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1 14:10:26 조회 : 4916         
안동김씨를 빛낸분들 이름 : 김경진

안동김씨를 빛낸 분들

I. 중등교과서에 기술된 인물과 내용

 

병자호란

후금의 태종(太宗; 재위1626∼1643)은 내몽고 지방을 정복하여 국호를청(淸)으로 고치고(1636), 황제가 된 다음, 조선에 대하여 형제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고칠 것을 요구하여 왔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스스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침입해 왔다. 인조는 가족을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서울과 강화도가 함락되고 남한산성도 포위되었다. 남한산성에서 항쟁한 45일간,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1586∼1647)과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 尙憲;1570∼1652) 등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듬해 정월에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고 청군은 물러가게 하였다.

이 때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와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이 볼모로 청에 가게 되고, 척화파 김상헌등도 잡혀가게 되었는데, 홍익한(洪翼漢;1586∼1637) ‧ 오달제(吳達濟;1609∼1637) ‧ 윤집(尹集;1606∼1637) 등 삼학사는 끝내 청에 굴복하지 않고 의로운 죽음을 당하였다.(*신석호지음 인문계 고등학교 국사 162∼163쪽)

 

세도정치

영‧정 양대 간에 탕평책을 실시하고 왕권이 강화되어 사색(四色) 당쟁은 다소 누그러졌으나, 1762년(영조38년)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후부터 시파(時派)‧벽파(辟派)라 하는 새로운 당파가 생겼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파로서 대개 남인과 일부 소론이 이에 속하고, 벽파는 영조를 충동하여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이 이에 속한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시파가 세력을 얻어 남인이 많이 등용되었으나, 정조가 죽고 순조(純祖 ; 재위 1800∼1834)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벽파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숙청하는 동시에 시파와 관계 있는 천주교를 탄압했으며, 1802년(순조2년)에 김조순(金祖淳;1765 ∼1831)의 딸을 왕비로 삼은 후부터 김조순과 그 일족이 정권을 독점하여 외척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나타나게 되었다.

순조가 죽고 그 손자 헌종(憲宗 ; 재위1834∼1849)이 즉위한 뒤, 헌종의 모후(母后)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씨가 섭정하여 한 때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았으나, 안동김씨는 김조근(金祖根)의 딸을 왕비로 삼아 풍양 조씨로부터 정권을 빼앗았으며, 헌종이 죽은 후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을 맞이하여 즉위케 하는 동시에 김문근(金汶根; 1801∼1863)의 딸을 왕비로 삼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19세기 전반 60여 년간 계속되었다.

 

풍자시인

김삿갓, 정수동 같은 풍자 시인은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어우러져 활동하기도 하였다.(*2002년 발행 교육인적자원부저작 고등학교 국사 324쪽)

 

갑신정변

임오군란(1882) 후, 조선은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고, 집권한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에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화당이 형성되어 두 세력 사이에는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개화당의 중심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왕래하면서 그들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도 개혁을 추진하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홍영식이 우정국 총판으로 임명되자, 이들은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甲申政變(1884)이라고 한다.

그들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그 내용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제도를 개혁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려는 거이었다. 그러나 개혁운동은 청군이 개입함으로써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당 인물들이 일을 너무 급하게 진행시켜 준비가 소흘했으며, 개화당의 개혁 정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이해가 깊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국사하권 74쪽)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쓰인 개화의 내용

대개 開化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온갖 일과 사물이 가장 바람직한 경지에 이름을 말함이니, 그러한 고로 개화하는 경지는 한정하기가 불능한 것이다. 인민 재력의 분수도 그 등급이 높고 낮음이 있으나, 인민의 습성과 나라의 규모를 따라서 그 차이도 역시 나오나니, 이는 개화하는 방도도 하나가 아닌 연유이어니와, 개화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하고 하지 않음에 있을 따름이다. 오륜의 행실을 돈독히 하여 사람의 도리를 안즉 이는 행실의 개화이며, 사람이 학술을 궁구하여 만물의 이치를 밝힌즉 이는 학술의 개화이며, 국가의 정치를 정대히 하여 백성이 태평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정치의 개화 이며, 법률을 공평히 하여 백성이 억울한 일이 없는 것은 법률의 개화이며, 기계의 제도를 편리케 하여 사람이 씀을 이롭게 하는 것은 기계의 개화이며, 물품의 제도를 정밀히 하여 사람의 삶을 두터이 하고, 거친 일이 없게 하는 것은 물품의 개화이니, 이러한 여러 조목의 개화를 합한 연후에 개화가 다 갖추어진 것이라고 비로소 말할지라.

1884년 12월4일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개화당은 청에 대한 조공 허례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地租法의 개혁,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내각 중심의 정치 실시 등의 조항을 담은 14개조의 정강을 발표하고 근대적 국가 수립을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갑신정변은 역사적인 큰 의의를 지닌다. 정치면에서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굳히려 하였으며, 전제 군주 체제를 입헌 군주 체제로 개혁하여 근대적 국민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재정의 일원화와 지조법의 개혁 등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사회면에서는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봉건적 신분 제도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법문사 출판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56-57쪽)

청산리 대첩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에 집결하여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1920). 청산리 대첩은 한민족의 독립전쟁과정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였으며, 우리 겨레에게 용기와 함께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다.(*1997년 교육부 저작 중학교 국사 하권 137쪽)

3·1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의 방식을 지양하고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3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서도 1920년에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이 승리한 봉오동 전투,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군과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거둔 청산리 대첩이 가장 두드러졌다.(*2002년 발행 교육인적자원부저작 고등학교 국사 347쪽)

 

김좌진 장군에 대해 

김좌진 장군 기념관 건너편 갈산 중‧고에 90칸짜리 집이 있었다(김좌진의 증조부 살다).

3세 때 父사망. 첫째(경진)가 양자로 나가고 김좌진이 호주되다.

13세 결혼

14세 무관학교 입학 16세 졸업(서울에서)

16세 때 300석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노비문서 불태움.

호명학교 세우고 개화교육시킴.

호명학교 자리에 1960년대에 갈산중고등학교가 세워짐.

19세 때 서울로 이사 가다. 부잣집에서 군자금 마련해 나오다가 일본 관헌에 쫓김.

계월씨 집 벽장에서 3개월 숨어살다가 나오다. 당시 뱃속아기 2달만임.

*하루는 항일 유격대의 대원들이 사직동 들판에서 비밀회담. 한인밀정의 제보에 의해 30여명의 일본 헌병들이 포위. 유동열. 백린 김동삼등과 항복하는 척하고 손을 들고 산에서 내려갔다. 헌병 한 놈이 김좌진을 포승줄로 묶으려 하는 찰라 걷어차고 총을 빼앗아 헌병 한놈을 사살하고 사직동의 민가를 향해 도망 →담을 뛰어넘어 들어간 집이 김두한의 산실. 황실의 상궁으로 있다가 퇴역한 申氏댁. 신씨의 외동딸 朴桂淑이 별채에서 책을 읽는 중 김좌진 뛰어 들어오다. 다락방의 책장 치우고 안내. 들어가자 자물쇠로 잠가 놓다. 호루라기 소리. 대문 걷어참. 박계숙은 마루에 나가 발자국 지우고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다짜고짜 박계숙의 공부방으로 뛰어듦. 다락방의 책장 문을 열어 보라고 을러댐. 자물쇠에 열쇠가 끼어드는 금속성. 이때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해” 박계숙의 대담한 기지로 잡히지 않았다.

두한 두옥 써놓고 고향에 와서 본부인 등 가족과 이별.

1889. 11. 24 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남.

1930년 1. 24. 고려공산당 박상실(주중 청년협회 회원)에 피살

중동철도선 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발동기 수리 중 고려공산당청년회의 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朴尙實의 흉탄에 맞다.

1930. 1. 29 한족 총연합회에서 사회장.(흑룡강 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

. *부인 해주 오씨가 정축년 봄 해림에 가서 백골을 운구해와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에 안장.

1940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57 충남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에 이장.

II. 韓國史新論(李基白著)에 기술된 안동김씨

 

병자호란

仁祖14년(1636) 丙子胡亂. 왕자와 비빈은 강화도로 피난. 南漢山城. 三田渡(松坡) 청태종 진영. 城下의 盟.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왕자가 인질로 가고, 3學士는 잡혀가 죽음을 당하고, 金尙憲도 뒤에 잡혀가서 오랜 獄中生活을 하였다. (257쪽)

 

세도정치

純祖(1800∼1834)가 11세 즉위. 金祖淳이 國舅. 憲宗(1834∼1849)의 母后가 趙萬永의 딸. 조만영의 아우 趙寅永이 領議政. 哲宗(1849∼1863)의妃가 金汶根의 딸. 金興根 ‧ 金左根 ‧ 金炳國등이 領議政이되었다.(296쪽)

평민문학의 융성

鄭芝潤(鄭壽銅) ‧ 金笠(金炳淵) 등과 같은 풍자시인의 존재도(310쪽)

 

甲申政變

청군 1500명 서울 주둔, 일본군 140명. 일본공사 竹添進一郞.

高宗21년(1884년) 10월17일(양력 12월 4일)에 단행.

