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1 19:44:09 조회 : 5263         
유청량산기 이름 : 김성동(년)
유청량산기
아래의 글은 http://www.nongam.com/ 옮겨온 글입니다
선조분 중에 퇴계제자가 계셨다는 사실이 드문 일이기에 흥미롭고
이밖에 다른 분들의 여러 유청량산기(도산기행)를 읽어보면 당시의 세태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숭유억불정책의 시류에 따라 선비들이 승려들을 얼마나 홀대했는지도 나타나고
여러 글에서 기가막힌 문장들과 표현력을 읽고 감탄하실수도 있습니다
농암종택홈페이지 도산기행에 있는 글입니다



네이버 백과서전에 나오는 선조님의 약력입니다("구미당"이라는 카페에도 약력이 있는데 복사를 못해겠습니다)

김중청 [金中淸, 1567~1629] 

요약
조선 중기의 문인. 161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613년 전적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621년에는 승지에 올라 호남지방을 순행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역학에 밝았다.

본관  안동
호  만퇴헌 ·구전
별칭  자 이화

본문
본관 안동. 자 이화(而和). 호 만퇴헌(晩退軒) ·구전(苟全).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몽호(夢虎)의 아들. 조목(趙穆)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613년 전적(典籍)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듬해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15년 문학에 이어 정언(正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다시 복관되어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으로 나갔으며 1621년에는 승지(承旨)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행하였다.

그 뒤 산직(散職)에 머물러 있다가 1623년의 인조반정 뒤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았다. 경상도 봉화(奉化)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래-


유청량산기

아아, 사람이 산을 대할 때에 산으로 좋아하게 되면 얄팍하게 좋아하는 것이고, 사람으로 여겨 좋아하게 되면 깊게 좋아하는 것이다. 얄팍하게 좋아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대부분 비슷하게 할 수 있지만, 깊게 좋아하는 것은 군자만이 할 수 있다. 대개 기이한 바위를 기이하게 생겼다고 하고, 이상한 돌을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면서 특별한 즐길 거리로 삼아 색다른 곳에서 노닐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좋아하는 것이 같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만약 조용하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침착한 것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면 산의 모습같이 우러러보게 되고, 맑고 깨끗하여 탈속한 것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면 산의 기운을 바라보는 것 같으니 산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군자만이 할 수 있는데 좋아함에 깊은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에 사람이 있으면 오로지 그를 좋아하게 되니 산을 그렇게 좋아할 필요가 없고, 산에 사람이 없으면 좋아할 대상이 오직 산밖에 없으니 산을 깊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에만 계셨다면 칠십 제자들은 동쪽의 산을 돌아다녀 보지 못하고 궐리(闕里) 에서나 노닐었을 것이고, 무숙(茂叔) 이 송나라에만 계셨다면 이정(二程) 이 남악(南嶽)에서 시를 읊조리지 못하고 염계(濂溪)에서나 시를 읊조리게 되어 세상에서 노닐고 읊조리고 즐길 만한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중니(仲尼) 의 성스러움, 무숙의 어짊과 같은 것이 있은 연후에야 주 회암(朱晦庵)과 장 남헌(張南軒) 이 있을 수 있었고 이에 형산(衡山)을 유람하며 주고받은 시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을 세상에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 사람을 보듯이 산을 보고 깊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청량산 봉우리 가운데는 장인(丈人)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람에 빗대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로(香爐), 연적(硯滴), 탁필(卓筆), 금탑(金塔)이라 한 것들은 장인이 좌우에 늘 두는 물건이고, 자란(紫鸞), 선학(仙鶴), 연화(蓮花)라 한 것들은 장인에게 사랑받는 물건이다. 축융(祝融)은 곧 장인의 손님이요, 자소(紫霄)는 곧 장인의 하늘이며, 경일(擎日)은 곧 장인이 가진 뜻을 말한 것이고 혹은 장인이 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나누어 이름을 붙인 것이 열두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해도, 통틀어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장인일 따름이다.

