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02 13:34:16 조회 : 3575         
안동 김·권·장씨 만든 이 알고 보니 고려 태조 이름 : 김흥년
#고려의 흔적
역사책부터 펼친다. 그러니까 신라의 명이 쇠
해 천하를 왕건과 견훤이 호령하던 시절, 둘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인다. 역사에서 병산전
투라 이르는 곳, 그 병산이 지금의 안동 지역이
다. 그 싸움에서 왕건이 크게 이겨 기세가 등등
했던 견훤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그 전투에
서 지금의 차전놀이가 유래했다.
왕건의 승리엔 안동 토착세력의 역할이 컸다.
김선평·권행·장정필, 이 세 명이 힘을 합쳐 왕건
을 돕는다. 훗날 고려 태조에 오른 왕건이 그들을
공신으로 인정해 세 명에게 성씨를 부여한다. 하
여 그들은 각각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
가문의 시조가 된다. 안동 양반의 중앙 권력 진
출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 시조 셋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 태사묘다. 현재 세 가문에서 돌아
가면서 사당을 관리하고, 해설사가 상주한다.
태사묘 안에 보물각이 있다. 이 안에는 혁대·
수저 등 공민왕 유물이 모셔져 있다. 공민왕 유
물이 왜 여기에 있을까. 다시 역사책을 펼치자.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란을 온다. 그가 수도 개경을 비운 기간은 약
70일, 그중에서 30여 일을 안동에서 지냈다.
그때 안동 사람들이 공민왕을 깍듯이 모셨
단다. 대표적인 일화가 인덕왕후, 즉 노국공주
와 얽힌 것이다. 피란 나온 왕후가 걸어서 물을
건너는 모습을 본 안동 사람들이 자신의 등을
밟고 왕후가 물을 건너게끔 했다. 그 일이 훗날
놀이로 변형됐고 그 놀이의 이름이 놋다리 밟
기다. 그냥 다리가 아니라 놋다리인 까닭이 예
서 밝혀진다.
공민왕은 안동의 호의를 잊지 못해 안동을
‘안동웅부(雄府)’라 명하고 친히 글씨를 남긴
다. 여기서 ‘웅’자가 중요하다. 대웅전의 ‘웅’이
바로 이 ‘수컷 웅’인데, 지극히 큰 것을 상징하
는 단어다. 불교 국가 고려의 왕이 ‘웅’을 하사
한 건 당시로선 최고의 찬사였던 셈이다. 공민
왕의 친필 글씨가 안동시청 현관에 걸려 있다.
#전탑의 미스터리
유교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동엔 의외
로 뜻깊은 불교 유적이 꽤 많다. 개중에 전탑이
있다. 돌을 깎아 쌓은 탑이 석탑이라면, 구운
벽돌을 쌓아 올린 게 전탑이다. 현재 국내에 5
개가 있는데 3개가 안동에 있다.
불교에서 탑의 원형이 전탑이다. 한국 탑의 특
징이 석탑이고 일본 탑의 특징이 목탑이면, 중국
탑의 특징이 전탑이다. 벽돌을 쌓아올린 건 벽돌
안에 사리 등 귀한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서다. 석
가모니의 사리가 바로 이런 식으로 모셔졌다.
안동의 대표적인 전탑은, 신세동 7층 전탑과
동부동 5층 전탑이다. 앞에 것이 국보이고 뒤
에 것이 보물이다. 신세동 7층 전탑은 고성 이
씨 종가 임청각 옆에 서 있는데 높이가 16.8m
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신세동 전탑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옛날 안동에 솜씨 좋은
목수가 살고 있었는데, 그 재주를 시기한 도깨
비가 내기를 건다. 도깨비는 하룻밤에 탑을 쌓
고 목수는 하룻밤에 99칸 집을 짓자고 제안한
것이다. 결과는 물론 목수의 승리였다. 그 99칸
집이 탑 옆에 있는 임청각이다. 전설에서 짐작
되는 바는 숭유억불 사상이다. 사람은 집을 짓
고 도깨비가 탑을 쌓았다는 설정에서 유교를
높이 사고 불교를 깎아내리려는 의도 말이다.
안동 전탑의 역사는 미스터리다. 유독 안동
에 전탑이 많은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다. 누가
언제 세웠는지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무엇
보다 안동 전탑은 물가에 임한다. 안동역 주차
장 옆에 있는 동부동 전탑이나 임청각 옆 신세
동 전탑 모두 낙동강가에 위태로이 놓여 있다.