金玉均의 手記인 『甲申日錄』에는 대원군 陪還, 門閥을 폐지하여 人民 平等의 權을 제정해서 국민의 身分上의 平等을 이룩하도록 규정. 財政을 戶曹로 단일화. 地租法 改革하여 국가의 收入擴大. 冗官(용관)을 革罷하고 官制를 改革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개혁이 공포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331쪽)

 

乙未義兵

乙未事變(고종32년,1895년 日本公使 三浦梧樓등이 閔妃를 살해)과 乙未改革(태양력채용, 종두규칙, 서울에 소학교 설치, 우체사무, 斷髮令)등에 대한 반일 분위기 속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남. 『頭可斷 髮不斷』

대표적인 인물이 柳麟錫, 李昭應, 李春永, 金福漢 등이었다.(350쪽)

 

民族産業의 受難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金融機關은 건양 원년(1896)에 金宗漢 등이 설립한 朝鮮銀行이었다.(386쪽)

III. 진단학회 한국사 등에 기술된 안동김씨

 

고려의 민족 재통일기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우고, 후 백제와 대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2002년발행 고등학교 국사 73쪽)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갔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에게는 향촌사회에서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공신들에게는 역분전을 지급하여 새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 200년발행 고등학교 국사74쪽)

이번에는 백제측이 자못 공세로 나와, 남으로 康州(강주,진주)를 습취하고 (天受11년,928년), 북으로 烏於谷(오어곡, 일명 부곡 今의흥)을 공발(攻拔)하여 羅都(라도)로 통하는 죽령로를 차단하고(928년), 이듬해(천수12년,929년) 또 의성부(今의성이니 오어곡 북쪽)를 공격하여 성주 홍술(洪術)을 전사케 하니, 여태조는 듣고 통곡하면서 『吾失左右手矣』라고 하였다 한다. 익 천수13년(930년)에는 견훤(甄萱) 自將 大擧(자장 대거)하여 역시 죽령로의 요충으로 의성의 직북(直北)인 古昌郡(今안동)을 공취하려 하여 그 부근인 甁山(병산,안동읍북10리)下에서 여태조의 군과 교전하다가 대패를 입고 말았는데, 이 패전으로 인하여 견훤이 의도한 죽령로차단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태조는 이 勝捷(승첩)을 매우 기뻐하여 戰功(전공)이 있는 城主(성주) 金宣平(김선평)을 大匡(대광,第2品), 權行(권행)과 張吉(장길)을 大相(대상,第4品)에 拜(배)하고 , 군을 승격하여 安東府(안동부)라고 하였다(천수13년,930년)(*1976년진단학회발행 한국사 중세편47쪽)

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대동보 수편 201쪽)

 

벽상공신(naver백과사전에서)이라는 호칭은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 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는데, 여기서 벽상공신이 유래했다.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명종이 무신난의 주동자(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3인)들에게 내린 예외에는 없다.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홍유(洪儒:殷悅),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 김선궁(金宣弓), 이총언(李忿言),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윤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이능희(李能希), 이도(李棹), 허선문(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김훤술(金萱術), 한란(韓蘭),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나총례(羅聰禮), 이희목(李希穆), 염형명(廉邢明), 최필달(崔必達), 김홍술(金弘述), 김락(金樂) 등이다.

안동부는 후삼국시대부터 在地勢力(재지세력)이 강하였다. 三太師(삼태사)가 고려에 귀순하면서부터 3성은 안동의 향직을 세습하면서 士族(사족)과 吏族(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들의 자제가운데 일부가 上京從仕(상경종사)하여 在京官人(재경관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삼태사의 경우는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자신들이 고려에 귀순하여 공신 호를 받고도 그대로 출신지에 눌러 앉아 본읍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향직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이수건지음 『영남사림파의 형성』52쪽)

 

김계행 (金係行 1431∼1517,세종 13∼중종 12)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다.

1431년(세종13년)安東府西 豐山縣南 佛頂村에서 比安현감이었던 三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갑자년(1444) 10월(14세)에 현감공이 비안임소로 떠나매, 배행하여 그 곳 향교에서 수업하였다.

31세에 동당초시(제술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수하였다. 32세에 성주향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미 출가해서 國師가 된 學祖大師가 長姪(兄 係權의 長子)이었는데 하루는 성주에 왔다. 숙부를 만나서 “숙부님께서 오랜 세월 과거에 고생하시온데 만약 벼슬 하실 뜻만 있으시면 힘써 드리겠읍니다”라고 말씀 드리니 선생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겠느냐?”고 하니 두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41세(성종원년) 4월 佔畢齋 김선생과 더불어 주역과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44세에 충주향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480년(성종 11,更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에 사헌부 감찰·고령현감(高靈縣監)·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비롯한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임금과 친척 되는 신하들의 잘못을 논박했으나, 훈구파(動舊派)에 의하여 시정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68세(무오)에 筍堤(순제) 宅畔(택반)에다가 작은 정사를 짓고 편액을 붙여 『寶白堂』이라 이름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두 번 투옥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도 투옥되었다.

선생은 일찍 詩에서 “우리 집엔 보물이란 없나니,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고 하였거늘 보백당은 아마 이런 뜻에서 취해진 것일 것이다.

정축(1517년, 중종12) 12월 遺戒에, 자질 및 종손 삼당공 영(瑛)을 불러 앉히고 『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청백을 가전하고 공근을 세수하며 효우로 돈목하라)을 부탁했다.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1990 김흥진 발행 국역보백당실기) (*안동김씨대동보 수편 215쪽)

 

김중청(金中淸 ; 1567∼1629,명종22∼인조7)

號는 苟全(구전)이다. 계보는 三近→係行→克禮→世殷→廷憲→夢虎→中 淸이다. 소고 박승임, 월천 조목, 한강 정구에게 서 학문을 닦았다. 1610년(광해군2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사간원의 정언으로 있으면서 대의를 지켰다. 대북들이 왕후를 폐할려고 광분했다. 대북파의 정인홍이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을 탄핵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대의를 위해 이를 거절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621년 승지로 선유사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봉화의 반천서원에 제향되었다.(*안동김씨대동보 8권1쪽)

 

병자호란

청태종은 1636년 12월1일 10만 대군을 심양에 친정의 길을 떠남.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 14일에는 청군이 개성을 통과하였음을 알게 되자 원임대신인 尹昉과 金尙容을 시켜 廟社의 神主를 받들고 세자비 姜씨, 元孫, 제2자 봉림대군, 제3자 인평대군을 陪護하여 강화도로 避兵케 하였으며, 인조도 그날 밤에 강화도로 떠나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통로가 차단되어 성내로 돌아 왔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동중추부사 이경직과 적진에 나아가서 주육으로 犒軍(호군)하며 지연시키는 동안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수구문으로 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12월14일). 성중의 군사는 13000명, 식량14300석, 醬(장) 220여 甕(옹)이 있었으니 겨우 50여일을 견딜 만한 분량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혹한과 기아에서 40여일을 버티었다.

예조판서 金尙憲, 이조판서 鄭蘊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媾和論(구화론) 쪽으로 기울어졌다.

강화도에서는 일시에 쇄도하는 청군과 일전을 할 겨를도 없이 正月22일에 함락되고, 빈궁‧ 세자이하 200여명이 청군에 잡혀 南漢山城下로 호송되었다. 陷城의 기세가 보이자 前右議政 金尙容, 前工曹判書 李尙吉등은 放火自殺하였다.(진단학회 한국사 근세후기편 104쪽)

 

김상헌의 시

1640년(인조18)淸에서 明을 치고자 파병을 요청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청나라로 잡혀가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제 돌아올 기약 없이 하직의 노래로 마음을 달래며 이 시를 읊었을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2002년 7월 풍산읍 소산동 입구에 위의 시비를 세웠다.

 

김상헌과 최명길

鳴吉初疑尙憲有釣之心. 而至削枚卜. 及其同囚. 見其死生迫頭. 而確乎不拔. 遂信其義而服其心. 尙憲初亦以鳴吉與秦檜無異. 及見其以死自守. 不爲撓屈. 亦知其心. 本非爲虜. 兩家各相敬重. 尙憲詩曰. 從尋兩世好. 頓釋百年疑. 鳴吉詩曰. 君心如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

명길초의상헌유조지심. 이지삭매복. 급기동수. 견기사생박두. 이확호부발. 수신기의이복기심. 상헌초역이명길여진회무이. 급견기이사자수. 부위요굴. 역지기심. 본비위로. 양가각상경중. 상헌시왈. 종심양세호. 돈석백년의. 명길시왈. 군심여석종난전. 오도여환신소수.

명길이 처음에는 상헌이 이름을 낚으려는<釣名>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매복(정승의 薦)에서 깎아 버리기까지 하였는데, 이때 같이 수금(囚禁)되어 있으면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의젓한 그를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마음속으로 탄복하였다. 상헌도 또한 처음에는 명길을 <옛날 남송의 진회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뜻이 오랑캐를 위함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집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상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양대의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푼다.> 라고 하였고 명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

經은 정상적이요, 權은 임시의 權道이다. 예를 들면, 嫂叔間에 손을 잡지 않는 것은 경이나 嫂가 물에 빠졌을 때에는 손을 잡아 건져내는 것은 권이다. 척화는 경이요, 강화는 권이라 하였다. *국역연려실기술VI권에서

 

김상용(金尙容)

병자호란시 강화성 남문에서 화약으로 폭사. 13세의 손자 壽全과 從人 安善承도 같이 죽다. 遺衣로 양주 석실 서윤공의 묘가 있는 우측산록에 장사지냄. 사위 張維(우의정)가 신도비 찬하다.