‘장(丈)’이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뜻이다. 사람이 크다는 것은 곧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한 경지를 말한다. 사람이 크다는 것을 이 산에 빗대어 말해보면, 이 산의 단정하고 중후하며 맑고 깨끗함이 그 부류들 가운데서 뛰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산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빗대어서였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에 우리의 선현인 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 은 봄에도 여기 계시고 가을에도 여기 계시고 겨울과 여름에도 여기 계셨으며, 그 해에도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여기에 계셨다. 선생께서 칠십 년을 사시는 동안 산을 사랑하여 즐기시고 산을 유람하며 시를 읊조리신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그 생각이 궐리의 단(壇)과 염계의 풍월(風月)에 머물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그 해와 달의 빛과 봄바람 부는 자리를 직접 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내장인(內丈人)과 외장인(外丈人)에 사랑을 주시기를 마치 원회(元晦)와 경부(敬夫) 사이를 오가신 것같이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렇다면 문순공의 단정하고 증후하며 맑고 깨끗함은 실로 사람 가운데 청량산이라 할 수 있다. 산이 청량하다는 것이 진실로 사람이 청량한 것에 미치지 못할진대, 세상 사람들이 청량산이 청량함에 있다는 것을 또 어찌 알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옛날 유람하던 선비들은 청량산으로 가지 않고 퇴계로 갔고, 청량산을 읊조리지 않고 퇴계를 읊조렸던 것이다.
이는 마치 공자에 대해 칠십 제자가 한 것이나 주 무숙에 대해 이정이 한 것과 같이 뜻을 얻어 흠모하고 돌아가며 존경하고 사랑하며 좋아하는 것도 오히려 부족한 듯이 하였으니 산 자체만을 사랑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혹 동천(洞天) 에서 지팡이를 짚고 걷거나 산방에서 시서를 토론한다 해도, 또한 퇴계에서 노닐고 퇴계를 읊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산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당시 여러 사람들이 같았기 때문이다.

아아, 사람은 가고 산은 텅 비었으며, 바람은 차나 달은 예전의 달이다. 오늘날 월천 선생(月川先生)이 문순공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것은 실로 보통 사람들이 옛사람을 사모하는 것보다 더함이 있다. 그때 이 산에서 노닐며 발자취를 남긴 것은 또 그 모습이나 그 기운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데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선생께서 이 산을 유람하실 때, 암자를 보면 우리 선생께서 계시던 곳이라 여기시고, 절벽을 보면 우리 선생께서 오르시던 곳이라 생각하시고 바위와 골짜기를 보면 선생께서 이리저리 거닐던 것을 생각하시고 구름과 아지랑이를 보면 선생께서 읊조리시던 것을 생각하셨다. 장인봉을 우러르면 더욱 높아 보이고 향로봉을 대하면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이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감개해 하며 사연이 있으면 더욱 슬퍼하시는데, 오늘이 어제보다 더하고 올해가 지난해보다 더하다. 그 말과 얼굴에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마음속으로 지극한 즐거움에 대해 생각하고 끝이 없이 사랑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어찌 감히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살펴볼 수 있겠는가? 아아 선생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돌아가리.


1601년(선조 34년) 11월 3일
도산서원에서 월천 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선생께서, “청량산에 가려고 하는데 자네 나를 따라가겠는가?” 라고 하시길래 날짜를 여쭈니 선생님께서, “8일 제사를 지내고 나서 9일에는 갈 수 있겠네.” 라고 하시는데, 원장 김기(金圻), 찰방 배용길(裴龍吉)도 모두 모시고 가기를 원했다. 나는 날씨가 혹여 좋지 않아 출발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온계(溫溪)로 물러나와 있는 닷새 동안 아침마다 점을 쳤다. 8일 뒤 임인일에 심부름꾼을 통해 여쭈니 답장에 내일 아침 예정대로 출발하는데 문원(聞遠)도 함께 갈 계획이라고 하셨다.

