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7-18 21:55:10 조회 : 5065         
잊었던 찬연한 先祖의 偉業을 찾아서... 이름 : 관리자


『잊었던 찬연한 先祖의 偉業을 찾아서...』


          安東市長 金暉東


 역사에 길이 빛나는 太師公 始祖를 가까이 모실 수 있도록 所任을 맡겨주신  全國의 賢宗諸位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10여년전 ○○嶺에 한 安東府使의 비석이 있다는 지나가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늘 의구심을 가져오다가 지난 2월 안동시청 학예연구사를 동원 죽령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2004년 2월 문경세제 관문을 지나 제 2관문 못 미쳐서 고 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수근추사탄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탄淚碑 : 돌아가신 옛 안동부사 정문공 수근을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세운 비)를 발견하였다는 보고와 함께 주인공이 안동 김씨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3월 26일 현장을 순방한 결과 아주 놀랍고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碑石과 碑閣의 保護石柱가 웅장하고 원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경세제 관광객이 다니는 길옆에 완연한 자태로서 있었으나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고, 관심 밖에 있었으니 부끄러움과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준비한 祭需로 잔을 올리고 揖禮를 마치자 마침 자전거를 타고 가던 75세 정도의 할아버지가 발길을 멈추고 비석의 사연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래 보기 드물 정도로 비각이 웅장하였으나 6․25 동란시 비각이 소실되고 총탄을 맞은 비석과 비석주(기둥)만 남아있고 어느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신들은 무었때문에 왔느냐”고 묻기에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간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게 된 의의와 경위, 연혁, 내용과 원문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 安東府使 金洙根 追思墮淚碑 調査結果


□ 그 간의 調査經緯
  ○ 2004. 2. : 안동시장 현지 조사 지시
  ○ 2004. 3. : 학예연구담당(박장영) 현지조사
  ○ 2004. 3. : 확대간부회의시 조사 지시
  ○ 2004. 3.26 : 안동시장 현지 답사

□ 建立意義
  ○ 안동대도호부사로 봉직한 김수근의 공적이 다대하여 후세 사람들이 추모하고 있으므로,  
  ○ 문경 조령성 교구정터 옆에 건립하여 그 뜻을 기리고 공적을 널리 알려서 후세에 잊혀지지
      않도록 은덕과 공적이 영원토록 이어 지기를 기원함

□ 建立經緯
  ○ 선생 사후, 그 공덕과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안동부 36방의 선비와 백성들이 뜻을 모음
  ○ 퇴계선생 이후 안동부엔 공덕비 건립이 없어 부에는 세우지 않음에 따라 한양과 안동의
      길목인 문경새재 교구정 옆을 선정
   ○ 영남 각 고을 수령들과 많은 백성들이 다니는 관문에 세움으로써, 귀감으로 삼게 하여
        선생의 공덕을 널리 알리고자 함.

□ 人物沿革

  ○ 김수근(金洙根, 1798~1854)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회부(晦 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憔老), 시호가 정문(正文). 목사 응순의 아들, 1834년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 헌종 1년(1835)규장각 대교, 1837년 대사성, 1838년에 안동부사 부임, 1839년 안동부사 이임,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 1847년 충청도관찰사, 철종 1년(1850) 이조참판, 동년 공조판서, 1851년 우참찬과 대사헌, 1852년 홍문관대제학,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와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 
  ○ 동생 문근(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 院君)임. 철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됨. 저서로는『삼연선생연보(三淵先生年譜)』가 있음.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안으로 선생의 아들 병학과 병국은 정승에 오름.


□ 碑石 建立年代 및 內容
  ○ 건립연대 : 함풍(咸豊) 5년(1855)
  ○ 규    격  
    ∙ 비신 높이 143cm, 가로 55cm, 세로 30cm
    ∙ 비부 높이 48cm,  가로 108cm, 세로 55cm
  ○ 비석상태 : 비문 일부훼손, 한국전쟁 때 발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총상 흔적이 남아 있음.
  ○ 비문찬자 : 조봉대부 의금부도사   柳祈睦 
  ○ 비문근서 : 통훈대부 홍문관부응교 金鎭衡

□ 타루비(墮淚碑) 란?
   타루비란 진(晋)나라 때 양양사람들이 양고의 비(碑)를 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으므로 고사(故事)에서 타루비라 하였다. 양고라는 사람은 양양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원근 사람들에게 선정한 인물이다. 그가 오(吳)나라를 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양사람들은 저자를 파하고 길거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방하여 선조 36년에 영(營)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여수에 타루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을 사모했다.

