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03 17:01:53 조회 : 1511         
역사속의 오김의 위상과 업적 이름 : 관리자

< 역사속의 吾金 위상과 업적>

Ⅰ. 머리말

人多 안동은 천년의 역사와 더불어 吾金의 터전이다.

世人들은 안동의 발전과 선현(先賢)의 배출(輩出)은 산천정기(山川精氣)로서 위대한 인물(人物)이 나온다고 했다 즉 太白山과 一月山 그리고 葛蘿山이 집중(集中)한 끝자락에 동강북강(東江北江)이 합수된 원심유장(遠深流長)한 낙동 강수는 굽이굽이 흐르는 풍광(風光)이 수려한 안동에서 시조 태사공의 고려 통일에 빛나는 외훈대덕과 더불어 영호루의 설화를 싣고 서쪽으로 흘러 흘러 밀양 영남루의 시인묵객(詩人墨客)을 흘겨보고 진주 촉석루지의 임진전적을 상기하면서 태평양으로 흘러가니 경북의 혼이요 영남의 젖줄이 아닐 수 없다.

시조의 통합삼한(統合三韓)의 대공(大功) 대덕으로 인하여 조선조에 이르러 역연명현달사(亦然名賢達士)가 다수 배출되었으며 왜구침략(倭寇侵略) 반세기에도 항일독립지사가 역시 안동은 전국에서 굴지(屈指)할 정도로 배출(輩出) 되었다.

시조 태사공의 후삼국 통일의 대덕을 영원히 받들어 이 땅위에 저성대족(著姓大族)으로 유구천년 살아가며 민족문화(暢達)에도 기여하는 명예로운 겨레의 씨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Ⅱ. 시조 태사공의 업적과 위상제고

1. 시조 태사공

시조 태사공은 신라종성(新羅宗姓)이며 휘자(諱字)는 宣字, 平字이시다. 신라 효공왕(孝恭王) 5년 (서기 901) 흥덕궁(興德宮)에서 태어나셨다. 공(公)은 봉(鳳)의 눈과 용(龍)의 수염, 별의 정기(精氣)와 호랑이의 위엄(威嚴)을 갖추셨다.

(봉안용수:鳳眼龍鬚, 성저호위:星精虎威)

춘추(春秋) 26歲에 古昌(지금 安東)의 성주였다면 必是 眞骨(진골)이였을 것이니 孝恭王의 왕자로 比定된다.

2. 시조 태사공과 병산대첩(甁山大捷)

○ 신라 말 귀족의 왕위 쟁탈로 왕권(王權)이 약화되자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의 영토를 쟁취(爭取)하기 시작했다.

○ 후백제 견훤은 신라의 여러 성을 쟁취(爭取)하고 929년 고창군(告昌郡)을 침략 하려고 석산(와룡면 서지 절골 앞산)에 진을 치고 927년 동수(桐수:팔공산)

싸움에서 크게 패한 고려 왕건(王建)군은 군사를 정비하여 병산(甁山):와룡면 서지 절골 뒷산에 대치하니 그 거리가 500보 정도였다.

○ 이때 고창 고을 민의 정서와 고창(高昌) 성주(城主)의 향배(向背)에 따라 승패 가 좌우되는 시점인데 고창성주와 고을 민들은 왕건을 돕기로 협의하고 930년 고려를 도와 협공(挾攻)하자 견훤군은 군사8000명을 잃은 후 패하고 도주하였다.

3. 병산전첩(甁山戰捷)의 의의(意義)

첫째 이 전쟁(戰爭)의 승리(勝利)로 삼한(三韓)에서 고려군(高麗軍)의 우위(優位)를 확인(確認)시켜준 계기(契機)가 되었다. 高麗太祖王建은 이미 이戰勝의 가치(價値)를 인정하고, 전쟁이 있은 뒤 5일만에 正月庚寅日에 古昌城主인 우리시조 김선평(金宣平)에게 大匡을, 權行에게는 大相, 張吉에게도 大相 벼슬을 내렸다. 高麗建國이래 귀순귀부(歸順歸附)해온 자들에게 내린 향품직(鄕品職)을 보면 太祖 6年 11月 眞寶城主洪術의 아들이 와서 귀부(歸附)하였을 때 그에게 元尹 正六品을 내렸고 태조 13년 8월 丙午에 우능도(宇陵島)에서 사자(使者)로 온 백길(白吉)에게 정위 (종팔품) 토두(土豆)에게는 정조(정칠품)를 내렸을 뿐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상황(狀況)으로 보아 甁山戰功者에 내린 官職은 바로 그 戰爭의 意義가 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병산대첩은 고창(古昌)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고려 통일의 계기를 만든 역사적 의의가 크다

동사찬요(東史簒要)와 고려사(高麗史)등에서 다음과 같이 사기초약(事記抄略) 기록되어있다.