불교 유적이니 산 속에 있어야 마땅한데 왜 이
전탑은 산을 버리고 강으로 나왔을까. 추측만
난무할 따름이다.
#철가루 기와집 그리고 선비 정신
안동은 종가의 고향이다. 지금도 안동 곳곳에
는 99칸짜리 한옥이나 그림 같은 풍경의 정자
가 널브러져 있다. 서애 유성룡의 가옥이었던
옥연정사, 농암 이현보의 거처였던 농암종택
과 함께 안동을 대표하는 종가로 고성 이씨 종
가 임청각이 있다. 보물 182호다.
임청각은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명당에 들어
앉은 99칸 한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축
소되고 왜곡된 모습이다. 규모는 70칸 정도로
확 줄었고 낙동강과 임청각을 중앙선 철로가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임청각 기와엔 늘 철가
루가 쌓여 있다.
여기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일본이
국권을 강탈하자 당시 임청각의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이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온 재
산을 싸들고 간도로 떠난다. 그리고 중국 땅에
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오
른다. 석주 후손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해 고성
이씨 집안에서만 독립투사 9명이 배출된다. 이
를 괘씸히 여긴 일제가 보복을 단행한다. 중앙
선 철로가 임청각 마당을 가로지르도록 한 것
이다. 하여 중앙선은 안동에 들어와서 직진하
지 못하고 10㎞를 돌아서 간다.
다시 전설 하나. 임청각 안에 태실(胎室), 그러
니까 아기를 낳는 방이 있다. 방 앞에 우물이 있
어 ‘우물방’으로도 불리는데 그 방에서 정승 3명
이 나온다는 전설이 고성 이씨 사이에서 전해 내
려온다. 하여 고성 이씨 직계와 방계 후손 및 출
가한 딸까지 그 방에서 출산하기 위해 줄을 섰다.
흥미로운 건 실제로 그 방에서 정승이 나왔는지
여부다. 따져 보니 석주와 우의정을 지낸 류후조
(임청각 종가 25세 이의수의 외손자)가 그 방에서
태어났다. 나머지 한 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답사 전에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www.tccmuseum.
go.kr) 방문을 권한다. 명색이 박물
관이지만 딱히 전시품이랄 게 없다. 문화재도
한 점 보이지 않는다. 모든 콘텐트를 디지털 방
식으로 재현해 놓아서다. 한데 그 실현 정도가
놀랍다. 전국 어디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수준
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입장과 함께 이름
과 e-메일 주소 등을 등록하면 ID카드를 받는
다. ID카드를 장판각 목판체험기에 갖다 대고
목판을 찍으면 자신이 찍은 문양이 e-메일로
자동 배달된다. 054-840-6510. 입장료 3000원.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왼쪽이 웅부공원이
다. 옛 안동 동헌이 있던 자리다. 동헌 왼쪽에
800년 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부신
목(府神木), 즉 관아를 지켜주는 신 나무다. 안
동부사가 부임하면 이 나무에 먼저 신고를 했
고 해마다 정월 열나흘 날 자정 나무 앞에서
제를 올렸다.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시장이 부사 역할을 담당한다.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 안동엔 은어가 떼를
지어 올라왔다. 남해안에서 안동까지 낙동강
을 거슬러 올랐기에 안동 은어는 힘이 좋기로
이름이 났다. 하여 은어는 안동의 주요 진상품
이었다. 하지만 한양까지 갖고 가는 게 문제였
다. 그래서 설치한 게 석빙고다. 안동 석빙고는
국내에서 가장 큰 석빙고다.
경북 안동은 한국을 대표하는 유교의 고장이다. 안동 권씨, 안동 김씨, 풍산 유씨, 진
보 이씨, 고성 이씨, 안동 장씨 등 내로라하는 권문세가가 안동을 기반으로 한다. ‘조
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영남 인재의 절반은 안
동에서 나왔다’는 말 또한 틀리지 않는다. 하여 안동은 조선시대 권력과 사상의 태자리였다. 이 대
목에서 의문이 든다. 안동 선비가 조선 팔도를 거머쥐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오로지 퇴계 이황의
후광 덕분일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안동은 고려 시대부터 권력의 복판
에 들어가 있었다. 그때부터 안동은 국가 인력의 보고였으며 정신 문화의 수도였다. 그 생생한 흔
적을 안동시 복판에서 만나고 돌아왔다. 안동엔 하회마을과 도산서원만 있는 게 아니다.
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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