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7-24 11:42:44 조회 : 10809         
김상용 시... 이름 : 김인진
梧桐 듯는 빗발 무심히 듯건마는 내 시름 하니 잎잎이 수성이로다 이 후야잎 넓은 나모를 심을 줄이 이시랴....선원
 김구년 06-08-29 21:37   
상용시
 김중한 07-04-10 17:15   
화수회에참석에대하여알고싶군요.
 김참봉 08-12-31 14:12   
선원 김상용 ( 仙源 金尙容 ) 의 한시
이 글은 문중의 綾夏 ( 丙東 )님께서 (안동 김씨 보 3호.05년 11 월1일 ) 명문 감상이라는 제목 하에 실린 선원 김상용 조상님의 한시 12 편을 그대로 옮겨 실었습니다.

본 시는 선원 선생께서 1608 년 48 세 때 필운산 ( 弼雲山 지금의 인왕산 )
청풍계곡에 와유암,청풍각 태고정 등의 현판을 건 별업( 別業 )을 짓고서 그 곳에 거처하시면서 계절 따라 변천하는 자연의 풍경과 당신의 산장 생활을 읊은 것으로 사실적인 내용과 섬세한 표현이 당시의 의형( 儀形 )을 오늘날에 다시금 우러러 떠올릴 수 있게 한다. ( 綾夏 님의 말씀 )

 
正月陽坡煮艾 (정월양파자애) 정월 양지 바른 산비탈에서 쑥국을 끓여 먹으면서
招呼閑伴坐陽坡 ( 초호한반좌양파 ) 할 일 없는 친구 불러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마주 앉으니
嫩艾初抽雪裏芽 ( 눈애초수설리아 ) 갓 돋아난 연한 새싹이 눈 속을 헤집고 올라오는구나
采采芼羹斟臘酒 ( 채채모갱사랍주 ) 한 잎 두 잎 따 모아 끓인 쑥국에 섣달 술을 따라 마시니
新春風味在山家 ( 신춘풍미재산가 ) 새 봄의 참된 풍미 산가 ( 山家 )에서나 맛보는 것일세

二月前池引泉 (이월전지인천) 2월, 집앞 연못에 물을 끌어대면서
刳木分泉趁早春 ( 고목분천진조춘) 통나무를 쪼개어 홈을 파서 이른 봄에 샘물을 따 대니
粼粼三池晴漲綠 (인린삼지청창록)        삼면의 맑은 연못에 푸른 물결이 일렁이네
蒲芽欲吐魚兒戱 ( 포아욕토어아희) 부들싹 막 돋아나는데 물고기 새끼 뛰어 노니
漸覺幽居景物新 ( 점각유거경물신) 산장의 봄풍경이 새로움을 한층 더 느끼게 하네.

三月洞裏尋花 (삼월동리심화) 3 월, 산속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洞裏春晴麗景遲 (동리춘청려경지) 산 속의 맑은 봄날 아름다운 풍경 지루하기도 하고
山花開偏子規遲 (산화개편자규지) 만산의 두견화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피었네
携笻趁得遊蜂去 (휴공진득유봉거) 지팡이 끌며 앞길 나서자 벌 나비 도망치누나
度壑穿林未覺疲 (도학천림미각피) 물 건너고 숲 헤치며 아무리 다녀도 지칠 줄 모르겠네

四月溪田種藥 (사월계전종약) 4 월, 개울가 밭에 약초를 심으면서
侵晨荷鍤劚荒陂 (침신하삽촉황피) 이른 새벽 삽을 메고 산비탈 묵은 밭을 파헤치어
靈藥分苗帶雨移 (영약분묘대우이) 비를 맞으며 영약의 종묘를 나누어 심네
耽興不知山日晩 (탐흥부지산일만) 흥겨움에 빠져 해지는 줄 몰랐는데
家僮來報黍新炊 (가동래보서신취) 가동이 찾아와서 기장밥 막 지어 놓았다 하네

 
五月深院養竹 ( 오월심원양죽 ) 5 월 깊은 산장에 대나무를 심으면서
日長深院靜無人 ( 일장심원정무인 ) 긴긴 하루 깊은 산장 인적 없이 고요한데
手汲山泉養綠筠 ( 수급산천양록균 ) 손수 샘물 길어다 푸른 대나무나 가꾸어 두자
滿榻淸蔭供美睡 (만탑청음공미수 ) 평상을 뒤덮는 맑은 그늘이 단잠을 제공할 때면
不知門外有炎塵 ( 부지문외유염진 ) 산문 밖의 더위와 티끌쯤은 아랑곳하지 않겠지

六月幽澗濯熱 ( 유월유간 탁열 ) 6 월 으슥한 골짝에서 더위를 식히면서
陰壑飛泉噴雪霜 ( 음학비천분설상 ) 으슥한 산골짝에 쏟아지는 샘물 눈서리를 내뿜누나
樹林深處裸衣裳 ( 수림심처나의상 ) 나무숲 깊은 곳에서 의상을 훌훌 다 벗자구나
當流滌盡三庚熱 ( 당류척진삼경열 ) 급류에 다가가 삼복더위 다 씻어 버리고 나니
仍得人間分外凉 ( 잉득인간분외량 ) 인간 세상의 과분한 시원함을 덤으로 얻겠네