「新羅敬順王四年 麗王次 古昌郡之 甁山 與萱軍戰 萱敗走 獲侍郞金渥 處者八阡餘人以古昌城主金宣平爲 大匡 權幸張吉爲 大相 陞郡爲 安東府 時安東州郡 百十餘 皆降高麗」

신라 경순왕 4년 고려왕이 고창군 병산에서 견훤군과 더불어 싸웠는데 훤군이 패주하고 시랑(부관) 김악을 생포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훤군 8000여명이 처형되는 전과를 올렸다. 군인 고창성주 김선평은 대광(정2품)을 배하고 권행, 장길에게는 대상(정4품)을 배하였다. 이로 인하여 군을 부로 승격하고 주위 일 백십여 군이 고려에 귀순하였다.(이로 인하여 영안(현풍산), 하곡(현임하), 직명(현일직), 송생(현청송) 등 30여 군이 고려에 귀순, 나아가 동해안 110여군이 귀순(명주(강릉) - 연해주(울산)까지)

4. 안동정신이 민족사에 끼친 영향

○ 병산대첩의 결과 고려태조 왕건은 동국을 안전하게 했다하여 안동이라고 칭하 고 三公의 대덕(大德), 대공(大功)을 기념하여 地主菅으로 하여금 사계절 그 뜻을 향(享)하게 하였다.(지금은 춘추중정일(中丁日)

○ 고창전투의 결과 고려 통일정부를 세우고 이로 인하여 조선조에 이르려 역연 명현달사(亦然名賢達士)가 다수 배출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양성에 안동이 선 구이였다고 보며 왜구침략반세기에도 항일 독립지사가 역시 안동은 진국에 굴 지(屈指)할 정도를 배출하였다.

○ 삼태사 정신이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과 세계역사도시 등록선정에 근간이 되 었다고 본다.

○ 안동삼태사 정신이 삼한통합(三韓統合)과 민족통일의 계기를 만듬.

(930년 안동에서 왕건의 승리는 통일을 향한 전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 고 왕건이 936년 마지막승리에 결정적 계기가 됨)

○ 공민왕의 안동 뭉진(고려수도 2개월)에 삼태사 정신과 얽힌 이야기

- 삼한 통일 후 수도 개경엔 4대 문중 안동 문이 있었으며 군신이 출장 출입 시 안전한 안동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 안동은 몇 가지 이유에서 왕의 피난처로 선택되었다. 먼저 이 지역은 중앙정부 에 잘 알려져 있는 곳으로 안동이 고려 태조인 왕건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야기가 왕실에 전설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고려 왕실에 안동인 많았음)

☆ 안동인의 충정심에 보답 공민왕 - 안동대도호부로 승격

○ 시조 태사공의 공적에 얽힌 무형문화재로

-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 24호 차전놀이

- 지방 무형문화재 제 7호 놋다리 밟기

5. 시조 태사공의 위상제고

- 고려 태조 왕건은 시조 태사공을 고려 통일의 계기를 만든 공으로 개국창업공신 2등 2인자로 녹공하고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보공신(三韓壁上 三重大匡 亞父功臣)의 직위를 제수하여 이어 태사에 오르게 하였다.

- 역대 왕조 문무요인 일람표(대한충효사상현창회, 한국명헌유적)에 시조 태사공이고려 태조 시 문무요인으로 선정 14명 중 한사람으로 등재되어 있다.