이날 저녁 채락(蔡樂) 군이 달밤에 이사안(李士安)의 집으로부터 와서 문 밖에서 불렀다. 내가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갈 정도로 반겨 맞으니 채락이 말하기를,“선생께서 타신 말이 너무 약해서 여기까지 겨우 왔네. 여기서 산까지는 힘센 말을 구해야만 갈 수 있을 텐데 자네가 구해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금흡(琴翕)을 불러 그 형님인 역여(繹如)의 말을 빌려 보려 했으나 마침 말이 나가고 없었다. 내가,“내 말이 둔하기는 해도 동구까지는 갈 수 있을 테니 동구에서부터는 가마로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채락이 말하기를,
“가마가 좋기는 하나 힘이 빠지면 어떻게 하나?”라고 하여, 내가,“산으로 여행할 때 산인(山人) 을 데리고 가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니 자네는 우선 용수사(龍壽寺)에 가서 승려 두세 명을 불러오게.”라고 하니 채락이,“알겠네.” 라고 하였다.


9일 계묘일.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햇무리가 엷게 깔렸는데 걱정스럽게 바람이 불었다. 채군과 함께 오춘당(吳春塘)을 뵙고 가마를 빌렸다. 나는 길가에서 기다리려고 밥을 재촉해서 먹고 문을 막 나서는데 선생님께서 벌써 태계(泰溪) 변에 오셨다고 한다.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이미 늦을 것 같았는데 다행히 장인께서 와 계셔서 그 말을 빌려 타고 나가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을 모시고 온 사람은 어른 하나, 아이 하나였는데, 바로 그 장남 수붕(壽朋)과 외손인 권명석(權命錫)이었다. 명석과 수붕이 뒤에 온 것은 부포(浮浦)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채락도 사안의 집에 있다가 선생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 내가 남쪽의 누추한 우리 집에서 잠시 쉬어가시기를 한사코 청하니 마침내 허락하셨다. 장인이 선생의 수를 비는 술잔을 올렸다.

조금 지나서 진사 오춘당이 가마를 가지고 왔는데 두 아들 윤(奫)과 감(淦)이 따라왔다. 마올 사람 중에서 이윤적(李允迪), 이일도(李逸道), 이유도(李有道), 금학고(琴學古) 및 처형 이별(李虌)이 와서 인사를 하였고, 우리 옥현(王鉉)도 자리에 참석하였다. 진사 이하로 각기 선생님께 한 잔씩 따라 올렸다. 진사 오춘당과 선생님은 다 나이가 여든이었는데 우연히 만난 나머지 기쁨과 감개가 한데 일어나 다시 술을 따라 마시면서 우러나는 정을 표하였다. 진사가 말하기를,“겨울 산을 유람하는 것도 괜찮습니까?”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주 부자께서 남악을 유산하신 것이 꼭 이때였는데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사가,“거기는 남쪽 지방이라 따뜻하지요.”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이곳도 영남의 산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조금 있다가 선생님께서 일어나시니 제자들도 따랐다. 선생님께서는 채군의 말을 타시고 채군은 내 늙은 말을 타고, 금학고는 나귀를 타고 내 앞에 가고, 나는 암소를 타고 갔다. 제일 뒤에 승려 둘이 가마를 가지고 따라 왔는데 이는 선생님께서 모르시는 일이었다. 선생님께서 끝내 거절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다.

박석촌(博石村)을 지나 동제(洞濟)에 이르렀을 때 선생님께서 걸어서 다리를 건너시려고 하셨다. 수붕 등이 간절히 아뢰었으나 듣지 않으셨다. 이에 간(衎)이 다리 어귀에 걸쳐 누우니, 그제야 말을 타고 건너셨다. 물가 바위에서 쉬며 금학고의 술을 마시는데, 선생님께서 그제서야 가마를 보시고 그 이유를 물으셨다. 내가 사실대로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하셨다. 산길을 오를 때에 가마를 타시라고 하였으나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사자항(獅子項)을 지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않자 선생님께서는 말을 두고 그냥 올라가셨다. 몇 굽이를 지나서 간(衎) 등이 그 힘드신 것을 민망히 여겨 이구동성으로 가마를 타시라고 권유하면서 억지로 타시게 한 뒤에야 타셨다.

