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19 15:35:29 조회 : 3510         
영상록 (자료실 영상록에서 복사) 이름 : 경진

일명 {청원루(淸遠樓)의 자손}이라 하고 세칭 {장동 김씨}라 불려지기도 하는 계파(서윤공파)에서 조선 후기 관직활동이 활발하다. 특히 金克孝의 아들 淸陰 김상헌(문정공파)의 자손들의 出仕가 두드러진다.

{장동김씨} -12世 한양에서 서윤(庶尹)벼슬을 했던 金(김번) 북악산 밑에 터를 잡은 곳이 장동이다. 김번의 자손이 많은 벼슬길에 올랐다. 김상용의 벼슬밭에서 2명의 駙馬(임금사위)와 8명의 政丞,判書가 났으며 김상헌의 벼슬밭에서 정승.판서만 60명이 배출되었다. (장동은 현재 궁정동의 무궁화동산으로 꾸며져있다)

[조선일보 이규태칼럼]에서

이름

년 도

연 호

15世

상용(尙容)

서윤공파 문충공파

1561-1637

명종16-인조15

15世

상헌(尙憲)

서윤공파 문정공파

1570-1652

선조 3-효종 3

17世

수홍(壽興)

서윤공파 부사공파

1626-1690

인조 4-숙종16

17世

수항(壽恒)

서윤공파 문정공파

1629-1689

인조 7-숙종15

18世

창집(昌集)

서윤공파 문정공파

1648-1722

인조26-경종 2

21世

이소(履素)

서윤공파 문충공파

1735-1798

영조11-정조22

21世

이교(履喬)

서윤공파 문충공파

1764-1832

영조40-순조32

22世

달순(達淳)

서윤공파 문정공파

1760-1806

영조36-순조6

23世

홍근(弘根)

서윤공파 문정공파

1788-1842

정조12-헌종8

23世

흥근(興根

서윤공파 문정공파

1796-1870

정조20-고종7

23世

좌근(左根)

서윤공파 문정공파

1797-1869

정조21-고종6

24世

병학(炳學)

서윤공파 문정공파

1821-1879

순조21-고종16

24世

병국(炳國)

서윤공파 문정공파

1825-1905

순조25-광무9

24世

병덕(炳德)

서윤공파 문정공파

1825-1892

순조25-고종29

24世

병시(炳始)