< 고려 문무 요인 일람표>

시 대

성명 및 직명

성명 및 직명

太 祖

김 행 도 ( 광평시중 )

송 함 홍 ( 대 상 )

구 진 ( 시 중 )

김 선 평 ( 대 광 )

공 직 ( 대 신 )

염 상 ( 대 상 )

공 헌 ( 대 상 )

홍 유 ( 대 상 )

배 현 경 ( 대 광 )

왕 염 ( 대 광 )

유 금 필 ( 대 광 )

박 술 희 ( 대 광 )

왕 식 염 ( 대 광 )

박 수 문 ( 대 광 )

고려 마지막 공양왕시

심덕부(문하시중), 정몽주(문하수시중), 배극염(수시중)

조선 태조 시

김사형(좌의정), 정도진(영의정), 조 준(좌의정)

- 시조 태사공의 애민 애향 애국정신이 유서 깊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으로 발돋음 하는데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 안동 문화권(安東文化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Ⅲ. 시조 이후 안동김씨 위상과 업적

李朝등극이래 고려 문물제도와 고려 功臣을 여지없이 유린(蹂躪)하지 않았던가

세종 27년(1445년)고려사와 사조보감(四朝寶鑑)을 왕명을 받아 편저할 때 고려 공신과 자손들에게 화(禍)가 미칠가 소약등재(踈若登載)되었다고 思料되지만 고려시대 전반에 명현대가의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이에 역사속의 안동김씨 업적과 위상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조선조에서부터 접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한(仁漢) 첨종(僉宗)이 편찬한 고창비고 기사(記事)에서 고려 통일공신 시조 태사공을 위시하여 忠義巨鄕이야말로 양조(兩朝)에 걸쳐 상신(相臣)十五人 예원록 왕비三人 判書三十五人 충신절사(忠臣節死)十二人 충신정여(忠臣旌閭)五人 창의지사(倡義志士)백여인(白餘人) 효행(孝行)五十餘人 부조지전(不祧之典)十四人 전문형대제학(典文衡大提學)七人 시호(諡號)五十餘人 서화명필시인二十三人외 수천인은 기약(記略)하고 근세 민족적 선각인 개화당 영수 고균(古筠)선생과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에 유명한 백야장군(白冶將軍)의 항일(抗日) 지사는 풍운백년사(風雲白年史)에 수(繡)놓을 것이다.

본고는 조선시대 역사 속에서 주요 인물을 대상으로 그 행적을 영역별로 개관하고 위상과 업적을 요약하기로 한다.

1.청백(淸白)과 충절(忠節)의 안동김씨

○ 안동김문에서 淸白家風의 기초를 놓은 인물 보백당김계행과 그의 종손인 三塘 金瑛 (鄕派)

〇선원과 청음의 부친인 김극효(1542-1618) 선대부터 내려온 가문의 덕업이 근식 (謹飾)과 간소(簡素)라고 정리하고 관직은 반드시 높을 필요가 없으며 벼슬이 끊 이지 않는 착한 선비가 되는 것이 좋다고 교훈하였다.(京派)

☆ 청맥의 가풍이 면면히 世德으로 이어지면서 安東金門이 오래도록 명가의 명예를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안동김문의 忠絶

-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 : (대명외교의 실무자, 병자호란시 순절과 척화활동, 척화주전론)

☆ 正祖代 安東金門의 出仕와 戚臣化

○ 정조즉위 후 시파와 벽파간의 의리탕평책(義理蕩平策)을 모색하고 정조의 이상 과 안동김문의 재사(才士)들이 힘을 합쳐 왕조의 근대화를 실현하려했다.

청백과 절의의 기준에서 金祖淳의 딸을 순조 세자빈으로 간택하고 喬木世臣의 명가인 안동김문을 척신으로 키워 왕실의 안정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정조의 꿈을 실현되지 않고 49세에 타개하게 되니 순조가 12세에 왕위에 오르면서 어린 임금을 보필할 세도가의 등장은 필연적이였고 그 역할을 척신인 안동김문이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헌종비와 철종비가 연속적으로 안동김문에서 나오면서 안동김문은 이제 척신과 세도가(勢道家)의 대명사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지금학계에서는 세도정치가의 안동김문만을 보지 않고 조선후기의 대표적 명문가로서 안동김문을 새롭게 조명하는 학자들이 배출되고 있어서 앞으로 한충 균형 잡힌 시각이 세워질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조 세도정치의 시작과 의미

조선시대 세도정치 형태를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이 세도정치를 하기 전에 세도(世道) 는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世道」곧 치세지대도(治世之大道)를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이라는 말로 世道人心을 바로 잡으려는 사상적 도의적 일면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 덕망을 가진 사람을 천거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

중종 때의 조광조(造 光祖)와 효종 현종 때의 송시열(宋時烈)이 바로 그 예에 속한다.