날이 저물어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니 승려가 지장전으로 맞아들였다. 지장전은 낡고 누추했으며 승려도 추하고 지저분해서 대화할 만하지가 않았다. 지장전에 묵고 있는데 승려가 말하기를, “날씨도 나쁘고 내일은 바람이 불어 나가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라고 하였다. 한밤이 되자 달빛은 창에 가득하고 바람소리는 어느덧 잠잠해졌다. 선생님께서 내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는가?”라고 하셔서, “경서를 읽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곧 의심나던  여러 군데를 여쭈었다.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평소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님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고시(古詩), ‘하늘은 나를 덮어주고 땅은 나를 실어주네〔天覆吾地載吾〕’ 한 구를 읊으시고 말구(末句)를 물어보셨는데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간이 여러 소첩을 살펴보고 아뢰었는데 이는 일찍이 들은 것을 써 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으니 이상하다.” 라고 하셨다. 세 번이나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금 고산(琴孤山)과 배용길, 김기 두 분을 가리키신 것이다.


10일 .
바람이 포근하고 날씨가 맑아 봄날 같았다. 선생님께서 일찍 일어나 세수하시고 수붕을 시켜 술을 따르게 하셔서 몇 잔을 드셨다. 다음 연대사 법당과 선승당 등을 돌아보고 동쪽 절벽으로 올라가 문수를 향해 갔는데 서너 번 쉬고서야 참란대(驂鸞臺)에 이르렀다. 승려 천일(天一)이 그 방으로 안내해서 들어가니 바로 하대승암(下大乘庵)이었다. 승려 덕장(德藏)이 만월암(滿月庵)으로부터 와서 인사를 했는데 문자를 제법 알아서 명(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신재(愼齋) 주세붕의 ‘유청량록(遊淸凉錄)’을 소리 내서 외우기를 마치니 선생님께서 그 문장과 식견에 두 번 세 번 감탄하셨다. 덕장이 곁에 있다가 이를 베껴 써서 산의 암자에 걸어두게 해달라고 청하니, 선생님께서,“네 말에 일리가 있다.”라고 하셨다.

아침이 너무 늦어서 여러 사람이 자못 지체되었다. 간이 농담으로,“ 계로(季路) 가 여기 있었다면 분명히 벌써 화난 얼굴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셨다.
아침을 먹은 뒤 금학고는 돌아가고 간, 명석, 수붕, 석붕 등도 유람하러 나가서 내가 홀로 선생님을 모시고 있게 되었다. 승려 쌍명(雙明)이 시를 청하자 선생님께서 7언 절구 한 수를 먼저 읊으셨고, 내가 차운했다. 오후에 멀리서 피리소리가 들렸는데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듯했다. 바로 성주(城主) 금 고산이 온 것이었다. 문을 열고 보니 백발 노인이 소를 타고 있는데, 앞에는 피리를 들고 뒤에는 술병을 차고 있었다. 이 또한 산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연대사를 거쳐 가마로 대승암까지 온 것인데 선생님께서는 벗이 멀리서 찾아와 즐거워 하셨다.

이때 간 등도 돌아왔다. 유람한 곳을 물어보았더니 겨우 백운(白雲)과 만월암에 있다가 왔다고 한다. 선생님의 술을 따르고 두 번 돌려마셨다. 내가 농담으로, “금학고가 가시자 금성주가 오셨으니, 이른바 작은 것이 가니 큰 것이 온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고, 선생님께서도 미소를 지으셨다. 고산 어른이 우리들을 데리고 문수암과 보현암 등의 암자를 돌아보시고 나서 환선대(喚仙臺)에 앉아서 동자에게 피리를 불게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홀로 참란대를 배회하시면서 눈을 감았다가 멀리 바라보시곤 하시며 골똘히 생각하셨는데 석연치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지장전으로 걸어 내려와 간을 시켜 벽에 이름을 쓰게 하고 이틀을 묵었다.

내가 5언 절구 한 수를 지어 올리자 선생님께서 화답하는 시를 써주셨다. 이날 밤은 더욱 조용해서 문답한 내용이 제법 자세했다. 우리나라의 풍습과 고금인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개탄하기도 하고,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가리기도 하며 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감히 기록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될까 우려해서이다. 고산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옛날 보우(普雨) 가 있을 때 영남의 선비들이 글을 돌리고 모여 임금님의 잘못을 함께 규탄하려 했는데, 이는 우리들이 해도 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라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이것이 도리어 유자들이 분수를 넘는 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 하셔서 그때 우리 고을의 선비들은 모두 나가지 않았다네.” 라고 하니, 월천 선생이 말씀하시기를,“그 말이 옳네. 그러나 또한 어찌 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한 가지 의론을 고수하지 못했겠는가?

