으로 흉봉(凶鋒)의 충돌(衝突)을 당하게 됨으로 능히 자립하여 일을 할 수 없으니 의사를 결정하고 고려와 합세하여 함께 수적()을 멸하고 스스로 그 의를 폄은 거의 장사도(張司徒)가 한(漢)을 도와 진초(秦楚)를 멸하고 한의 원수를 갚음과 같으니 그 유풍이 미치는 바에 백성이 의에 용감하여 야별초 및 홍건적의 난에 모두 능히 사력을 내어 군상(君上)을 호위하고 드디어 미속(美俗)을 이루니 이 더욱 공(公)이 한 지방에 덕(德)을 끼치어 백세(百世)에 묘식(廟食)함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공(公)의 묘택(墓宅)이 오래되어 그 곳을 잃었으나 승람(勝覽)에 부서(府西안동의 서쪽) 고태장리(古台莊里)에 있다 기록되었으므로 증조 문정공부군이 일찍이 여러 종인(宗人)을거느리고 두루 다니며 찾고 글을 지어 천등산에 빌기까지 하여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더라. 부서(附西) 십여리에  태장봉이 있으니 곧 천등산의 좌록(左麓)이다. 그 아래 당동(堂洞)이 있는데 촌인(村人)들이 모두 태사묘동(太師墓洞)이라 함으로 숭정정병인년에 종인(宗人) 김인 등이 그 이름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 찾음에 신성(申性)이 누세(累世)를 장사지내고 그 가운데 한 무덤 뒤 십여보에 고총(古塚)같은 거이 있어 평평하게 되었으나 계체가 둘려 있고 윤곽을 분별할만한 하니 대체 큰 무덤같고 그 형국과 안대(案對)가 또 고적(古蹟) 및 향부노(鄕父老)의 기록한 바와 팔구는 맞으며 또 듣건데 신성(申性)이 장사할 때 두 고총(古)을 다른 곳에 묻고 체하에서 또 지석(誌石) 같은 것이 나와 감추었다 하니 더욱 의심스럽다. 이에 여러 종인(宗人)이 그 일을 관(官)에 송(訟)함에 관에서 체문(逮問)하고 그 발총(發塚)하던 상황을 알아 곧 파보았으나 돌을 찾지 못하여 증빙(證憑)하지 못하고 관에서도 또한 그 일을 마무리하지 않아 그만 두고 말았다. 어떻게 할 수 없어 의논하기를 우리 태사께서 공업(功業)이 나려(羅麗) 때에 있으시어 이름은 역사에 드러나고 공덕(公德)은 향방(鄕方)에 베풀어졌으므로 자손이 음덕(陰德)을 받아 번성하나 묘소(墓所) 있는 곳을 몰라 여러 백년(百年)을 지나도록 향사(享祀)도 못하고 지금 다행이 진조(眞兆)를 얻을 번 하여으나 간인(奸人)이 도점(盜占)하여 영역(塋域)을 훼상(毁傷)하고 비판(碑版)이 민멸(泯滅)하여 마침내 그 사실을 증빙하지 못한 채 봉축(封築)하니 통심절수(痛心疾首)하여 어떻게 추원(追遠)하는 효사(孝思)를 위로할 것인가. 옛날 제사에 무덤을 바라보고 단(壇)을 만든 일이 있으니 지금 만약 본떠서 만들어 후세의 사람으로 하여금 체백(體魄)이 계신곳을 짐작하고 밭 갈거나 나무하지 못하게 하면 예(禮)에 혹 맞을 것이라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드디어 모년모월 모갑자에 동중(洞中)에 터를 닦고 단(壇)을 만들어 제사 지내니 종인(宗人)이 모두 모이고 이로부터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함에 상총의(上塚儀)와 같이하고 영구히 준행할 것을 기약하며 또 단측(壇側)에 입비(立碑)하고 그 일을 새기어 후세에 깊이 전할 것을 꾀함에 백부께서 창협(昌協)에게 그 본말을 갖추어 적으라 명(命)하시다 하시었다.