 이 비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재직시 주휼(周恤) 선정하여 안동의 38방 소민(小民)들이 1855(철종5)년에 세운 비이다. 김수근은 1798(정조22)년에 태어나 1854(철종5)년에 졸한 헌종 때의 중신이다. 자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계산초노(溪山樵老)이며 시호는 정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목사 인순(麟淳)의 아들이며 철종의 장인 문근(汶根)의 형이다. 김수근은 진사가 되어 문벌로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3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사후에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병국(炳國)․병학(炳學)은 재상이 되었고 동생 문근은 영은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연보(三淵年譜)가 있다.

  

 ○ 내용요약
   ∙ 선생의 공적이 지대히 커서 그 공을 기리고자 안동부의 36방 소민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웁니다.
   ∙ 을해년에 선생이 안동부에 부임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교육에 힘쓰며 삼정을 바로 잡아 부내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였습니다.
   ∙ 선생의 큰 덕과 높은 명망은 당세의 으뜸이요,조야에 현저했도다. 그것을 장차 彛鼎(주나라
     때의 솥인데 鼎名이라 金言人物을 새겨 경계를 삼음) 새기고 簡冊에 빛나게 했어나 하나 감히
     비석으로 감당하고자 합니다.
   ∙ 선생의 은덕을 높이기 위하여 영남 각 고을 수령이 모이는 이곳 문경관문에 세우고 씁니다.
     영남 각 고을의 수령은 선생을 본받아 치정에 시행한다면 비석의 도움이 크지 아니할까
     합니다.

□ 文化財 指定計劃
  ○ 문화재 지정은 소재지 관할 행정기관에서 고증과 사료 조사에 의하여도 및 문화재청에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어
  ○ 문경시에 본 건에 대하여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임을통보하여 문화재로 신청
     되도록 협조하였음.

※ 頌德碑 原文과 번역문 :

♦ 고 안동부사 김상국 정문공 수근 추사 타루비 ♦

(故 安東府使 金相國 正文公 洙根 追思 墮淚碑)



解譯(草)


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전면 대자)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燒 黃 思浹 白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oo平 不洙者德(贊銘:기리는 말)

公去十六年歿 越明 本府38坊小民等立 咸豊5년9월 舊民朝奉大夫義禁府郡事 柳祈睦 謹識.통훈대부行홍문관부응교 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 謹書.(記事,幷序)

助役頭民府四面都有司 김맹윤

內外東先風憲 池千興 內外東後面任 千以範 남선면임김일록, 남후면임윤천석, 서선면임김상필

내외서후風憲정만대, 내외북선면임권재경, 내외북후면임임학삼, 임현내면임박성록, 임현남면OOO구, 내외임동면임O면대, 내외임북면임OO문, 내외임서면임OOO, 길안면OOOO,내외일직풍헌김윤범, 풍북풍헌김기영, 풍현내풍헌장미옥, 풍서풍헌최은백, 풍남풍헌신구백, 춘이면풍헌이득이, 감삼면풍헌김철룡, 소천면임박학선, 내성풍헌우효득, 재산풍헌최복태, 董役監官前戶長권기상, 折衝김의민, 前兵敎김철준, 兵使권치상, 嘉善김택실.

-------------------------------------------------------------------------   전면대자풀이:

돌아가신 옛 안동부사 김상국정문공을 그리워하여 눈물 흘리며 세운 비

  찬명: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燒 黃 思(?恩)浹 白(?百)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oo平 不洙者德

공께서 옛날 우리를 감읍케 함은 / 따뜻한 새봄이 돌아옴과 같았네

빚 문서 태우시니 / 은혜가 천하에 무젖었네

밝은 햇빛 남쪽 누각에 임했으나 / 어제처럼 다시 뵐 길 없어라

비석이 닳아 (00 평평해지지 않듯) / 가이 없는 덕이로다

 

병서:

 去十六年歿 越明 本府38坊小民等立 咸豊5년9월 舊民朝奉大夫義禁府郡事 柳祈睦 謹識.통훈대부行홍문관부응교 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 謹書.

