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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의
아우 상헌(尙憲15세)은
백부(伯父)인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정시문과(庭試文科)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궤장을하사(下賜)받았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느날 조회 때 장약관(掌藥官)
박시량(朴時亮)이
나라에서 금한 대분투(大分套
: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겉에 신는
덧신)를 신었으며
부자(富者)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집을
짓는데 부연(附椽
: 장연 끝에 덧 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을
하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상헌이 옥에
가두자 시량의 처자가
영의정(領議政) 오윤겸(吳允謙)에게
가서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였더니
윤겸이 말하기를
"비록
내 아들이 법을 범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하며
마음으로 매우 불쌍하게
여겼지마는 끝내
구해주지 못했으며,
한 왕족(王族)의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짓는데 나라에서
금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가 상헌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하였다고
한다. 상용(尙容)의
아들 광현(光炫)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과거를
단념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연원도
찰방(連源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아버지
상용(尙容)의 유지를
받들어 청(淸)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한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尙憲)의
손자(孫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효종(孝宗)
때 생원(生員)으로
형조(刑曹)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낸 수증(壽增)은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아우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춘천(春川)의
곡운산(谷雲山)에
은거(隱居)했으며,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한 수흥(壽興)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1660년(현종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현종실록(顯宗實錄)]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壽恒)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
창집(昌緝 :
직장을 역임)·창립(昌立
: 사부를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六昌)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昌集)의
아들 제겸(濟謙)이
숙부(叔父) 창흡(昌翕)에게
수학하고 숙종말(肅宗末)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손자 이소(履素)가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昌集)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 : 순원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져서 철종(哲宗)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文章)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명순(明淳 : 창집의
현손)의 아들 중
홍근(弘根)은 헌종(憲宗)
때 공조(工曹)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순조(純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흥근(興根)은
홍근(弘根)의 아우로
헌종(憲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철종(哲宗)
때는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는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인
조근(祖根)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철종(哲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左贊成)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철종(哲宗)의
비(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아버지 문근(汶根
: 인순의 아들로
이순에게 출계)은
돈령부사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몸이
비대하여 <포물대원군(包物大院君)>으로
별칭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창협(昌協)의 인맥으로는
그의 손자
원행(元行)이 왕세손(王世孫)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英祖)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疏)를
올려 사임하고
누차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한
후 학문에 전력했다.
특히 그는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의
2대 주류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이간(李柬)의 낙론을
지지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학설(學說)을 주장했다.
그의 아들 이안(履安)도
아버지의 학문(學問)을
이어받아 학행(學行)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었고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로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앞장섰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인순(麟淳)의
아들 수근(洙根)은
헌종(憲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고 병조(兵曹)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으며, 수근(洙根)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高宗) 때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했다. 병국(炳國)은
철종(哲宗) 때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고종(高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이 뛰어나서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여한 10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창업(昌業)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신겸(信謙)과
윤겸(允謙)형제가
문장과 그림으로
유명했고, 양행(亮行
: 신겸의 아들)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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