판서 김수증이 종손이며, 대제학 김창협과 영의정 김창집이 종증손임.

 

당쟁(黨爭)

(1) 동서분당(선조8년, 1575년)

이조전랑(吏曹銓郞)자리를 둘러싸고 김효원(金孝元, 신진세력인 소장파의 한 사람으로 그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었다)과 심의겸沈義謙, 명종비 심씨의 동생으로 기성세력인 노장파의 한 사람으로 서울 서쪽 정동에 있었다)사이에 틈이 생겨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졌다. 동인에는 이황, 조식의 문인이, 서인에는 이이, 성혼의 문인이 많다.

(2) 남북 분당(선조24년, 1591년)

정철의 세자 世子建儲(책봉문제 ; 선조24년 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인빈 김씨가 신성군을 낳자, 좌의정 정철이 세자로 정할 것을 주장하니, 이산해는 ‘신성군을 해치는 것’이라고 인빈 김씨에게 고하자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동년 윤3월 강계로 유배되었다)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동인이 재집권한 후, 정철의 처벌문제로 온건파인 남인(우성전, 유성룡,이원익)과 강경파인 북인(이발, 이산해, 이이첨)으로 분열됨.

(3) 대‧소북의 분열

남북분당후 북인이 집권하던 중 선조의 후계문제를 둘러싼 세자책봉문제로 공해군(공빈 김씨의 제2서자)의 지지파인 대북과 영창대군(인목대비의 소생)의 지지파인 소북으로 분열됨 → 광해군 즉위로 대북파 집권(1608)

(4) 인조반정과 서인의 집권

광해군의 즉위로 집권한 대북파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재비를 서궁에 유폐하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유 등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능양군)을 세움. 서인이 대‧북을 숙청함.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 사이에서 1남 소현세자 2남 봉림대군(효종) 3남인평대군 4남 용성대군을 낳았다. 인렬왕후가 42세로 죽자 3년 뒤인 1638년에 44세인 인조는 15세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조씨)를 맞이했다. 그러나 26세(1639년)때에 인조가 죽자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되었다. 10년 뒤인 1659년에 효종이 죽고, 1674년에는 손자인 현종마저 죽었다. 증손자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14년을 더 살았다. 아들, 손자, 증손자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는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으로 격상되었다. 그 때마다 그녀의 복상 문제가 당쟁의 화두가 되었다. 문제는 효종을 장남으로 대우하느냐, 차남으로 대우하느냐 이었다.(*박영규 지음 조선의 왕실과 외척 328쪽)

(5)제1차 예론

효종이 죽자 어머니인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만1년,효종을 次子로 봄)과 남인 윤휴의 3년설(만2년, 효종이 차자이지만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봄) 대립→ 서인 승리

(6)제2차 예론

효종비 인선대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의 대공설(9개월)과 남인의 기년설이 충돌 →남인 승리(1674).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과격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분당됨

(7)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숙종6년(1680)→서인 집권. 제2차 예론으로 집권한 남인 허적(許積)의 유악(帷幄;천막)남용사건을 계기로 서인 김석주‧김익훈 등이 허견(許堅;허적의 아들)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여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함→ 득세한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당

(8)노‧소론 분당

경신 대출척후 서인중 김익훈(어영대장) 등이 남인을 처형하자, 이를 지지한던 송시열등 노장파의 노론과 반대하던 윤증(尹拯) 등 소장파의 소론으로 분당됨

(9)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20년1694)→남인집권

숙종이 장소의 소생 균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문제에 서인이 반대하다 물러나고, 남인은 지지하므로 재집권하였다.→송시열이 제주도에서 사사되고 金壽興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다. 김수흥의 아우 金壽恒도 기사환국때 진도에서 賜死되었다. 장소의를 희빈으로 삼고 민비를 폐함.

(10)갑술환국(甲戌換局;숙종20년,1694)→소론집권

기사환국후 남인 영수 민암 등이 민비 복위를 꾀한 한중혁‧김춘택 등 서인의 숙청을 꾀하다[甲戌獄事임]. 숙종의 반대로 남인들은 사사 또는 유배되고, 죽은 송시열, 김수항 등에게는 작위를 주었다. 이후 소론이 득세하여 노소(老少)의 쟁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남구만 등 소론이 집권, 민비가 복위됨

(11)신임사화(辛壬士禍; 경종 원년,1721)→소론집권

장희빈의 음모에 관대하던 소론이 물러나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이 집권 중에 숙종이 죽고 경종(장희빈의 소생)이 즉위, 다병무자하자 김창집 등이 왕제 연잉군(延礽君;후에 영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하다가 노론4대신(金昌集,李頤命,李建命,趙泰采)이 죽음을 다하다.→소론 유봉휘 등이 집권

(12)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영조4년,1728)→노론득세

영조 즉위후, 이인좌 등 소론의 불평분자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등에게 평정되었다

(13)시파(時派)‧벽파(辟派)의 대립

탕평책의 실시로 당쟁이 완화되었으나, 영조때 사도세자(思悼世子;莊獻世子;정조의 父)의 불행한 사건을 중심으로 노론‧소론‧남인 등 붕당에 세자의 동정파인 시파와 반대파인 벽파로 나누어져 세도정치 시대에 서로 얽혀 대립하였다.(1979년 성문각발행 정통핵심국사 298∼301쪽 참고)

 

김수흥 (金壽興 1626∼1690,인조 4∼숙종 1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기지, 호는 퇴우당(退憂堂). 1655년(효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도승지(都承旨)를 거치고 1666년(현종 7) 호조판서로 있다가 동생 수항의 후임으로 우의정이 되었다. 1674년(현종 15) 영의정에 오르고,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제문제로 남인들의 공격과 왕의 분노를 사서 사직당하고, 현종이 죽자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수항이 영의정으로 재 등용되자 그도 특명으로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박세채(朴世采) 등이 종실(宗室)인 항의 비행을 공박하고 종실로서 모역을 일으킨 정(楨)·남의 옥사를 논하다가 귀양 가자, 상소하여 그들을 구출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세자 책봉 문제로 장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

 

김수항 (金壽恒 1629∼1689(인조 7∼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본관은 안동(安東). 1656년(효종 7) 문과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정언·교리 등 여러 청환직을 거쳐, 뒤에 우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남인들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1년)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좌의정이 되어 윤휴·홍우원(洪宇遠)·조사기(趙嗣基) 등의 동궁(東宮)에 대한 불손한 언사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남황(南荒)에 유배되었고, 1680년(숙종 6) 종실(宗室)인 정(楨)·남의 모역이 발각되어 윤휴 등이 주살되고, 그 일당인 남인(南人)이 모두 쫓겨나자 배소에서 불려 올라와 옥사를 다스리고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당쟁이 잠잠하고 조정의 기강이 유지되었으나, 1689년(숙종 15)에 기사사화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진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전서(篆書)를 잘 썼고 저서에는 《문곡집(文谷集, 28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김창협 (金昌協 1651∼1708(효종 2∼숙종 34)

조선 중기 학자·문신.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본관은 안동(安東). 1669년(현종 10) 진사에 뽑히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전적·병조좌랑·부교리 등을 거쳐 예조참의·대사간에 이르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 수항(壽恒)이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아버지가 신원(伸寃)되고 호조참의·대제학·예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 문하이므로 이이(李珥)의 계류(系流)이나 학설에서는 이황(李滉)과 이이를 절충했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했다.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농암집(農巖集)》 <잡지외편(雜識外篇)>에 있는 여러 시인(詩人)에 대한 비평은 고문파 문장가로서, 탁월한 문학 비평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준다. 저서에 《농암집》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논어상설(論語詳說)》 《오자수언(五子粹言)》 《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연보(文谷年譜)》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김제겸 (金濟謙 1680∼1722,숙종 6∼경종 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본관은 안동(安東). 1705년(숙종 31) 진사(進士)가 되고, 1710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고양군수(高陽郡守)·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다. 1719년 문과에 급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1722년(경종 2) 아버지 김창집(金昌集)이 건저(建儲) 4대신의 한사람으로 사사(賜死)될 때 울산(蔚山)에 유배되었고, 뒤에 부령(富寧)으로 옮겨졌다가 사형되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죽은 3학사의 한사람으로 1725년(영조 1) 좌찬성(佐贊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취고(竹醉藁)》가 있다. 시호는 충민(忠愍).