 공께서 임직을 떠나신 지 16년 만에 돌아가시니 그 이듬해에 본부(안동부)에 속한 서른 여덟 방(마을)의 백성들이 세우다. 함풍 오년 구월에 옛날 다스리셨던 백성 조봉대부의금부도사 유기목이 삼가 짓고, 통훈대부행홍문관부응교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이 삼가 쓰다.


碑陰銘:

道主屹之陽 有石穹然 臨干其上者 曰故正文金公之碑 安東府小民爲遺愛立也 謹按公 以己亥出典是府 鉅局也 三政俱痼若絲棼然 又承洊荒 世施殆不能按堵 皆窳細民之顚 連而流散者什八九 公思所以?草而安集之 以前承旨유치명進鄕序堂首仕 置都監四員 得幼學권명하유진홍생원김대진진사김중O休鄕之迸也 與之參確就還 總87000석 其無名雜色40000석 减作小詳移貿之零 사만칠천석 皆糠粃沙石 乃燒散之量 O實總折半 作民留而輕歛之 査結政中隱卜與浦沙陳之偸弄者  定爲天 總而稅捧焉

우리 도내 주흘산 남쪽(聞慶府治)에 우뚝한 비석이 있으니 그 위에 쓰기를 ‘고 정문공 김공의  비석으로서 안동부 백성들이 애모의 뜻을 남기기 위해 세운다’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이 기해년에 안동부에 부사로 나아가 그 정사를 볼 때에 삼정이 모두 고질이 되어 마치 실타래 엉킨 듯 하였다. 거기다 장마 끝의 흉황이 잇따르자 구황을 위한 시책이 거의 백성을 안돈치 못할 지경이었다. 먼저 게으른 백성이 전도하고 연이어 유리도산하는 자가 십중팔구였다. 공이 처음 (?기틀)을 잡아 안정시킬 방도를 생각하여 전승지 유치명을 향서당 수임에 나아가게 하고, 도감 네 사람을 두되, 유학 권명하 유진홍 생원 김대진 진사 김중?을 얻으니 이름난 고장의 숨은 인재들이었다. 그들과 더불어 환곡한 것을 헤아려 확정해보니 모두 팔만 칠천 석 중에 무명잡색이 사만 석이요 흉황으로 소출이 줄거나 내용이 분명치 않은 것, 다른 물품으로 대납하여 줄어든 것이 사만 칠천석인데다, 전부 쭉정이와 겨, 모래가 섞인 것인지라 근거없이 사라진 분량이 사실 절반이 넘었다. 소작인들은 계속 땅을 부치게 하고 부세를 경감하는 대신, 토지 결수에 올라있는 토지를 은복(결수를 속이는 일)하거나 갯벌, 묵은 땅(휴경지)으로 둔갑시켜 농간을 부린 것들을 조사하여 본래대로(天) 확정하여 모두 부세를 매겼다.    

  以布政之最關民漠 其黃白 役(?隣)與族(?徵)之 寃徵者오천일명 排諸境內300여동 爲規 取舊 悉燒於市 一市人皆下擔起舞 所市物狼籍於道 方姻徵之爲弊也 至有髮華面不得嫁娶者 至是婚姻以時 每産育 父相慶曰 此某公賜也 及三政取緖 離散者盡還 而生殖甚繁 勉大民以福禮讓 諭小民以謹度 以至於職吏騷校  威惠幷行 陽雇薄而製優 懲交許而焚券 凡所以敦俗而矯弊者 不能枚擧而播在輿 誦玆 蓋民之於公 去而思 歿而不忘者也

 군역을 베로 대납하도록 한 포정은 민정의 폐단에 관건이 되는 일로, 문서에 이웃과 친족에 징수케 한지라 그 징수를 억울하게 여기는 자가 오천 일 명이나 되었다. 이에 공이 안동부 경내 삼백여 동리를 조사하여 새 규칙을 만들고 옛 문서를 가져다 저자 한 복판에서 모조리 태워버리자 온 시장 안의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일어나 춤을 추고, 팔러 온 물건들이 길에 낭자히 흩어졌다.

 인징(인척이 대신 과세하는 제도)이 폐단이 된 후로 총각과 과년한 규수들이 (인징이 무서워) 시집 장가도 못가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혼인을 때맞추어 할 수 있게 되자 아이 낳고 기를 때마다(성취시킬 때마다) 父老들이 서로 경하하여 이르기를 ‘이는 모두 아무 공이 베푸신 은덕이다’라고 하였다.

