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0 16:31:46 조회 : 3214         
조선일보 살롱:안동 김씨 고(考)"를 짖는다 이름 : 안동에서
아래의 두 글은 신문지면의 속성상 상세히 기술하지 못하므로
대개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적하신대로 오해의 소지도 있겠지만 저가 볼때는 안동과 안동김씨에 대한 애정
도 엿보입니다
이분이 이말을 하기위해 이야기를 쓴 것 같습니다
=====  안동 김씨 세도로 인해서 안동 또는 경상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조용헌 살롱]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역차별을 많이 받았던 곳은 이북지역이다. 실력이 있어도 출세를 할 수가 없었다. 이북에서 발생한 이시애의 난, 홍경래의 난 등은 그러한 불평등에 대한 이북사람들의 저항이었다. 이북에 이렇다 할 큰 벼슬을 한 집안이 별로 없다 보니 이북으로 올라간 이남 출신 관리들의 착취를 견제할 세력도 드물었다.

500년 동안 쌓인 이북 사람들의 한을 풀어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님 앞에 양반 상놈 없다'고 선언한 기독교이고, 또 하나는 '상놈에게 땅도 똑같이 나누어 준다'를 모토로 한 공산주의였다. 우리가 남북분단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진정으로 해소하려고 한다면 조선조 500년 동안 진행됐던 이런 인과(因果)의 축적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북 다음으로 차별을 받았던 지역은 영남이다. 남인(南人)들이 서울의 주류사회에서 축출되기 시작한 숙종조 말엽부터 계산하면 대략 200년 동안 영남의 남인들은 극심한 차별을 당했다. 집권당인 노론의 탄압으로 인해서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고위직에는 갈 수가 없었다. 필자가 영남 남인들의 본거지인 안동의 유서 깊은 명문가들과 교류하면서 놀란 사실은 그 택호(宅號)였다. 충청도에 가면 무슨 무슨 '정승댁' '대감댁'이 많은데, 안동에는 '교리댁' '정언댁' '장령댁' '승지댁'이 많았다.

'교리(校理)' '정언(正言)' '장령(掌令)'은 중앙부처 과장급 정도의 벼슬이다. 안동이라면 양반의 도시이고, 벼슬이 화려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막상 명문가 후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안동에는 고위벼슬이 없다시피 했다. 안동 남인들은 그 세월을 200년이나 견디어야 했다. 벼슬도 없고 돈도 없고 물산도 부족한 산골 지역에서 양반의 품위를 지키려고 몸부림친 사람들이 안동사람들이다.

노론 출신 풍운아인 김가진(金嘉鎭·1846~ 1922)이 안동 인심을 달래려고 안동부사로 내려갔다가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서에는 '천김쟁쟁(川金錚錚) 하류청청(河柳靑靑)'이라고 되어 있다. 안동의 명문가인 '내(川) 앞의 김씨들은 쇳소리만 나고, 하회의 류씨들은 푸르기만 하다'는 뜻이다. 설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다. 사회(지역) 통합은 이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에 각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조용헌 살롱] 안동 김씨고(考)

  • 입력 : 2010.01.10 23:06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남인들이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는 내용의 지난번 칼럼에 대하여 여러 독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렇다면 '안동 김씨'는 무엇이란 말인가?" 안동 김씨 세도로 인해서 안동 또는 경상도 사람들이 권력을 누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안동 김씨는 호적만 '안동'으로 되어 있지, 들어가 보면 이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성씨제도에서, 본관(本貫)과 관향(貫鄕)은 한번 정해지면 그 뒤로 바뀌지 않는다. 본관은 그 성씨의 시조가 태어난 장소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경주 김씨'라고 하였을 때, 그 후손들이 모두 경주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전에서 살 수도 있고, 광주에 이주해서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경주'라고 기재한다. 죽음 후 묘비에 새길 때에도 '경주 아무개'라고 새긴다. 그러다 보니 경주에서 계속 살았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안동 김씨도 마찬가지이다. 안동 김씨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청음(靑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걸출한 행적 때문이었다. 이들 형제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서울사람들이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증조부 때 벼슬을 하면서 안동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서울의 장의동(壯義洞)이 바로 그 근거지였다. 경복궁의 서북쪽 지역인 자하문(紫霞門) 밑의 동네가 '장의동'이다. 지금의 옥인동과 청운동 일대이다.

이들 김씨는 '장동 김씨'라고 불렸다. 족보에는 안동 김씨이지만, 실제 거주한 곳은 장동(장의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동 김씨들이 가지고 있던 유명한 저택이 청풍계(淸風溪)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단원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청풍계 전경을 보면 바위 암벽과 소나무, 그리고 우아한 기와집들이 조화를 이룬 서울 최고의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살았던 집이 청풍계 터라고 전해진다. 단단한 화강암을 바닥에 깔고 있어서 기가 아주 강한 집터이다.

안동 김씨 세도는 안동 사람들과 관련이 없다. '장김'은 서울의 노론이었으므로 남인의 도시였던 안동과는 오히려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안동은 춥고 배고팠던 '야당도시'였다.
 김충일 10-02-13 11:33   
본 글에 첨부된 내용입니다. 그 정도 지면이면 박사학위도 받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무엇을 긍적적이고 애정으로 판단했는지 몰라도 안타깝습니다. 사실(fact)이라니요. 안동에 있던 안동김씨가 세도 기간 핍박을 받았나요(대원군 이전), 벼슬을 못했나요....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