 

金氏의 勢道

金祖淳은 國舅로서 勢道를 잡게 되어 점차로 安東金氏의 一族으로 金祖淳의 위行列인 金履翼은 병조판서, 金履度는 예조판서(뒤에 형조판서), 같은 行列인 金達淳은 右議政, 金汶淳은 이조판서, 金羲淳은 형조판서(뒤에 병‧이조판서)로 각각 전후하여 朝廷에 布列되었고, 지방에서도 金明淳이 함경감사(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진단학회한국사 근세후기편 329쪽)

 

김조순 (金祖淳 1765∼1832(영조 41∼순조 32)

조선 후기 문신.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본관은 안동(安東). 1785년(정조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의 비(妃;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품성이 좋아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어린 순조를 30년간 보좌하였으나 지나치게 너그러운 성격 탓에 소실인 기생 나합(羅閤)의 손에 국사가 농락되는 폐단을 낳았다. 그의 집권으로 철종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그림도 잘 그려 죽화(竹畵)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풍고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

 

김매순 (金邁淳 1766∼1840(영조 52∼헌종 6)

조선 중기 학자·문신. 자는 덕수, 호는 대산(臺山).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사인(舍人)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예조참판·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홍석주(洪奭周)와 더불어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그가 지은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는 천고의 절조(絶調)라고 칭송받았다. 저서에 《대산집(臺山集)》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등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청(文淸).

 

IV. 完譯 梅泉野錄(黃玹著2005교문사 발행)에 기술된 안동김씨

 

壯金의 융성

金祖淳은 옛날부터 紫霞洞(자하동)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자하동은 경복궁의 북쪽과 창의문아래에 위치하고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으므로, 여울과 숲이 감싸고 있어 시내에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이 동명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간혹 발음을 생략하여 ‘紫洞’으로 부르기도 하고, 혹은 급히 부를 때는 ‘壯洞'이라고도 한다. 이때 김조순은 이미 國舅(국구)가 되어 조정에서 권세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장동에서 校洞으로 이사한 후 순조를 대신하여 국권을 장악하였고, 삼대를 거쳐 國婚을 하였으므로 國朝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외척이 많아, 세칭 안동김씨를 ’壯金‘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김조순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근(逌根), 좌근(佐根)과 손자인 병기(炳冀)등이 교동에서 살고 있었다.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서 그의 아들 炳弼이 어리어, 그의 조카 炳學과 炳國이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典洞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권력이 金炳冀와 대등하였으므로 京城에서는 전동과 교동으로 칭했다. 지금 시골에서도 전동‧교동시절에 부르던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완역매천야록 14쪽)

 

壯洞 金氏 先祖

선조에 仙源 金尙容(1561∼1637,인조때의 문신), 淸陰 金尙憲(1570∼1652, 효종때의 학자), 文谷 金壽恒(1629∼1689,현종때의 문신), 夢窩(몽와) 金昌集(1648∼1722, 경종 때의 노론 4대신 중의 한 사람) 등은 덕망과 공훈으로 온 나라의 선망을 받았고, 김조순도 문장과 국사에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여 덕망 높은 분으로 칭송을 받았다.(완역매천야록14쪽)

 

金興根

장동김씨 중에서 오직 김흥근이 헌종을 극간하다가 유배되었다.

철종사후 후사가 없었다. 철종은 일찍부터 熙에게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장동김씨들은 그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흥근은 , “흥선군이 있으니 이것은 두 임금이 있는 셈입니다.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꼭 그만두지 않으려거든 홍선군을 옹립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김병학은 흥선군과 약속하여 그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하였으나 흥선군은 김병학을 배반하고 국혼을 閔致祿의 딸에게 정하였다.

갑자년(1864)에도 김흥근은 조정에 말을 퍼뜨리기를, “옛날부터 사친은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즉시 그를 사제로 돌려보내어 한평생 부귀나 싫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대내외의 대권을 모두 잡은 대원군은 김씨 중에서도 김흥근을 가장 미워하여, 庄土와 田地 수십 마지기를 빼앗아 갔으며, 삼계동에 있던 별장마져도 빼앗아 갔다.(완역 매천야록 15쪽)

 

金炳冀

대원군이 집권 초에 어느 公會에서 당당한 기세로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시키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뜻은 어떻습니까?”하였다.

이에 많은 재상들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중 김병기기 분연히 머리를 들고 말하기를,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하려고 하면 지척이 되고, 남대문도 3층으로 높이면 3층이 될 것입니다. 지금 대감께서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태산은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저 혼자 잘난 척 하는군”하고 중얼거렸다. 종친을 높이며, 남인을 기용하며, 노론(태산)을 억제하겠다는 뜻이다.

대원군은 고집 센 김병기를 꺼려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그의 막강한 종족들이 두려워 오랫동안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김병기는 여주에 은거 했다.

대원군은 “아들을 낳으려면 김병기처럼 雄特한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洪遠植 형제처럼 단아하고 준수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원식은 남인으로 그의 아우 健植과 함께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대원군은 그를 가장 사랑하였다.

 

김병기의 애국심

병인양요 때 김병기는 여주에 있었다. 한성이 소란하여 피난민이 사방에 만연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가족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國恩을 받고 살았으므로 社稷과 함께 존망을 같이해야 하니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그가 가족을 데리고 入京하자 이 소문을 들은 대원군은 매우 낙심하였다. (완역매천야록32쪽)

 

김병기 (金炳冀 1818∼1875(순조 18∼고종 12)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 1847년(헌종 13) 문과에 급제, 철종 때 총융사(摠戎使)·훈련대장·금위대장을 거쳐 이조·예조·형조·공조판서를 지내고, 1862년(철종 13)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나 대원군이 집정하자 광주유수(廣州留守) 등 한직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공조판서·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

 

金炳始와 金弘集의 公選

재상 김병시는 조금 공정하고, 김홍집은 조금 글을 잘하여 고종에게 예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고종이 統科를 치를 때는 이최응과 심순택을 고시관으로 임명하고, 공정한 선발을 하고자 할 때는 김병시와 김홍집을 고시관으로 임명하였다.(완역매천야록78쪽)

 

閔泳翊의 及第

민영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가 居喪 중에 있을 때 명성황후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루가 급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恩門(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의 主試官을 부를 때의 호칭)이 金炳德이 아니면 과거를 보지 않겠다. 그것은 김병덕이 청백하다는 명망이 있어서 시험을 매우 공정하게 보기 때문 이었다.

그 후 김병덕을 주시관으로 임명하자 그는 어김없이 민영익을 뽑았다. 이때 민영익은 또 그를 찾아가 新來(명관이 새로 급제한 사람집에 가서 배푸는 일종의 축하행사)를 불러 달라고 하자 그의 명망은 일시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聖一(김병덕의 자)이 起哉(김병덕의 부친 김흥근의 자)보다 낫다고 하더니 더 못하다”고 탄식하였다.(완역매천야록91)

 

철종 왕비 김씨

왕후의 시호는 哲人王后이며, 김문근의 딸이다. 그는 현명하고 정숙하여 궁내에서 무두 추앙하였다. 그는 철종이 승하한 후로 웃는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았고, 글도 잘 알고 글씨도 단아하게 잘 썼지만 남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金炳德의 義氣

김병덕이 신사년(1881) 겨울에 평안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임오년(1882) 6월에 그의 아들 金祚均이 한성 본가에서 그의 가솔을 수레에 싣고 평양으로 갔었다. 그것은 군란이 겨우 종식되자마자 다시 큰 난리가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병덕은 그를 꾸짖어, “우리는 世臣大族으로서 한성이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남들보다 먼저 피난을 하여 백성들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하면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시 한성으로 되돌려 보내자 김조균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

매우 淸白한 감사였다. (완역매천야록128쪽)

梅泉野錄은 구한국 말기의 유명한 시인이요 節士인 매천 黃玹선생(1855∼1910)이 기술한 韓末의 秘史이다, 11세에 한시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으며, 고종2년(1886)에는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이 혼란한 것을 개탄하여 향리에 은거, 서적 3,000여권을 쌓아두고 두문불출 독서로 세월을 보내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國恥를 통분하여, 絶命詩 4수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매천야록은 대원군의 집정(1864년)부터 1910년 경술 합병까지 47년간의 정치 ‧ 경제 ‧ 사회 ‧ 외교 ‧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자신이 보고 들은 데로를 편년체로 기술한 책이다.

128쪽의 김병덕의 의기 까지도 안동김씨에 대한 기술이 누락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후에도 이름이 자주 거론된 분들은 김병시‧김병덕‧김성근‧김매순‧김병기(金炳基)‧병국‧김가진‧김복한‧김종한 등이다.

 

김병학 (金炳學 1821∼1879(순조 21∼고종 16))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 본관은 안동(安東). 1853년(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장령(掌令)·사간(司諫)을 거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서 대사헌·판서 등을 역임했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안동김씨 일문들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고종 즉위에 은밀히 노력한 공로와 평소의 흥선대원군과의 친분으로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찬수했고, 찬집소총재관(纂集所總裁官)으로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 《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각각 완성했다. 보수파의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가톨릭교의 탄압을 적극 주장했고, 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체결을 적극 반대했다. 시호는 문헌(文獻).

 

김복한 (金福漢 1860∼1924)

충남 홍성에서 태어님. 선원 김상용이 12대 조부이다.