子孫에 이르러는 追錄하지 않을 수 없으나 부군(府君)이하에 혹 몇대를 잃었다 하고 혹, 처름부터 잃음이 없다 하니 의심 있는 것을 의심대로 전함은 신중(愼重)하는 것이다. 족보에 기록된 여러 파가 각기 그 파조(派祖)로 一世를 삼아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 혹 삼심여세도 되고 혹 이십여세는 되는데 명공(名公)석보(碩輔)가 많고 충의효제(忠義孝悌)와 경술문장(經術文章)이 사람의 귀와 눈에 번쩍이며 가지와 잎이 번성하여 한 나라안에 가득하여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니 오로지 부군(府君)께서 몸소 수고하시고 자손에게 음덕(陰德)을 끼치시어 길이 번성하게 하심이니 아 장하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신라 말기에 公이 고창을 지키시니 국운이 기울어 적세(賊勢)가 뻗치도다. 의(義)로 고려를 도움에 무(武)로써 하도다. 병산(甁山:안동북쪽10리-와룡)에서 대첩(大捷)하여 생령(生靈 백성)이 편하도다. 공(功)을 기리어 벼슬을 주니 오직 보답(報答)이로다. 부사(府司 안동부의 관아)에 묘사(廟祀)하여 길이 잇도다.  천등산(지금의 봉정사 뒷산) 좌록(左麓좌측기슭)은 체백(體魄)을 모신곳이다. 간인(奸人)이 도점(盜占0하여 오래 묘역(墓域)을 잃도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궐(闕)하도다.  많은 자손들이 통한(痛恨)의 눈물을 짓다. 뜻을 모아 단(壇)을 만들고 해 마다 향사(享祀)하도다. 인정(人情)에도 맞거니와 신도(神道)를 위로하다. 이에 큰 돌을 깍아 단(壇) 앞에 세우도다. 문간공(文簡公)이 지으신 글을 새겨 길이 전하다. <끝>

  

     묘단(墓壇)-묘 앞의 단을 말하나 여기서는 墓를 대신하여 쌓은 壇을 말함
     현각(顯刻)-새겨서 나타나는 일 즉 비석을 말함
     궐전(闕典)-규정이나 문서가 부족
     전성(展省)-성묘
     합종(闔宗)-모든 종친. 합(闔)은 전부의 뜻
     표게(表揭)-표시하여 나타냄
     영한()-27세 손 비서승 벼슬을 지냄
     승당(承當)-받들어 감당함
     문간공(文簡公)-18세손. 墓壇記를 쓴 창협(昌協)을 가리킴
     섬실곡당(纖悉曲當)-섬세하고 자세함
     귀부(歸附)-충심으로 따라 붙음
     승첩(勝捷)-싸움에서 이기다
     역훤(逆萱)-반역한 견훤을 말함
     장학(將虐)-잔인하게 학대함
     흉봉(凶鋒)-흉악한 창이나 칼 끝
     수적()-원수
     묘식(廟食)-죽어서 종묘나 사당의 제사를 받음
     승람(勝覽)-동국여지승람
     종인(宗人)-종가의 사람
     좌록(左麓)-왼쪽 산 기슭
     계체-섬돌 또는 계단
     안대(案對)-대상물을 생각해 봄
     지석(誌石)-뒷날 무덤의 주인을 십게 찾을 수 있도록 죽은 사람의 이름, 무덤방향등을 적어 묻은 판석
     진조(眞兆)-참된 징조
     영역(塋域)-묘소
     입언자(立言者)-후세에 전할 말을 남기는자
     채록(採錄)-찾아서 기록함
     명공(名公)-존귀한 인물
     석보(碩輔)-현명하고 선량한 신하
     충의효제(忠義孝悌)-충성스러운 신하와 효도와 우애가 깊은 인물
     경술문장(經術文章)-경학을 연구하고 문장에 뛰어난 사람
     궐(闕)-빠지다. 즉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