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1-04 17:48:17 조회 : 2332         
천하의 명당(12대 번) 이름 : 김우규

윤종일 교수의『남양주 역사기행(1)』- "와부 석실과 안동 김씨 풍수 이야기"

윤종일(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 우리나라 팔대명당 중의 하나인 김번의 묘ⓒ김준호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 석실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팔대명당의 하나라는 ‘옥호저수형’의 명당자리가 있다. 즉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덕소 쪽으로 병입구 모양을, 정상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율석리 쪽에서 봉우리를 맺으면서 병마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병마개 중심에 안동 김씨 김번(金?)의 묘소가 있다. 이곳은 또한 왕릉 후보지가 되었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가 워낙 강해서 능을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부 석실에는 흥미로운 풍수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인조 때의 명신 김상용?김상헌의 5대조 할아버지인 김번이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셨다. 그의 아우는 당시 양산 통도사에 머물며 수도를 하던 백운거사였는데 형님의 죽음을 전해 듣고 천리 길을 단숨에 달려왔다. 그러나 백운거사가 석실의 형님 집에 왔을 때는 이미 상을 모두 치른 후였고, 형수는 어린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그 방앗간에서 삯방아를 찧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밝은 백운거사는 무심코 이 방앗간 자리가 천하의 명당정혈임을 알고는 형수에게 말했다. 

“형수님, 이곳은 비록 방앗간이지만 천하의 음택 명당으로 옥호리 병이 물이 담긴 형상의 옥호저수(玉壺貯水) 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님의 묘를 이장하시어 후손의 발복을 기원, 도모 하십시다.”



    ▲ 석실서원묘정비/취석비/송백당유허비 ⓒ 김준호

백운거사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여 그 발복이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을 고려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양택을 음택으로 쓰면 어찌 되겠는가? 방앗간을 당장 그만두어야 하는 형수로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얼마 후 형수는 시동생인 백운거사에게 자신의 지아비, 즉 백운거사의 형님의 묘지로 쓴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옛 말에 한다리가 천리라더니 백운거사는 형수를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형님의 시신을 이곳에 옮겨 묻고는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는 지금 비록 매우 가난하지만 자손이 영달하여 출세할 것이다. 앞으로 너의 자손 중에서 금관자(金貫子)?옥관자(玉貫子)가 쏟아져 나올 것이니 모두 네 아버지 묘 터의 발복임을 꿈에도 잊지 말아라”

신기하게도 백운거사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인조 이후 안동 김씨는 금관자, 옥관자의 고관대작과 문장, 충신이 수없이 나왔다. 구릉이 멈춘 방앗간 양택에 묘를 쓰고 발복을 한 경우로 흔하지 않는 사례의 하나이다. 



‘취석(醉石)’ 은 우암 송시열이 도산정사를 건립할 당시 김수증에게 준 글로, 김수증이 이것을 4년 뒤인 1672년 지금의 비석 앞면에 각자한 것이다. ‘취석(醉石)’은 원래 출전이 도연명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중국의 ≪여산기≫에 “도연명이 거처하던 율리에 큰 돌이 있는 데, 연명은 술에 취하면 항상 그 돌에 올라 잠을 잤다. 이로 인해 취석이라 이름 붙였다.”는 고사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이 글씨를 써준 데는 이유가 있다. 청음 김상헌이 청에 볼모로 붙잡혀 있을 때, 맹영광이 김상헌의 의로운 행동을 흠모하여 도연명의 채국도를 보냈으며, 이를 도연명의 진영과 함께 도산정사에 안치해 두었다. 그런데 도산정사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 ‘石室’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형상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곳에 도연명의 고사가 담긴 ‘취석(醉石)’ 두글자를 새겨두는 것도 격에 맞는 것 같다. 이에 김수증은 우암 송시열의 뜻을 헤아려 비석 앞면에 ‘취석(醉石)’을 각자하고, 뒷면에 그 유래를 써서 각자하였다. 

ⓡ 임병규/양문순

 

이 명당을 둘러싸고 친정아버지의 묘자리까지 빼앗은 풍수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안동 김씨가 와부 석실에 입향하기 전에는 이 일대의 산은 모두 남양 홍씨의 선산이었다. 그 때 남양 홍씨 가문에서 딸을 안동 김씨 가문으로 출가시켜 두 집안이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동 김씨 가문으로 출가한 홍씨는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 김번과 사별을 하였다. 이때 친정아버지가 사망하자 석실마을로 갔다. 홍씨 부인의 친정에서는 지관을 시켜 묘자리를 보고 광중(壙中)을 파두었는 데, 그 자리가 옥호저수형, 즉 옥항아리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윤종일 교수는..

- 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

- 경희대,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남양주시)

- 풍양문화연구소 소장

이 말을 들은 홍씨 부인 밤새도록 광중에 물을 퍼다
부었고 결국 친정 아버지의 시신을 안장시키지 못하
게 하였다. 3년 후 홍씨 부인은 사별한 남편 김번을
옥호저수형의 땅에 이장시켰는데 그 후로 안동 김씨
일가는 고관대작과 문장, 충신이 수없이 나왔다.
이 자리는 금관자, 옥관자가 3말씩 나오는 자리라고
한다.

 

남양주타임즈  정명현 기자  [2006-06-09]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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