조선 말기 문신·의병장.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1892년(고종 29) 문과에 급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1894년 승지(承旨)에 오르고,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며, 이해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내종형인 이설 · 안병찬(安炳讚) 등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 이듬해 석방되었다. 대사성(大司成)·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 5적(五賊)을 참수(斬首)하라고 상소하여 투옥되고, 뒤에 석방되었다. 1906년(광무 10)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홍주(洪州)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잡혀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국 5적의 참수를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1919년 3월 유림(儒林)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가 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7년 5월 1일 충남 홍성 서부면 이호리 추양사에서 선생의 춘계제향 봉행되었다.

홍성군 금마면에는 金福漢 효자비 있다. 묘비에는 “朝鮮國 大司成 志山金先生 福漢之墓”라고 쓰여 있다.

 

김삿갓(金炳淵 ; 1807∼1863)

1811년(순조11년) 평안북도 가산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켜서 청천강 이북의 8개 고을을 점령 했다. 이때 선천부사 이었던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항복을 했다. 이의 손자가 김병연이다.

김병연은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 열린 백일장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은 가산의 군수를 예찬하고 선천의 부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강하게 비판한 글을 작성하여 장원에 오른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듣고는 크게 자책하게 되고 24세가 되던 해에 가족들을 버리고 방랑을 시작한다. 하늘을 보기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생각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방랑 생활이 시작됐고, 그의 별명이 방랑시인 김삿갓 혹은 김립이 된 것이다.

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서당의 푸대접에 화가 나서 지은 풍자시

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房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방안에 모두 귀한 분들이네)

生生徒諸未十 생도제미십 (생도는 열 명도 못되고)

先先生乃不謁 선생내불알 (선생은 내다보지도 않는구나)

 

김가진 (金嘉鎭 1846∼1922)

조선 말기 문신·독립운동가. 호는 동농.

1877년(고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이 되었다. 1880년(고종 17)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4년간 도쿄[東京(동경)]에서 주재하였으며, 1891년(고종 28)부터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지냈다. 1894년(고종 31)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였으며,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1896년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갑오개혁이 실패한 뒤에는 1896년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신구법(新舊法)을 절충하기 위해 설치한 교전소(校典所)의 지사원(知事員)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중추원의장·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충청도관찰사·규장각제학을 역임한 뒤,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계승 단체인 대한협회의 회장으로서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였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하이[上海(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3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하였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그 뒤 단원들이 체포되어 대동단이 해체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하다.

 

김가진에 대한 참고사항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조선의 유력인사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이 중에는 이완용이나 송병준처럼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공로로 작위를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적극적인 친일을 하진 않았어도 회유의 목적으로 고위관직을 지낸

 김충한 08-06-28 18:23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찾아 계시합니다.
김계한(金啓漢)
 
  1867. 6.12~1956. 7.13 
 
  경북 안동 
 
  3.1운동 
 
    
 
  대통령표창(95)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경북 안동 읍내 시장에서 유동붕(柳東鵬)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안동 읍내의 의거는 기독교 계통과 천도교 계통의 두 갈래로 각기 계획되어지다가 추진과정에서 서로 긴밀히 연락하면서 합동시위의 형태로 일어났다. 이들은 읍내 장날인 3월 18일 오전 11시를 기해 거사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각기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계한은 거사 당일에 유동붕·송기식(宋基植)·송장식(宋章植)·권중호(權重浩)·이종록(李鍾祿) 등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태극기와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1백 5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경은 총검으로 탄압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는데, 만세시위의 불길은 오후 6시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고, 오후 12시경에는 3천여 명의 군중이 시내 각처에서 모여들면서 군청과 경찰서 등 일제 기관을 포위하며 만세시위를 거세게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일 경성복심법원과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19. 5. 2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19. 6. 5 고등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398면
 김충한 08-06-28 18:36   
김덕진(金德鎭)
 
  1864. 4.16~1947. 3. 7 
 
  충남 청양 
 
  의병 
 
    
 
  애국장(90) 
 
  김덕진의 본은 안동(安東)으로 청양군 삼가(靑陽郡三街)에서 낙포선생 중일(洛圃先生 重鎰)의 9세손으로 태어났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의 뜻 있는 지사들이 총궐기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을사 의진 중에 호서(湖西)지방에서 크게 활약한 것은 홍주(洪州)의진이었다.
홍주는 일찍이 을미(乙未) 의병의 중진(重鎭)이었으므로 김복한(金福漢) 안병찬(安秉瓚) 등이 쌓아 올린 대일 투쟁 경력을 갖고 있던 지방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면암을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민종식(閔宗植)을 추대하여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김덕진 역시 이 운동에 군사로서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6년 윤 4월 9일(양 5월 31일) 일군의 홍주 진격시 성을 빼앗기고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일에 대하여 김덕진은 후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덕진은 용렬한 선비로서 만 가지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나, 다만 의리의 한계에 있어서는 일찍이 스승과 친구들의 강론한 나머지를 얻었으므로 충분심이 격동되어 역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시세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동지 6, 7명과 함께 대략 서로 모의하여 의기 있는 사람 천여 명을 규합해서 홍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느님이 끝내 죄 준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여 필경 반목이 생기자 이로 인해 멀리 섬 중으로 귀양간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모두 함께 죽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나는 요행이 화를 면하여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노라니 그 마음조차 세상에 내보일 수 없어서 쳐다보아도 부끄럽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뿐이다."

이상의 글로 미루어 보아 성세를 이루던 홍주의진이 그토록 쉽사리 무너진 것은 내분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 때 80여 장병이 순국하고 80여 의사가 체포 압송되어 서울에서 심문 받게 되었다.
체포되지 않은 홍주의진의 주도적인 인물들이 1906년 9월 중순 충남 예산(禮山)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규합을 꾀하였다.
특히 예산읍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한곡(閑谷, 지금의 大述面 上項里)에 살고 있던 이용규(李容珪)의 족형인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김덕진을 비롯하여 이용규 곽한일(郭漢一) 박윤식(朴潤植) 김운락(金雲洛) 황영수(黃英秀) 정회규(鄭會圭) 박창로(朴昌魯) 이만식(李晩植) 등 수십 명이 의거준비를 진행시켰다.
이용규는 민종식의 매형일 뿐 아니라 모두 홍주의진 계열의 인물로써 구성되었기 때문에 대장을 민종식으로 삼고자 하였다.
민종식은 홍주의거 실패 후 산곡에 의지하여 은신하고 있던 것을 이남규가 은신처를 제공하여 아산 감밭(道古面)의 동지인 성모(成某)의 집에 숨겨 주었다.
계획이 점차 구체화되어 가자 조직을 구성하여 김덕진은 이용규 곽한일과 함께 참모에 임명되었고, 박윤식은 운량관(運糧官), 황영수 정재호(鄭在鎬)는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9월 그믐에 수백 명의 건장한 군사들을 예산읍 근처에 배치하고 음력 10월 5일에 예산읍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이 예산에서 활약하고 있던 일진회원에게 탐지되어 계획의 일부가 일본 헌병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10월 2일 새벽 일본 헌병 10여 명과 순사와 병정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등 수십 명에 의해 이남규의 집이 포위공격을 당하였다.
이로써 김덕진을 위시하여 이용규 이남규 부자 곽한일 민종식 등이 모두 적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공주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경성 평리원(京城 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김덕진의 공사(供辭)는 다음과 같다.

"…아! 종묘 사직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安危)와, 문명과 야만의 한계나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이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만약 성공만 했다면 오늘날 먼저 네 머리를 베고 또 장차 네 놈의 종자를 토벌하며,
저 5적 놈들을 처단할 터인데,
시운 소관으로 형세가 당적할 길이 없으니 다시는 여지가 없다.
다만 유감 되는 바는 그 뜻을 마침내 펴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못 감고, 또 사방의 웃음거리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언제나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과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으로 평생의 법을 삼아 온 처지다.
네놈들의 이른바 법률이란 것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것으로써 보고하여 하루 빨리 처결해 주기 바란다."

위의 공사는 의병의 모범적인 것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으로서 그의 사상이 위정척사(衛正斥邪)에 기초를 둔 것임을 알게 하며 그의 학문적 배경도 미루어 짐작케 해 준다.
1907년 7월 김덕진은 함께 체포된 이용규(李容珪) 곽한일(郭漢一) 황영수(黃英秀) 박윤식(朴潤植) 박두표(朴斗杓)와 함께 종신형을 언도받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으며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김덕진은 7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19년 유림 측에서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김덕진은 이에 참여하여 서명한 137인 중 1인이었다.
그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김덕진은 정원택(鄭元澤)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어 평소 신규식과 친분이 있던 서울의 정두화(鄭斗和)를 만나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 문제를 협의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기려수필 90면
고등경찰요사 24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6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3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2 20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293∼299 303 309 310 318 319 33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339면
 김충한 08-06-28 18:41   
김동진(金東鎭)
  1891.11.29~1938. 3.13 
  충남 홍성 
   독립군 
   애족장(90) 
 