- 홍국영의 勢道政治는 왕을 보좌하기 보다는 왕으로부터 권력의 행사를 위임받 아 권세를 부리는 정치 형태로 변질되었다.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반대파(정후겸, 홍인한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공으로 정사의 결재 권한을 위임받았다.

(도승지와 금위대장에 임명)

그의 勢道는 부정과 부패 때문에 불과 4년 만에 추방당하고 그야말로 世道가 아닌 勢道정치는 홍영국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홍국영 이후 조선조 세도정치의 적신화 과정

정조가 죽고 순조가 12세에 즉위하자 전왕 정조의 유탁(遺託)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이듬해 그의 딸을 순조비 순원왕후로 삼게 된다. 따라서 안동김씨 외척이 세도 기틀을 잡고 중앙요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안동김씨 척신화에 문제점을 느낀 순조는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익종비로 삼고 풍양조시 세도정치가 잠시(4년간)성립된다.

다시 헌종비, 철종비가 안동 김씨에서 연속으로 배출됨에 안동김문은 척신가 세도가의 대명사로 호칭 받게 되었다.

이후 흥성대원군이 등장하게 되어 독재정치가 진행되다가 민비에 의해 추방되고 세도정치(勢道政治)는 민씨 시해까지 민씨 일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2. 학문과 사상에서 본 안동김씨

특히 김상헌의 계열은 문학과 아울러 도학에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김리안으로 이어지는 학풍은 주자학에 정점에 서 있었다. 김상헌 계열은 「주자 대전 차이」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특히 김창협은 인물성 논쟁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교육에서도 석실서원을 통해 강학활동을 하였고 자신들의 이념을 확산시켰다.

또한 김상헌의 존주론과 배청존명론의 핵심은 「소학」공부에서 나오는 것이다.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척화파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주자학적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한 실천력때문이었다.

3. 정치사적 맥락 속에 안동김씨

정치적 거목으로 선원(仙源) 김상용(명종시 우의정)과 청음(淸陰) 김상헌은 척화신(斥和臣)의 대표로 인조 시 좌의정으로 강직한 정치가이다.

1640년(인조 18년) 淸의 용골대에 의해 심양으로 잡혀 갔고 그의 심문에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다.

이에 용골대도 혀를 차며 칭찬했다고 한다.

근대 현대사에도 김수한, 김두한 등 많은 오김 정치가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배출되고 있다.

4.독립운동과 애국활동의 안동김씨(겨레위해 살다간 큰 인물)

독립운동의 시기적 범주는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이다. 그 뒤를 이어 계명운동 3.1만세 시위, 독립전쟁과 의병투쟁, 사회운동과 문화운동 둥이 줄을 잇는데 중심 인물을 개략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의병항쟁, 파리장서와 김 복한(金福漢)

○ 자정순국과 김 석진(金석鎭)

○ 대동단, 임시정부와 김 가진(金嘉鎭)

○ 계몽운동, 독립전쟁과 김 좌진(金佐鎭)

○ 의열 투쟁과 김시현(金時現)

○ 무정부주의 투쟁과 김 종진(金宗鎭)

5. 예술과 문화종교세계의 안동 김씨

강원대 황재국(黃在國)교수의 원고에서 역대 안동김씨의 서예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적옹(積翁) 김영수(金永銖) 세종 28년 - 연산군 8년, 휴암(休菴) 김상준(金商寯) 명종16 - 인조13,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 (1923~1992)외 46인이상 많은 작가가 배출되었다.

○ 생존 작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외 6인으로 이 분들의 서예의 장점은 높은 학문의 온축과 절개에서 우러나온 문기(文氣)가 서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학조의 위상과 업적이 민족사에 끼진 영항

① 풍수지리학의 도통과 명당이야기

- 옥호저수형의 명당(玉壺貯水形明堂)의 형국이라 하여 세간에 높이 평가된 석실 서윤공 묘소에 얽힌 이야기로 등곡대사께서 조카 서윤공의 후손이 잘 되고 번 영하며 산소를 드리면 옥관자(玉貫子)서말의 발복예언 하였다.

