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07 11:07:23 조회 : 3832         
안동 제비원 연자(燕子) 성주본풀이의 유래와 실체 이름 : 金 基鎭
안동 제비원 연자(燕子) 성주본풀이의 유래와 실체
안동연자 성주본풀이 보존회장 김기진
 안동 제비원의 원래 이름은 연구사(燕口寺)였다. 연구사는 7세기 고구려에서 신라로 망명한 명덕(明德)이라는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명덕이라는 스님은 고구려 보덕 스님의 11명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보덕 스님은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와 불교 억압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백제로 망명하게 되고 그와 함께 그의 제자들도 망명을 하여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삼국유사 권 제3 보장 봉로 보덕 이암 條 참조) 명덕은 신라 선덕왕 3년(서기 634년)에 제비원 미륵 석불을 새기고 석불 위에 연자루를 세웠다.(영가지 권 제6 연비원불사 條 참조) 영조 36년(1760년)에 제작된 여지도서 안동부지도에 연미사(燕尾寺)라는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다. 연자루는 밑에서 쳐다보면 제비가 날아와서 앉은 듯하며, 불상과 불상 앞면의 바위까지를 모두 덮고 있어 석굴 사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불상과 앞면 바위와의 사이 공간이 법당이며 이 법당은 제비 입부리 밑에 있다고 하여 연구사(燕口寺)라고 불렀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인 요사채를 지으니 제비의 꼬리 부분에 있다하여 연미사(燕尾舍)라 하였으며, 연구사가 있는 마을을 연사동(燕寺洞)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역원제도가 시행되면서 대현 아래에 원(院)을 설치하니 연자루의 모습이 마치 제비가 날아가는 듯 하여 연비원(燕飛院)이라 하였다.
  연자루의 지붕 모양은 제비모양으로 지어졌는데, 제비를 연자(燕子)라고도 한다. 제비는 옛날부터 저승사자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영화에서 보면, 옷은 검정색으로, 얼굴은 흰색으로 분장하여 등장하는 저승사자의 모습은 제비의 형상을 본뜬 것이다. 그러므로 제비는 저승사자로서 천신의 전령인 것이다.   
   연자루 지붕은 제비가 날개를 펴는 형상으로 만들어 졌으며, 연자루 중간의 큰 소나무 기둥은 천신 내림대이다. 이것이 삼한 시대의 솟대 신앙과 신라시대의 불교신앙, 즉 천신신앙과 윤회사상이 접합한 것으로서 연자루 중간 큰 소나무 기둥으로 천신을 받아서 안착한 신을 성주 가신(家神)으로 믿어 왔음을 연자루 주춧돌의 흔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연자루 중간 큰 소나무 기둥이 성주신의 본향으로 인정되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의 새김넓이가 가로 150cm, 세로 90cm로서 이를 통해서 볼 때 이 소나무 큰 기둥의 수령이 최소한 600년 이상의 나무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634년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다섯 차례의 연자루 중창이 있었지만 모두 이 기둥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영가지와 안동부 읍지에도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볼 때 오랜 세월 동안 천신내림 받음 기둥으로서 사용되어 왔으며, 받은 신을 성주신(가신)으로, 또 이 신의 분신이 인접 소나무로 분신 받고 그 소나무 솔씨가 전국 명산 대산에 흩어져서 소부동이 되고, 소부동이 자라나서 황재목이 되어 이 세상 모든 관청집과 가정집에 성주기둥이 되었기에 성주신의 본향은 경상도 안동 땅의 연자루 중간 큰 소나무 기둥이 성주신앙의 원그림 1 연자루 큰 소나무 기둥-신 받음대 자리 조상으로써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연구사가 폐사되자 각지의 박수와 무당이 이곳으로 다투어 몰려 들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억제하기 위해서 연비원을 연미사(燕尾舍)로 옮겼다. 연자루 큰 소나무 기둥에 신을 비는 성주본향터를 억제, 파괴하려고 조정에서 모든 수단을 썼지만 중건하여 속임수만 부리자 점점 규제만 번거로울 뿐 연자루 성주본풀이 신앙은 날이 갈수록 절실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신앙으로 크게 발전하여 왔다. 이를 증명할 기록이 보인다. 조선 중기 문인인 백담 구봉령(와룡면 지래인)의 문집에 “연원(燕院)을 지나며”라는 오언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쉽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기괴한 것이 있다한들 이 매원에 지나지 못하리라
  이 누가 간괴한 허수아비에 이처럼 망령되이 술잔을 올렸는고
  이로부터 몇 천년이 지나도록 백성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네
그림 2 연자루 복원 상상도  (『안동문화와 성주신앙』임재해 84쪽에서 재인용)
 
  이 성주본풀이 신앙의 발원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이며, 발원자는 연비역원에 일하는 노비(종)인 연이 처녀와 이송천 입향조인 김목윤의 자손 중 김도령이 시작하여 차츰 상민, 농민층으로 퍼져 믿어왔고, 제비원에서 시작하여 남도지방으로 퍼지면서 전국적으로 성주본사상신앙이 조선민족의 사상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이 성주본신앙을 믿고 전승한 사람들이 일반 서민층이기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가 없었으나 처음에는 삼한시대의 솟대신앙인 산신신앙이 신라시대 불교신앙인 윤회사상과 결합하여 내세구복신앙으로 나타났으나 그후 연자성주본사상신앙은 현세구복신앙으로서 발전하였으며 영조, 정조 임금시대에는 삼한의 고지인 남도 지방으로 확산되자 흥부전이라는 작품으로 표현되었으며, 말기에는 동학사상(양민 교주 최제우)의 기초사상인 인내천사상과 유교+도교+서교신앙이 결합한 성주본신앙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귀중한 우리 민족의 사상신앙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림 3 여지도서의 안동부지도와 연자루 평면도  또한 도산서원이 영남학파의 본향이라면, 제비원 연자루 성주본사상신앙은 조선 시대 일반 서민층의 민족사상신앙의 본향이다. 이러한 성주신앙을 발원한 연이 처녀는 굿무당, 김도령은 박수로써 전승하여 오던 중 연이 처녀가 38세에 사망하고 연자루가 오랜 세월에 허술해지고 관아에서 규제가 심해져 김도령이 홀로는 연자루의 성주본풀이가 불가능하게 되자 건너편 산꼭대기에 연자성주본신을 옮겨 모시는 작은 당을 연이당이라고 하여 짓고 인근 동리 사람들과 연자굿패를 만들어 박수무당들끼리 이 당에 연자성주본풀이를 1년에 세 번 연이당에 비는 달을 정해 빌어 왔는데 첫 번째 정한 달은 제비신이 오는 3월달 삼진날에 당에 쌀과 재물을 차려 놓고 풍년 곡식씨와 재수, 소망, 복덕을 많이 달라고 연자성주본풀이를 하고 두 번째 달은 5월 단오절에 재수, 소망, 복덕과 풍년 농사를 위해 파종제를 올리고, 세 번째 달은 제비신이 돌아가는 10월상달에 햇쌀로 만든 붉은 설기떡과 햇쌀을 차려 놓고 연이 제비신이 풍년 햇곡식을 많이 음향하시고 돌아 가셔서 내년에 또 풍년신과 소망, 복덕신을 가지고 오시라고 연자루 가운데 큰 기둥 연자성주본풀이 굿을 하여 왔다.(연당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첨부파일 : Andongjebiwonyeonjaseongjubonpuriuiyuraewasilche.hwp (0byte),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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