서윤공파 문정공파

1832-1898

순조32-광무2

<領領-재상을 일컫는 다른 말>

선조중기의 문신 자 경택, 호 선원·풍계, 시호 문충
1582년(선조15) 진사가 되고 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었으며 상신 정철, 판서 김찬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좌랑 응교등을 역임하고 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호남지방을 왕래하였으며 98년(선조 31)에 승지가 되었고 이해 겨울에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을 거쳐 정주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였고 광해군 때에도 도승지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후 집권당인 서인의 한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예조·이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27년(인조5년) 정묘호란때에는 유도대장으로 있었다. 30년 기로소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32년(인조10) 우의정으로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마침내 허락 받았다. 36년 병자호란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글씨에 뛰어났고 그 서체는 이왕체(왕희지와 왕헌지)를 본뜨고 전(篆)은 중체를 겸했으며 시조로 유고에 오륜가 5편, 훈계자손가 9편 등이 있고 그밖에 가곡원류 등에 여러편이 실려있다. 강화의 충렬사 양주의 석실서원, 상주의 서산서원, 안변의 옥동서원, 정주의 봉명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선원유고', '독례수초', 작품으로 글씨에 '숭인전비의 전액', '군수 장인정비의 전액'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숙도, 호 석실산인, 시호 문정
1596(선조29)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선조41)에는 다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교리, 직제학 등을 역임하고 15년(광해군7)에 지은 공성왕후 책봉고명사은전문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24년(인조2)에 다시 기용되어 대사간 대제학을 거쳐 각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36년(인조14) 병자호란때 이조판서로서 척화를 주장한 탓으로 이듬해 파직되고 39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하자 그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듬해 심양으로 잡혀갔다. 42년 조선이 명나라를 숭배하고 청을 배척한다고 고해바친 자 때문에 최명길등과 함께 심양으로 다시 잡혀갔었고 45년(인조23)석방되어 귀국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의정 영돈령부사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때 척화파의 거두로 민족사 수호의 결의 와 신념을 보인 사실은 역사의 기록이 증명하는 바이지만 그때 주화파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하는 국서를 찢고 꾸짖은 사건은 유명하며 또한 항복이 이루어지자 자살을 기도 주권국가의 대신으로서의 기개를 보였다. 한편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를 잘 썼다.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전국 여러 서원에서 그 유덕을 기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지기, 호 퇴우당, 시호 문익
1648년(인조26) 사마시를 거쳐 55년(효종6) 춘당대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아우 수항과 함께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현종때 부교리, 도승지등을 역임하였다. 66년(현종7)에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73년(현종 14)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이때 영릉의 석재가 갈라진 사건에 인책되어 아우 수항이 우의정직을 물러나게 되자 그 후임으로 우의정에 임명되고 천릉의 의론이 결정되자 총호사를 겸임하였다. 74년(현종15)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영의정으로 자의대비 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의 기년설(1년)에 대하여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다가 부처(付處)될 뻔 하였으나 3사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어 출발하지 않았다. 80년(숙종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영중추부사에 이어 88년(숙종14)에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長 )에 유배되어 이듬해 배소에서 죽었다. 저서에 퇴우당집, 퇴우만필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구지, 호 문곡, 시호 문충
1646년(인조24) 사마시를 거쳐 51년에 알성문과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56년(효종7)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하였고 정언,교리등 청환직을 거쳐 이조정랑, 대사간에 올랐다. 59년(현종즉위) 승지가 되었고 61년(현종2)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제학으로 특진하였다. 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김수홍과 함께 대공설(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1년설)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75년(숙종1)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윤휴, 허적, 허목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원주에 부처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다가 다시 영암에 부처되었다. 80년 영의정이 되고 81년 현종실록 편찬총제관을 지냈으며 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진도에 유배된 후 사사되었다. 전서를 잘 썼으며 현종묘정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평의 옥병서원, 진도의 봉암사와 영암의 녹동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 '문곡집', 편서에 '송강행장'이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노론파의 대신 자 여성, 호 몽와, 시호 충헌
1672년(현종13) 진사가 되고, 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지낸 후 84년(숙종 10)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정시문과에 급제 정언. 병조참의를 지냈다. 89년(숙종 15) 기사환국때 부친이 관련되어 사사되자 산중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94년(숙종 20)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아버지 수항 형제의 관직이 복구되고 그를 병조참의 등에 임명하였으나 거듭 사양하였다. 뒤에 철원부사로 치적을 올리고 강화부 유수, 예조참판, 개성부유수등을 역임한 후 호조, 이조, 형조의 판서를 두루 거쳐 1705년(숙종 31) 지돈령부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한성부판윤,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12년(숙종 38)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으며 17년(숙종 43)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 숙종 말년에 왕이 병석에 눕자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왕위에 오른 경종은 몸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노론파의 대신들과 의논하여 왕세제의 책봉을 상소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21년(경종1) 다시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하게 하였으나 경종의 친정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소론파의 조태억, 이광좌등에 의하여 대리청정이 취소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사사되었다. 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관직이 복구되고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과천의 사충서원, 거제의 반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국조자경편', '몽와집', '오륜전비언해'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백안, 호 용암, 시호 익헌
1764년(영조 40)에 충량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삼사의 벼슬을 거쳐 한성부판윤, 대사헌, 이조·병조·호조의 판서, 경기도·강원도의 관찰사, 판의금부사등을 역임하였다. 92년(정조 16) 우의정이 되고 94년 정조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좌의정, 영돈령부사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공세, 호 죽리, 시호 문정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수찬 등을 역임하고 1800년(정조 24) 겸문학이 되었다. 이해 정조가 승하하자 반대당인 벽파에 의하여 명천에 유배되었다. 이후 이조참의,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0년(순조1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쓰시마섬에 건너가 국서를 전하고 돌아왔다. 그 뒤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평안도 관찰사등을 역임하였고 31년(순조31) 우의정에 선임되었는데 이때 영의정, 좌의정이 모두 공석중이었으므로 한때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저서에 '죽리집' 작품에 글씨 '경은부원군김주신신도비'가 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도이, 호 일청, 시호 익헌
1789년(정조 13)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초계문신으로 뽑혔다. 99년(정조 23) 진하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805년(순조 5)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확립되자 우의정에 올라 벽파로서 시파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고 유배 사사되었다. 후에 신원 되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의경, 호 춘산, 시호 문익
위솔의 신분으로 1829(순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 대사성,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38년(헌종 4)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후 홍문관제학,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기경, 호 유관, 시호 충문
1825년(순조 25)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35년(헌종 1)에는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이 많았으므로 탄핵을 받아 광양에 유배되었다. 다시 풀려나와 51년(철종2)에 좌의정이 되었고 다음해 영의정에 올랐다. 64년(고종 1) 철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지실록사가 되었다. 다음해 영돈령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경은, 호 하옥, 시호 충익
1825년(순조 25) 음보로 부솔이 되었다가 34년 상의원첨정으로 승진 37년(헌종3) 진사가 되었다.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교리, 대사성, 이조참의, 한성부윤, 공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50년(철종1) 우참찬, 선혜청당상,  금위대장, 형조판서, 훈련대장, 공조판서, 우의정을 지내고 53년부터 63년까지 영의정에 3번이나 보직되어 안동김씨의 중심인물로서 세도정치를 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영의정을 물러나 실록종재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고 68년(고종 5) 삼군부가 설치되자 영삼군부사가 되었다.