 삼정이 가닥을 잡게 되자 이산하였던 자들이 모두 돌아오고 농상공(생산과 화식)이 자못 번창하였다. 대민 부호들은 복록과 예양으로 면려하고 소민 빈민들은 근신과 법도로써 가르치며 아전과 구실아치에 이르기까지 위엄과 시혜를 병행하였다. 생산을 장려하여 거간의 이익을 가볍게 하며, 신용을 중히 하여 문서에 무게를 두지 못하게 하니 모두가 풍속을 두터이 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일일이 예를 들 수가 없으되 그 여파는 아직 항간에 남아 있어 칭송이 자자한 까닭은 대개 백성들이 공에 대하여 떠난 뒤에도 그리워하고 죽은 뒤에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小民嘗欲伐石頌之 以本府遵退陶不敢褒先後之訓 曾未有碑之者 因寢不果 今年春 府之薦紳章甫 方建院以妥公遺像 於是小民相告曰 吾儕俱以撫字中 遺民獨不伸追慕之情 可乎 且公之治 曾爲一最其德業 又爲一國之矜式 則其所以鐫頌者 夫何必局於百里之區也 彼鳥嶺陡在漢師南300여리 爲嶺下全路之綰轂 四方大小人員之南爲者 必由是焉 況公以蟾帷 嘗臨眺而嘯詠 則是嶺之於公 叔子之峴也 苟欲樹公之碑 捨是奚以 僉曰 可 遂立而書之曰 追思墮淚碑 餘謁請記諸陰 餘亦州民也 於公受知OO 義不敢辭乃作而言曰 公之碩德 巍望冠於當世 著於朝野 其將銘彛鼎而耀簡冊 則又安用碑 爲然是碑之立 州人之老小OOOOOOOOOOOO

去而南士宰牧之過是路者 亦將取法而施於爲政 是碑之助 其不遠且大乎 庸爲之識  以下 幾字毁滅不詳

 내가 일찍이 돌을 다듬어 그 공덕을 칭송하려 하였으나 본부의 풍습이 퇴계께서 감히 앞뒤의 공적을 포폄치 못하게 한 가르침을 준수하여 아직 한 번도 송덕비를 세운 적이 없었던지라 오랫동안 결행하지 못하였다. 금년 봄, 부내의 전임직 고관과 여러 선비들이 마침 서원을 지어 공의 유상을 모시자고 발론하였다. 이에 내가 좌중에 서로 고하여 이르되 ‘우리들이 모두 문자 속이나 헤아린다면서도 덕을 입은 백성으로서 유독 추모의 정성을 펴지 못한다니 옳은 일이겠는가. 또 공의 치적은 일찍이 덕업으로 으뜸이었고 나아가 온 나라의 긍식이 되었으니 그 비를 새겨 칭송하는 일이 어찌 반드시 부내(백리는 부사가 관장하는 경역이다)에 국한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저 조령은 서울과의 거리가 남으로 삼백여리이고, 영남 전 도를 연결하는 요충이며 사방 대소인원 중 남행하는 자가 반드시 여기를 경유하게 되어 있다. 하물며 공은 왕의 인친으로 일찍이 여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를 읊조렸으니 이 고개야말로 공에게 아저씨의 고개(철종의 처백부라는 뜻일 듯한데 전고가 있는지 미상이다)이다. 진실로 공의 송덕비를 세우고자 한다면 여기를 두고 어디로 하겠는가’하니, 모두 이르되 ‘옳은 말이오’ 하였다. 드디어 비를 세우고 글씨를 써 가로되 ‘추사타루비’라 한다. 나머지 배알한 자는 비의 음기에 적기를 청하니 그 나머지 또한 주내의 백성이다. 공에게 지우를 입었던 아무아무(유기목일 것이다)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공의 석덕은 우러러 볼수록 당세의 으뜸이요 조야에 두드러진 것이다. 그 장차 이정과 같은 조정의 보기에 새겨 실록과 같은 역사에 빛날 것인데 그렇다면 또한 어찌 비석에다 새기리요. 그러나 이 비의 건립은 본 주의 노소 백성의oooooooooo(공의에 따라 새겨진 것이니 이정이나 간책과 다름없다 의 내용일 듯 하다)--------를 떠나 남쪽을 향하는 선비나 군수 목사(외임직의 관리)중 이 길을 지나는 자는 또한 장차 모범을 삼고 정사에 시행하게 되리니 이 비석의 도움이 그 아니 원대하다 하겠는가. 용렬하나 이로써 지한다’

이 아래 몇 자는 훼멸되어 자세하지 않다.