(본래 이 터는 서윤공 처가인 남양 홍씨댁의 방앗간 자리)

② 보백당과 학조대사 이야기

☆ 학조대사의 연보 및 불교문화적 업적 요약

세조조 국사(國師), 호는 등곡(燈谷)황악산인(黃岳山人), 세조 때 고승들과 함께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간행했다. 1464년(세조10년)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왕을 모시고 대 법회를 열었다.

1487(성종18년) 정희왕후의 명으로 해인사 대장경판당을 중창했으며, 연산군때 신비(愼妃)의 명을 받아 대장경 3부를 간인(刊引)하고 그 발문(跋文)을 썻으며 1520년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 1부를 간인하였다.

○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 복천암에 학조 등곡 화상탑(福泉菴學祖橙和尙塔)

충북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 복천암에 있으며 지방문화재 보물 14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그의 시 한수

김병연 金炳淵 1807(순조 7) ~ 1863(철종 14) 조선 철종 때인 방랑시인.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경기도 양주(楊州)출신.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조부 익순 (益淳)이 홍경래에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되고, 가문의 벼슬길이 막히자 전국을 방랑하며 젊어서부터 재치 있는 시구(時句)로써 세상을 풍자했다. 아들로부터 수차의 귀가를 권유받았으나 방랑을 계속,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객사(客死), 강원도 영월에 묻혔다. 방랑 생활을 하며 도처에 해학과 풍자가 담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서당을 욕하다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書堂乃早知 서당은 내조지인데

房中皆尊物 방중은 개존물이라

生徒諸未十 생도는 제미십인데

先生來不謁 선생은 내불알이라

서당 이란 덴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방안엔 모두 잘난척하는 놈 뿐이네.

생도는 죄다 열 명도 채 안되는데

선생이란건 나와서 볼 생각도 않네.

※ 어느 겨울날 추위를 피하려고 어떤 서당을 찾았더니 선생은 없고 학동들은 공부는 커녕 떠들어대며 장난만 치고 있었다. 덮어 놓고 들어가 삿갓을 쓴 채 윗목에 쭈구리고 앉았노라니 남루한 몰골을 보고 걸인 취급하여 쑥덕쑥덕 욕지거리를 놀어놓는 것. 게다가 선생 좀 보자 해도 얼굴도 내밀지 않는다. 학동들 행동보니 선생이란 것도 가히 알만하구나 생각하면서 시 한수를 지어 놓고 그곳을 떠났다. 고약한 서당 풍속이라고 호되게 욕을 퍼부어놓은 것이다. 그냥 읽어보아서는 별 것 아닌 글 같지만 발음상으로는 지독한 욕이 된다.

Ⅳ. 맺는 말

人多 안동은 신라 원년(元年) 염상도사(念尙道師)가 길지(吉地)를 찾아 안동에 와서 창녕국(昌寧國)을 초립(初立)한 곳으로 민족사적 유서 깊은 고장이자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안동」이다.

시조 태사공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이지심은 안동을 유서 깊은 도시로 오늘날 안동 정신문화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나아가서 삼한통합(三韓統合)과 고려 통일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시조 태사공의 위상과 업적으로 천년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저성대족(著姓大族)의 명가로 발돋음 하는 과정에서 역사 속에 우리 오김은 청백과 충절, 학문과 사상, 조선정치사적 맥락, 독립운동과 애국 활동 예술과 문화발전 전 영역에 국가 민족을 위하여 혁혁한 위상과 공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가문의 명예를 널리 선양(宣揚)할 뿐 아니라 선조들의 위업과 유지를 받들어 그 뜻을 추숭(追崇)하고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명예로운 겨레의 명문 씨족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제언 : 안동 선(善), 후(後) 김씨의 관향(貫鄕)에 대한 소고(溯考)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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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안동 김씨 소산종회(김기년) 「국역, 삼구정판상시문집」, 혁신출판사, 2002.

16. 김명한 「안동차전」, 안동차전놀이 보급회,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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