 

조선말기의 문신 자 경고, 호 영초, 시호 문헌
1853년(철종 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장령과 사간을 거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대사헌, 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고종의 즉위로 집권하게 된 흥선대원군에 의해 안동김씨 일문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융통성이 많고 평소 흥선대원군과 가까웠으므로 65년(고종 2)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으로 승진되었고,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을 또 조두순, 이유원과 함께 찬집소총재관으로 '대전회통'을 각각 완성하였다. 보수파의 척화론자로서 천주교 탄압을 적극 주장하였고 영의정을 거쳐 75년(고종 12) 영돈령부사가 되어 한일 수호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였다.

 

조선말기의 대신 자 경용, 호 영어, 시호 충문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를 거처53년(철종4) 대사성에 특진하였다. 57년(철종 8) 예조판서, 이듬해 병조·호조판서등 안동김씨 세도의 물결을 타고 내외요직을 역임하였다. 64년(고종1) 이조판서가 되고 경복궁 증건때는 판중추부사로 영건도감제조를 지냈다. 82년(고종 19) 영삼군부사, 84년(고종 21)영의정, 세자사, 총리군국사무를 역임하고 같은해 영돈령부사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물러났으며 '예릉지문'을 찬 하였다.

 

조선시대의 문신 자 성일, 호 약산, 시호 문헌
1847년(헌종13) 정시문과에 급제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고 67년(고종4) 이후 3차례 이조판서를 지냈다. 80년(고종 17) 통리기무아문당상, 이어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수원부유수, 독판군국사무 우의정등을 역임하였다. 85년(고종 22) 좌의정이 되었고 후에 총리군국사무가 되어 91년(고종 28)에 물러났다. 저서에 속간고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신 자 성초, 호 용암, 시호 충문
1855(철종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60년(철종 11) 교리 62년(철종 13) 이조참의, 이어서 총융사, 무영도통사등의 무관직을 역임하고 70년(고종 7)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조 호조의 판서를 거쳐 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다시 재집정했을 때는 지삼군부사가 되었다. 84년(고종 21) 김옥균등의 개화당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대당원으로 이들과 대결 청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당을 몰아내고 사대당 중심의 내각을 조직, 외무아문독판에 취임하여 전권대신으로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청일양군의 개입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혁명후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을 설치하게 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사임하여 군국기무처독관에 취임하였고 이것이 중추원으로 개편됨에 따라 그 의장이 되었다. 96년(건양 1) 아관파천으로 왕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들어간 직후 친로파 중심의 내각이 조직되어 내각총리대신에 임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대당 보수파로서 개국을 반대하였고 1895년의 단발령에도 특진관으로 있으면서 이를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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