七月 虛亭賞蓮 ( 칠월허정상연 ) 7 월, 빈 정자에서 연꽃을 구경하면서
睡起虛亭納晩凉 ( 수기허정납만량 ) 낮잠을 깨자 텅빈 정자에 산들바람 들어오고
滿堂紅翠媚新粧 ( 만당홍취미신장 ) 연못 가득히 붉고 푸른 연꽃 새 모습이 곱구나
天然秀色看無厭 ( 천연수색간무염 ) 천연의 아름다운 색채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아
落日移床更近香 ( 낙일이상갱근향 ) 지는 해 따라 자리 옮겨 가며 향취에 다시 다가가네

八月後園收栗 ( 팔월후원수율 ) 8 월,후원에서 밤을 주우면서
紫栗經霜落滿園 ( 자율경상낙마원 ) 붉은 밤톨이 서리를 맞아 정원 가득히 떨어지누나
山中秋興屬幽人 ( 산중추여속유인 ) 산 속의 가을 흥취 은거하는 사람에게 와 닿네
朝朝拾得盈筐去 ( 조조습득영광거 ) 아침마다 주서 담아 광주리를 채워 오니
錦裏生涯也不貧 ( 금리생애야불빈 ) 금수강산 속의 인생살이 가난하지 않네

九月採菊泛酒 ( 구월채국범주 ) 9월, 국화꽃을 따다가 술에 띠워 마시면서
東籬秋色晩蕭騷 ( 동리추색만소소 ) 동쪽 울타리에 가을 빛이 한 창 쓸쓸한데
獨啜寒香泛白酒 ( 독철한향범백주 ) 혼자만의 싸늘한 국화 따다가 흰 탁주에 띄우네
醉叩陶樽歌一曲 ( 취고도준가일곡 ) 거나이 취하여 술두루미 두드리며 노래 한 곡 뽑으니
淵明千載未專豪 ( 연명천재미전호 )국화주에 취하여 귀거래사 읊은 도연명 그만이 호걸은 아닐세

十月 掃葉煖堗 ( 십월소엽난돌 ) 10 월, 낙엽을 쓸어모아 방을 덥히면서
隨風落葉滿空林 ( 수풍낙엽만공림 ) 바람결에 떨어지는 잎새 휑한 나무 숲 가득 메우니
錦積紅堆一膝深 ( 금적홍퇴일슬심 ) 붉게 물든 비단더미에 무릎이 파묻히네
付與園丁供煖堗 ( 부여원정공난돌 ) 이것을 쓸어 모아 온돌을 덥히는데 제공하니
山齋不怕曉寒侵 ( 산재불파효한침 ) 산장에 스며드는 새벽 추위도 두렵지 않네

至月 雪水 煎茶 ( 지월설수전차 ) 동짓달,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면서
山童帶雪汲新泉 ( 산동대설급신천 ) 산속 동자가 눈을 맞고 샘물 길어다
石鼎龍團活火煎 ( 석정용단활화전 ) 돌솥에 불을 때어 용단차를 끓이는구나
細瀉松聲香滿院 ( 세사송성향만원 )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풍기는 향내 산장 가득하니
一區風致爽登仙 ( 일구풍치삽등선 ) 한 구역의 풍치가 신선이라도 된 듯 상쾌하네

臘月晴檐灸背 (납월청첨구배 ) 섣달, 눈 개인 아침 처마 밑에서 등을 덥히면서
夜雪新晴朝日暾 ( 야설신청조일돈 ) 밤새 내리던 눈이 갓 개이며 아침 해가 떠오르니
滿山瓊樹掩重門 ( 만산경수엄중문 ) 온 산의 구슬나무가 사립문을 덮어 누르네
檐前穩負黃錦襖 ( 첨전온부황금오 ) 솜바지 입고 처마 밑에 가만히 서 있으니
此味何由獻至尊 ( 차미하유헌지존 ) 따듯한 이 맛을 어찌하면 나라님께 바칠까.

선원 김상용 ( 仙源 金 尙容 )(명종16년1561 -인조15 년 1637 )
자 : 경택 ( 경택 ). 아호 : 선원. 풍계, 계옹. 시호 : 문충공
김상용은 임진왜란 때에 선원(仙源):오늘날 강화군 선원면)으로 피난하여 선원이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 이때에 와서 원임 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적병이 사방을 둘러싸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왜 피하지 않는가?” 하자, 상용이 탄식하기를, “나는 대신이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구차히 살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니, 상용이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알고 드디어 집안 사람과 작별하고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부탁하고 이르기를, “네가 만일 온전히 살거든 이 옷을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할 도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곧 남문으로 가서 화약 상자에 걸터앉았다. 윤방이 문 밑에까지 걸어와서 말하기를, “정승은 기필코 죽고자 하십니까? 죽으려거든 나도 함께 죽읍시다.” 하니, 상용이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죽겠는가.” 하자, 윤방이 이내 지나가 버렸다. 상용이 시자(侍者)에게 말하기를,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를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니, 시자는 공이 일찍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가져오지 않았다. 상용이 재촉하고 이내 손을 내저어 곁에 다른 사람들을 멀리 가게 하자, 권순장(權順長)과 김익겸(金益兼)이 말하기를, “정승은 홀로 좋은 일을 하려 합니까.” 하면서 끝내 가지 않았다. 상용이 드디어 상자 속에 불을 던지니 사람들과 문루(門樓)가 모두 날아가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난리잡기(亂離雜記)》 선원 선생의 손자 수전(壽全)은 나이 13세로 그때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니 아이가 옷을 잡아당기며 울면서, 가지 않고 말하기를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였다. 종도 가지 않고 모두 죽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내리고, 선원 옛터에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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