 전면 비문외에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燒 黃 思浹 白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oo平 不洙者德라는 贊名(銘)이 있고

公去十六年歿 越明 本府38坊小民等立 咸豊5년9월 舊民朝奉大夫義禁府郡事 柳祈睦 謹識.통훈대부行홍문관부응교 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 謹書.

助役頭民府四面都有司 김맹윤

內外東先風憲 池千興 內外東後面任 千以範 남선면임김일록, 남후면임윤천석, 서선면임김상필

내외서후風憲정만대, 내외북선면임권재경, 내외북후면임임학삼, 임현내면임박성록, 임현남면OOO구, 내외임동면임O면대, 내외임북면임OO문, 내외임서면임OOO, 길안면OOOO,내외일직풍헌김윤범, 풍북풍헌김기영, 풍현내풍헌장미옥, 풍서풍헌최은백, 풍남풍헌신구백, 춘이면풍헌이득이, 감삼면풍헌김철룡, 소천면임박학선, 내성풍헌우효득, 재산풍헌최복태, 董役監官前戶長권기상, 折衝김의민, 前兵敎김철준, 兵使권치상, 嘉善김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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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발길을 돌려 돌아오는 길에 문경세제관문 못 미쳐 송덕비의 집적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안동 김 先朝 네분의 장엄한 觀察使善政碑를 보고 또 한번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여기 네분의 위대한 송덕비 내용을 소개합니다.

■ 김희순(金羲淳, 1757~1821)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호는 산목(山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인(履仁)이고 어머니는 참봉 이극현(李克顯)의 딸이다.  1783(정조 7)년에 생원이 되고, 1789년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804년부터 1806년까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였고 후에 호조, 예조 등의 참판과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어릴 때부터 문사에 능했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이 비는 1836(헌종 2)년에 건립되었다.
◆건립년도: 1836년
◆재직기간: 1804~1806
◆비문
관찰사김상국희순불망비(觀察使金相國羲淳不忘碑)
                              丙申 九月 日 城內

■김대근(金大根, 1805~1879)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안동, 호는 여연(如淵)이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한순(漢淳)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각(慤)의 딸이다. 1827(순조 27)년에 왕세자청정경과정시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48년부터 1849년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였고 후에 한성부판윤, 예조·형조·이조판서, 좌·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시화에도 능하여 영물 등의 시 280여수를 남겼다. 1862년에 쓴 삼정구폐책(三政救弊策)에서 당시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 등의 폐단을 논하고 그 시정책으로 전부는 곡식과 돈을 혼합징수하지 말고. 지역에 따라 한가지로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군적에 있어서는 일없이 한가로이 지내는 장정들의 병역기피를 방지하고 병역면제를 핑계로 돈을 함부로 징수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환곡에 있어서는 과거의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부활시킬 것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여연유고 3책이 있다. 이 비는 1851(철종 2)년에 건립되었다.
◆건립연도: 1851년
◆재직기간: 1848~1849년
◆비문 : 순찰사김상국대근선정비(巡察使金相國大根善政碑)

 

■김세균(金世均, 1812~1879)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호는 만재(晩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서윤 병문으로 현감인 큰아버지 병광에게 입양되었다.  1834(순조 34)년에 진사가 되고 1841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거쳐 1860년부터 1862년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였다. 후에 대사헌, 이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완염통고가 있다. 이 비는 1870(고종 7)년에 건립되었다.
◆건립년도: 1870년
◆재직기간: 1860~1862년
◆비문(碑文)
 관찰사김상국세균귀애비(觀察使金相國世均貴愛碑)
                                  庚午 八月  日

■김명진(金明鎭, 1840~?)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치성(稚誠)이다. 아버지는 석균이며 세균에게 입양되었다.  1870(고종 7)년 정시별과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성,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수취체제의 혼란상에 대해 올린 장계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후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890년에 건립되었다.
◆건립년도: 1890년
◆재직기간: 1888~1890년
◆비문
 관찰사겸남영사김상국명진영세불망비(觀察使兼南營使金相國明鎭永世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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