  충남 홍성(洪城) 사람으로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의 친동생이다.
1920년 6월 서울에서 임시정부 연통제 및 교통국 설치와 관련한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이 조직되고, 소진형(蘇鎭亨)이 단장에 추대되자 이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벌이다가 동년 말에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1921년 12월에 다행히 면소 석방되었다.
1922년 10월에는 다시 경상도 일대에서 신태식(申泰植)을 단장으로 하여 조직된 의용단(義勇團) 조직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7년 만주에서는 각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이 한창이었는데, 그는 1928년 1월 김동삼(金東三)이 위원장으로 추대된 군민회의(軍民會議)의 민사위원(民事委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5월에는 길장연로서방(吉長沿路西方)에 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정의부(正義府)의 3부대표가 모여 유일대독립당을 조직하여 각 단체를 통합하는 회의가 있었는데, 그는 김좌진 등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9년 초에는 김좌진과 함께 만주 중동현에서 한족연합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일군에게 포로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일경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는 옥고 끝에 1938년 3월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74·275·28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0면
·무장독립운동비사 147면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45면
·동아일보(1927. 8. 14)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9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724·98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747·1104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505면
·고등경찰요사 206·208·210면
 김충한 08-06-28 18:55   
김복진(金復鎭)
   1901.~1940. 
   충북 영동 
   국내항일 
   애국장(93)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의 친형(親兄)으로서 조각가(彫刻家)이던 그는 1927년 6월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적에서 이성태(李星泰)의 권유로 고려청년회(高麗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1930년 11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 6월을 받아, 미결기간을 포함하여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0년대에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와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의 미륵불상을 제작하는 등 민족미술의 진흥에 공헌하였으며, 1936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서거시에는 제자 이국전(李國銓)으로 하여금 그의 데드마스크를 뜨게 했다가 일경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일도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30. 11. 28 경성지방법원)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제6집 95∼97면
·안도산전서(주요한) 상권 456면
 김충한 08-06-28 18:58   
김복한(金福漢)
   1860.7.24~1924.3.29 
   충남 홍성 
   의병 
   충남 홍성 
 
  독립장(63) 
 
  김복한의 본은 안동(安東)으로 공주(公州)사람이다. 사람됨이 헌앙(軒昻)하고 지조가 굳었다.
1892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와 양사(兩司)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에 사서(司書)에 제수되고 통정(通政)으로 승임되었으며, 이어서 대사성, 형조참의(大司成, 刑曹參議)를 거쳐 1894년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
그 해 6월에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모든 제도를 고쳐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洪州)로 귀향하여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자 하였다.
1895년 이른바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김복한은 이대로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내종형이 되는 전 승지 이 설(李 )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수습하는데 공이 컸으므로 관찰사로 임용된 이승우(李勝宇)를 설득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승우는 의병 일으키는 일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정 개혁을 반대하는 일은 동학농민운동을 수습하는 일과는 다른 일일 뿐더러 자신의 이해관계에 상반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홍주 땅에 살고 있던 안병찬(安炳瓚)과 임한주(林翰周), 그리고 임피현령(臨陂縣令) 오영석(吳榮錫)도 거병할 생각을 갖고 이승우에게 의향을 떠보았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때에 홍주 남쪽에 살고 있던 안병찬의 부친 안창식(安昌植)은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 등과 의논하여 민병 180명을 소집하여 채광묵(蔡光默)으로 하여금 거느려 아들과 함께 거사할 준비를 마쳤다.
이에 대중들의 뜻을 확인한 김복한은 홍주 입성 날짜를 1895년 12월 1일로 확정하고 성내에 있던 홍 건(洪楗)을 통하여 관찰사의 의중을 재차 확인하였다.
홍 건은 관찰사 이승우가 자진하여 먼저 군사를 발동할 인물이 아니니 의진의 뜻대로 일을 추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홍 건 역시 일이 닥치자 마음이 흔들려 믿을 만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규합되지 못하고 있을 때 박창로, 청양(靑陽) 현감 정인희(鄭寅羲) 등이 의병 수백 명씩을 보내어 후원하였다. 이에 용기 백배하여 송병직(宋秉稷)·이세영(李世永) 등이 관문으로 들어가 새로이 설치한 경무청을 부수고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경무관(警務官) 강인선(姜仁善)을 포박하고 죽이고자 하였다. 일이 이쯤 발전되자 이승우가 만류하면서 창의하는 데에 협조할 것을 약조하였다. 스스로 관찰사라는 일본식의 관명을 버리고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어 각 포구와 열읍에 창의한 것을 알렸다.
12월 3일 각 의병진의 대표들이 김복한을 수석으로 삼고, 홍주 관하의 각 고을과 공주부(公州府)의 각 면으로 통문을 보내어 독자·노약자를 제외하고 집마다 군정 1명씩을 징집케 하였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송병직을 서면 소모관으로, 채광묵·이창서를 남면 소모관으로, 그리고 이세영·이봉학·이병승을 공주(公州)로 파견하였으며, 박창로·정제기는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수비하도록 내보냈다.
오직 성안에는 김복한·홍 건·안병찬·이상린이 남아서 창의소 일을 관장하고 있었다.
거의한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홍 건과 이승우는 내외의 명망가의 호응이 없음을 초조히 여겨서 김복한을 힐문하였다.
한편 청양현감 정인희는 창의소를 본읍에 설치하고 포군(砲軍) 5백 명과 화포(火砲) 천 자루를 보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러나 홍주의진의 본부에는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보내 주지 못하였다.
12월 4일 김복한과 이 설이 성중 본부에 있는데 관찰사 이승우의 초청을 받았다.
수상하게 여겨 여러 사람이 구하려고 하는데 강호선(姜浩善)이 순검들을 데리고 와서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안병찬·이상린 등이 관문을 부수고 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 역시 체포당하였다.
이리하여 의진의 수뇌격 인사들이 차례로 구금되었다.
그후에 홍주의진의 기치 아래에 의거를 일으키고자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聖夏永)·남양부사(南陽府使) 남백희(南百熙)·대흥군수(大興郡守) 이창세(李昌世)·전 승지 김병억(金炳億)·정인희 등이 군사를 발동하여 홍주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돌아가 버렸다.
그 중에 정인희는 이웃 고을과 연합하여 관군과 접전하였으나 경무관 강호선에게 패하였다.
김복한은 체포되자 함께 수감된 안병찬에게
"일이 이미 실패되었으니 죽을 따름이다"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장례 및 후사까지 유언하였다.
그리고 절조 없는 이승우에게 기대하였던 자신을 자책하였다. 끝내 이승우도 경무관 강호선의 모함에 빠지고 말았다.
을미 홍주의병에 관련되어 체포된 23명중 6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즉 김복한을 위시하여 이 설·안병찬·송병직·이상린·홍 건 이었다. 이들은 1896년 2월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李範晋)에게 문초를 받았는데 김복한은 의병 일으킨 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복한은 대대로 녹을 먹은 집안으로 남달리 나라 은혜를 입었사오니 죽음을 맹서하고 나라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본래부터 축적된 것입니다.
갑오(甲午)년 6월 이후 시골에 엎드려 그대로 죽으려고 했던 것이온데 지난 8월에 큰 변을 보고서는 너무도 원통하고 더 살고 싶지 않은데다 다시 또 11월 15일 사건이 생겼으니 이것이 모두 흉역(凶逆)의 행위가 아닙니까.
임금님의 욕되심이 극도에 달하자 신자의 충정이 더욱 격하여 마침내 시국 형세와 자기 역량을 계산하지 않고 다만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어 보겠다는 목표 하에 의거를 제창했던 것이 온데.
모사가 치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경솔히 거사했다는 이유로써 죄를 주신다면 실로 달게 받겠으며, 본시 의리를 망각하고 당을 모아 변을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월 25일 김복한은 10년 유형을 선고받았다.
홍 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은 3년 유형 그리고 이 설은 곤장 80대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날 밤으로 고종은 이들의 충성심을 감안하여 모두 석방하고, 아울러 홍주의진에 관련되어 홍주성에 수감된 17인도 모두 석방하도록 특지(特旨)를 내렸다.
김복한은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짐을 꾸려 보령(保寧)산중으로 들어가 학도들과 강론하여 지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장(成均 長)에 제수되었으나

"…학식 없는 몸이 이 직책을 맡을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받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본다. 지금 의리가 없어지고 강상이 무너져서 원수놈도 아직 물리지 못했고 역적도 다 처벌되지 못했는데 만약 이때에 은혜를 느끼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명령을 받게 된다면 소신을 어김과 동시에 교화에 대한 죄가 어떠하겠는가.
은명(恩命)을 거역하는 것이 극히 불안스러움을 모르는 바 아니나 천성이 변할 수도 없고 소신을 굽힐 수도 없다…"

하여 사양하였다.
1897년에 다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각기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다.
그 해에 명성황후를 복위(復位)하고 예장(禮葬)을 시행하게 되자, 그의 족형인 판서 김종한(金宗漢)이 편지를 보내어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김복한은 퇴계(退溪)와 도암(陶庵)도 인산(因山)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군자들이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재의 정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들어 여전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의병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이 민종식(閔宗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크게 접전하다가 1906년 2월 23일 체포되었다.
앞서 이 설은 김복한이 신병으로 누워 있으므로 의거할 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이 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했다.
이일로 1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이후 안병찬과 함께 의거한 민종식은 홍주 방면으로 진출 유준근(柳濬根)·이 식(李 )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어서 1906년 4월 26일 홍주성에 입성하였으며, 만여 명의 연합의진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윤 4월 7일 일진회원의 내통으로 홍주성은 함락 당하고, 이어서 일제는 의병관계자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겨우 피신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민종식·이용규 등이 모두 체포당하였다.
김복한은 이들 민종식 등 홍주의진과 연루되었다 하여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의 관헌들에 의해 체포되어 11월 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여기에서는 일인 보조원 단우현태랑(丹羽賢太郞)의 문초를 받았다.
문초과정에서 단우는 오히려 김복한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겨 신병으로 고생하는 그를 위하여 편의를 봐 주고자 하였으나 여러 가지 방해가 있어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문초의 내용은 민종식과 을미의병과의 관계 등이었다.
그러나 만나고 싶어하던 만종식을 보지 못하여 한스럽게 여겼다.
결국 민종식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일제는 11월 26일 김복한을 석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풀려 나오면서 민종식에게 시 한 수를 부쳤다.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특사로 풀려났다.
1907년 10월 또다시 홍주의진의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10월 1일 안병찬 형제와 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인이 홍주에서 체포 구금되었다가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3일에는 김복한·박홍양(朴鴻陽)·이훈영(李薰榮)이 보령(保寧)에서 체포되어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김복한은 압송되던 길에 조현(槽峴)에 이르러 일인 순사에게 곤장으로 두들겨 맞고 또 총으로 위협 사격까지 받았다. 그들은 복한에게 군사를 주둔시켜 둔 곳을 대라고 위협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에 복한이 청양 서평(靑陽黍坪)의 명정진(明鼎鎭)의 집에 들렀을 때 강도 5, 6명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복한의 신분을 알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왜 창의를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여 '지모도 재물도 없어서 창의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니 '포군 천 명과 돈 만냥을 드릴 터이니 원수를 갚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던 일이 있었다.
이 일이 후에 누설되어 체포 선풍이 일게 된 것이다.
공주부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잘리우는데 경무관 황종복(黃鍾復)의 노력으로 면할 수 있었다.
온갖 수욕을 받다가 석방되어 돌아온 복한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어째서 해마다 횡액을 당하느냐
남에게 못지 않는 수구심(守舊心)때문이야
죽고 삶은 마침내 운명이 있어 병든 몸 간신히 공주를 벗어났네.

갖가지 치욕이 연전보다 더하거니 외로운 신하 산다는 것 부끄럽구려
깨끗이 몸 갖기도 쉽지 않으니
오히려 도연명이 부러워진다.
(年年橫逆問何因 守舊一心讓人
 覺死生終有命 殘骸收拾渡熊津
萬端危辱倍前年 只愧孤臣尙苟全
此時自靖非容易 却羨淵明臥葛天)

이러한 피를 토하는 충절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 야욕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심화되어 갔다.
그러한 마지막 고비에 안중근(安重根)의 의거를 보고, 홍주의거에 대한 반성인 듯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제갈량은 유씨를 돕고 장량은 한(韓)을 도와
고심한 대의는 불꽃같이 빛났으나 골짜기에서 불이 꺼지고 철퇴를 헛날렸으니
이 모두 하얼빈의 총알만도 못하였구나
(諸葛扶劉張報韓 苦心大義炳如丹
谷中火熄椎虛擲 總讓爾賓一砲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기려수필 43·234면
·매천야록 193면
·항일민족시집 2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3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257·258·259·260·261·263·264·265·266·267·274·275·278·279·280·282·283·284·299·300·301·302·303·304·305·306·81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335·336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20∼223면
 김충한 08-06-28 19:07   
김석동(金奭東,陳仁偉)
   1922. 1.17~1983.3.25 
   서울 
   광복군 
   애국장(90) 
 
  서울 충무로(忠武路) 출신이다.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의 손자로 1935년 2월 상해로 건너갔다.
1938년 1월 한국 광복진선(光復陣線)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선무공작활동을 하고 1940년 9월 광복군에 입대하여 제2지대 본부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6월에는 김 구 주석의 주선으로 인쇄기술을 습득하여 독립신문 중문판(中文版) 발행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5년 1월 임시정부 주석판공실(辦公室) 서기로 근무하다가, 제2지대에 전속, 동년 5월에는 OSS훈련단 정보파괴반을 수료하였으며 국내정진군 본부요원에 편성되어 국내진입을 꾀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613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315·405·495·501면
 김충한 08-06-28 19:19   
김연진(金淵鎭)
   1893. 3.12~1978. 5.23 
   충남 홍성 
   국내항일 
   애족장(93)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일찍이 북만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20년경 중국 봉천(奉天)에 밀파되어 만주·상해·국내간의 독립운동 연락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5년 12월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홍성에서 창립된 사상단체 무공회(無空會)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어 1926년 9월에는 역시 홍성에서 무산대중의 선구자가 될 것을 목표하여 윤기순(尹己順) 등과 함께 홍성청년회(洪城靑年會)를 재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홍성지방 청년 사상운동의 지도적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6년에 무공회가 인력거조합을 모체로 하여 조직한 홍성노동조합(洪城勞動組合)의 부(副)조합장으로 선임되어 노동자의 권익 옹호에도 앞장섰다.
1927년 8월 25일 신간회(新幹會) 홍성지회가 설립될 때 선전부 총무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28년 12월 말에는 서무부 총무간사로 전임되었다.
1929년 6월 28일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가 개최되었을 때 홍성구(洪城區)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동년 11월 24일의 신간회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충남지방 특파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등 반일민족통일전선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3월에는 신간회 홍성지회 서기장으로 일하다 일경에 강제 구인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단체행동보고서(1925. 12. 20, 1926. 10. 3)
·시야김종진선생전(이을규, 1963. 5. 20) 6·7면
·홍양사(全)(1969. 8. 15) 22·23·2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326면
·조선일보(1927. 8. 28, 1928. 12. 28, 1929. 6. 28, 7. 1, 7. 21, 8. 4, 8. 12, 8. 16, 1930. 3. 9, 12. 13)
 김충한 08-06-28 19:56   
김우진(金宇鎭,金宇震,金宇鐘)
  1890. 4.27~ 
  충남 홍성 
  임시정부 
  애국장(95) 
  이명:武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의 친족으로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참가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동년 4월 탄생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자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결정하는 기구인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3차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의정원법(臨時議政院法)을 통과시키는 등 1925년까지 약 7년간 임시정부 기본법의 기초 수립 활동과 함께 조국 광복에 필요한 각 부 위원의 인선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후원조직으로 결성된 대한청년동맹회(大韓靑年同盟會)의 후보감찰위원(候補監察委員)으로 선임된 그는 당시 상해 근교가 중국 내전으로 인해 혼란해지자, 상해 불란서 조계(租界)에 위치한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여 불란서 관헌의 조계 경비를 돕는 등 불란서와 원만한 관계를 맺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후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8월경 중국 북경(北京)으로 건너가 한인 학생들을 규합하여 학생회를 조직하고 조사부 위원으로서 새로 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편의를 제공하고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다가 일제의 요주의 인물로 선정되어 체포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61면
·요시찰인명부(국가보훈처) 250∼252면
·조선민족운동연감 8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42∼44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6·480·537·544·546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6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142면
 김충한 08-06-28 20:03   
김의한(金毅漢,載漢,毅煥)
   1900. 1. 8~1납북 
  서울 
   임시정부 
   독립장(90)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 기감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이전할 때 김구(金九) 등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그는 김구·안공근(安恭根)·이동녕(李東寧) 등과 애국단(愛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군관학교 분교(洛陽軍官學校 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의 비서와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중경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할 때 그는 이의 감찰위원회(監察委員會)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주계(主計)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에 선임되었으며 한편으로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註·朝鮮民族運動年鑑 225面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55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分冊 242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160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2卷 457·514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10·279·483·515·855面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768·772·827·857面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國會圖書館) 750·826面
·武裝獨立運動秘史 194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48·357·363·371·372·378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877·931·937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18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470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586面
 김충한 08-06-28 20:13   
김종진(金宗鎭,沈雄)
   1901.12.26~1931. 7.11 
   충남 홍성 
   신민부 
   애국장(90)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3월 7일 홍성(洪城)의 시위군중을 지휘하다가 주동자로 구속되어 수개월동안 옥고를 겪고 동년 6월에 미성년자라 하여 석방되었다. 그후 곧 상경하여 중동중학 속성과(中東中學速成科)에 학적을 두고 지하운동에 전념하다가 1920년 4월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여 형인 김연진(金淵鎭)과 같이 내외연락을 하던 중 국내로 무기를 반입하다가 홍경식(洪景植)이 체포되자 동년 가을 다시 북경(北京)으로 피신하였다.
북경에서 홍성 의병이었던 이세영(李世永)과 북로군정서 대표 조성환(曺成煥), 그리고 이회영(李會榮) 등 다수 동지들과 접촉하면서 내외정세를 관망하다가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신의 교육과 훈련의 필요성을 깨닫고 상해임시정부 법무총장(法務總長) 신규식(申圭植)을 찾아 그의 소개로 운남성 군관학교교도대(雲南省軍官學校敎導隊)에 입대하였다.
그후 교도대 2년, 군관학교 2년반의 교육과정을 밟고 무인으로서의 실력은 물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지식을 고루 갖추고 1925년 9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후 곧 상해로 돌아왔는데 이때 독립운동진영은 급변하여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3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는 그중 무정부주의자들과 의기가 상통하였으며, 실제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북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1926년 봄에 남경(南京)·한구(漢口)·무창(武昌)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규합에 나섰다. 1927년 10월에 북만으로 가 신민부(新民府)의 지도자이며 족형(族兄)인 김좌진을 방문하였다.
김좌진으로부터 북만의 제반사정을 들은 그는 각 지방의 실정과 적정(賊情)을 살피기 위하여 중동길돈연선(中東吉敦沿線)과 장백(長白)·무송(撫松) 등 일대를 시찰한 뒤 1928년 8월 김좌진에게 전운동조직의 개편과 재훈련, 교민에게 항일반공계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과 아울러 교포와 독립군과의 단결이 긴요함을 건의하였다.
1929년 7월에는 사상계몽단체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었으며, 김좌진의 위탁으로 신민부의 개편정비작업에 착수하였다.
동년 8월에는 교민의 자치단체로서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고 일체 조직을 일원화하여 그 조직부 위원장 겸 농무부 위원장에 취임한 후 사상계몽과 적색분자제거, 농민의 집단정착 및 민심의 안정에 주력하였으며, 동년 12월 10일에는 북만 해림(海林)에서 교포자제의 자주 자립정신을 배양하기 위한 민립중학기성회(民立中學期成會)를 전명원(全明源, 일명 李乙奎)·김야운(金野雲)·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창설하였는데 그 집행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봄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대표대회에 북만대표로 참석하여 북만한족총연합회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케 하였으며, 그 결과 동년 말에 다수 동지가 입만(入滿)하여 민중운동이 크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크게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31년 7월 11일 중동선해림역(中東線海林驛)교외로 그를 납치하여 살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8면
·시야 김종진(이을규) 4∼24, 31∼49, 50∼64, 77∼11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3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517·526·582·62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16면
 김충한 08-06-28 20:26   
김좌진(金佐鎭)
  1889.11.24~1930.1.24 
  충남 홍성 
  북로군정서 
  중국 길림성 
  대한민국장(62)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무관학교(大韓帝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산을 팔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고 지방 청년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켰다.
1907년 다시 상경하여 노백린(盧伯麟)·윤치성(尹致晟)등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중의 계몽에 노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지방에 있는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하였다.
1908년에는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지내고 청년학우회원(靑年學友會員) 및 한성신보(漢城新報)이사로서 민족정신의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였을 때에는 이창양행(怡昌洋行)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로 삼는 한편 남북만주와 연락하는 비밀기관으로 하였다.
1915년에는 노백린·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박성태(朴性泰)·기명섭(奇明燮)·김홍두(金弘斗)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가하여 국내 각지를 통하여 항일운동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西大門)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7년 출옥하자 일경들은 또다시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초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서 일(徐一)·여 준(呂準)·정 신(鄭信)·유동열(柳東說)·신팔균(申八均) 등 38인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하였으며, 동년 8월 7일에는 서 일·현천묵(玄天默)·계 화(桂和)·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圭植)·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정 신·김찬수(金燦洙)·박두희(朴斗熙)·홍충희(洪忠熹)·이홍해(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 성(金星) 등과 함께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하고 그는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겸 간북총판국(墾北總辦局) 재무참사(財務參事)로 일하였다.
그후 동년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고 개칭하고 진용을 정비할 때에 총사령관으로서 총재 서 일을 보필하는 한편, 왕청현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400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1920년에는 제1차 세게대전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대의 특별한 호의로 동북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노령해삼위(露領海蔘威)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많은 군자금과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육군성(陸軍省)은 중국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다가 남하하는 일본군 제19사단과 나남(羅南) 제20사단에 명령하여 북로군정서를 협공하게 하였다.
이에 그는 장백산(長白山)중으로 들어가서 좀더 독립군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 청산리(靑山里)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3대대가 무산(茂山)으로부터 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곧 임전태세를 갖추어 10월 18일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전방 삼림속 유리한 전투지점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의 내습을 대기하고 편의대(便衣隊)로 하여금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한편 적진 부근의 교포를 시켜 독립군의 병력은 미약하고 투지가 없다는 정보를 흘려 적으로 하여금 독립군을 경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독립군을 2개중대로 편성하여 제1중대는 그가 직접 지휘하고 제2중대는 연성대장(鍊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병력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을 듣고 동월 20일 의기양양하게 청산리를 3면으로 포위하고 기병대 일부를 가지고 대담하게 아무 저항도 받지않고 백운평 삼림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그는 주도면밀한 작전지휘로 백운평 전방에 매복한 독립군에게 일제 사격을 명령하여 적의 전위부대를 전멸시켰으며 계속적인 전투를 통하여 일본군 가납(加納) 연대장을 비롯하여 3,300여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소수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군을 물리친 전사상(戰史上) 보기 드문 대승리였다.
그는 이곳 주민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인솔하고 밀산(密山)으로 이동, 밀산에 집결한 10개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전 독립군을 인솔하고 노령(露領) 이만으로 건너갔다가 뒤에 자유시(自由市)로 다시 이동했으며 1922년에는 소련당국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후 북만주 영안(寧安)으로 탈출하여 1925년 3월 15일에는 김 혁(金赫)·최 호(崔灝)·나중소(羅仲昭)·조성환·박성태·유정근(柳正根)·허 빈(許斌)·정 신·이일세(李一世) 등과 함께 전 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군사부 위원장겸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부교장으로서 교장 김 혁 등과 아울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동년 10월 10일에는 상해(上海)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그를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계속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며 대일 항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신민부 본부가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 혁 이하 12명의 간부가 체포되니, 그는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할하는 한편 중국구국군사령관(中國救國軍司令官) 양우일(楊宇一)과 회담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취하기로 합의하고 동년 8월에 중국 국민당 동삼성공작책임자 공패성(貢沛誠)·장령(將領) 악유준(岳維峻)·사가헌(史可軒) 등과 회동하여 한·중 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하고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제의 압력을 받은 장작림(張作霖)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 등을 체포하고 탄압함으로써 좌절되었다.
1928년에는 참의부(參議府)·신민부·정의부(正義府)의 3개 단체통합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나 각 단체의 이해 관계로 실패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만을 구성하였다.
1929년에는 정 신·민 무(閔武)·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유운초(劉雲樵)·한규범(韓奎範)·이종주(李鍾柱)·조각산(趙覺山)·이 달(李達) 등과 함께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主席)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영안현 일대의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정미소를 설치하고 동년(음) 12월 25일 정미소에서 작업을 하던 중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종전의 부하이며 일제 고등경찰에게 포섭되었던 김일성(金一星)의 교사를 받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청년회원이며 재중청년동맹원(在中靑年同盟員)인 박상실(朴尙實)이 등뒤에서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할 일이……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그게 한스러워서……"이 민족의 큰 별이던 그는 이 뼈아픈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분하고도 원통한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51·460·465·486·962·966·968·1028·1049·1050·1052·1053·1055·1056·1059·1063·1078∼1083·108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67·170·251·317∼320·322·328·339·369·382·383·396·402·403·498·504·508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92·274·275·308·310·313·314·319∼325·327·392·435·438·463·477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3면
·기려수필 316∼319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2·73·80·83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07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6·157·276·298·338·546·652·693면
·무장독립운동비사 55·78·79·80·86·98·99·100·106·107·108·111·112·139·147·151·156·191면
·조선민족운동년감 92·93·115·117·203·206·215면
·고등경찰요사 113·114·117·120·121·125·127·175·205면
·북만신민부(임강)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38·694·74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4·322·72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8·34·181·187·364·368·409·451·62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1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58·54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74·778·77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70·82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73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1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53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30면
 김충한 08-06-28 23:44   
김택진(金澤鎭)
 1874. 2.16~1961. 8.16 
 경북 영주 
 3.1운동 
 애족장(95) 
 경북 영주(榮州)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되면서 발각되었고, 이로써 김택진도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후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榮州支會)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48면
·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 257면
·벽옹김창숙일대기(심산사업회) 9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935면
·조선일보(1927. 12. 20)
 김충한 08-06-28 23:51   
김항규(金恒圭)
 1881.11.11~1948.12.13 
 서울 
 국내항일 
 건국포장(93) 
 서울 사람이다.
1927년 2월 홍명희(洪命熹)·안재홍(安在鴻) 등은 민족협동단일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발족시킨 뒤, 이미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서울청년회계(系)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체적 성격을 띠고서 1926년 7월에 발족해 있던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측과의 합동 교섭을 개시하여, 민흥회측이 신간회로 합류한다는 합의를 얻어내고 성공적인 합동을 기하게 되었다.
이때 민흥회측 대표 5인 중의 1인이던 그는 신간회로 합류한 뒤 1927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의 서무부 총무간사로, 1929년 7월 중앙상무위원과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 12월 그는 신간회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옹호, 지원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개최키로 결정하여 행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던 중 일경의 사전 검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1930년 11월 신간회 제4회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서기장(書記長) 겸 서무부장에 임명되어 1931년 2월에 신간회가 해소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간회 해소론을 반대하고 조직을 보위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585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63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57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76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301·313·34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3집 103면
·동아일보(1927.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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