대개 그때 듣자니 대제학 심희수(沈喜壽, 1548년 ~ 1622년)가 선현을 문묘에 올려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면서 왕 양명(王陽明), 진 백사(陳白沙) 를 설문청(薛文淸), 호 경재(胡敬齋)와 함께 올리자고 말하였다는데, 저 왕 양명, 진 백사는 이단의 학문을 하는 무리라 심희수가 이러한 의견을 내세운 것은 실로 인심과 세도의 오르내림과 망하고 융성하는 일이 달려 있는 큰 갈림길이 되는 것이었네. 우리들로서는 그때 논란하여 맹렬한 기세로 번지던 화를 막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이 먼저 산원에서 회의를 하고 글을 돌려 동지를 모으려 했던 것이네. 이것이 내가 진작 알고 있던 것으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네만 고산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급하지 않아서 보우 때의 일로만 보려고 한 것이네.”
라고 하셨다. 이는 실로 월천 선생께서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고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고산의 생각은 이것이 급하지 않다고 여기고 보우 때의 일로만 보려고 한 것이다. 만약 선생님께서 옳지 않다고 여기셨다면 도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맹자가 이르되, ‘서인이 일하러 오라고 하면 일하러 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라고 하시고 이어서 지난번 경서교정랑으로 임명한 교지를 받고 관에서 말을 보내 불렀지만 늙고 병들어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아마도 부르면 가서 일해야 한다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모두 말하기를,
“적당한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벼슬에 나아가셨다 해도 연세가 많으시고 길도 머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갑자기 창 밖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물어보니 승려들이 우리를 대접하는 일로 서로 다투는 것이었다. 나와 간 등이 아뢰기를,“승려들이 매우 사납고 자못 귀찮아하는 기색이 있으니 내일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좋다.”라고 하셨다.


11일 .
맑았다 흐렸다 하는 날씨가 어제와 비슷했다. 선생님께서 아침 일찍 연대사로 걸어 나가서 걸터앉아 계시니 승려 조일(祖一)이 그 스승 혜묵(惠黙)의 시축을 올렸다. 선생님께서 지으신 절구 두 수가 있었고, 시축 끄트머리에 배명서(裵明瑞)가 쓴 ‘평생 불가와 유가 사이에서 늙는구나’라는 시구가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이를 보고 웃으시더니 시축을 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인데 왜 그런 고생을 하겠는가 하시면서 바위 밑으로 던져버리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또 신재의 유록을 읽게 하셨는데 그 흥이 나고 감격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셨다. 그리고 일어나 왔다 갔다 하며 옛날 퇴도 선생이 와서 유람하시던 때의 일을 말씀하셨다. 또 금 고산이 퇴도 선생이 그때 여기서 지은 시 오륙 편을 외우자 모두 한참이나 서글퍼하였다. 이때 선생님께서 마음속에 생각하신 것은 분명 우리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었으리라.

밥을 먹은 뒤 간, 명석, 수붕, 석붕 등이 또 유람을 하겠다고 하였다. 대개 어제 가보지 못한 곳을 두루 둘러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역시 다 가지 못하고 반야대, 경일봉을 둘러보는 데 그쳤다. 조일이 작은 종이쪽지를 올리며 시를 써주기를 청하니 선생님께서 5언 절구 한 수를 써 주셨다. 그 다음에 고산이 썼고, 또 그 다음에는 내가 썼다. 선생님께서 내게 붓과 먹을 각각 하나씩 주셨는데 내가 이전에 수붕을 통해서 다 썼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해는 이미 정오를 지나 있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시자 모두,“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걸어서 성문까지 이르러 문루에서 쉬었다. 가마를 청해서 억지로 타시게 한 뒤에야 허락하셨으나, 사자항을 지나자마자 다시 말을 타겠다고 하셨다. 금윤고가 선생님을 위해 보낸 말이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가에 이르자 올 때처럼 말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시기에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바라보다 놀라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으나 선생님께서는 마치 큰 길을 가 듯 편안하게 걸으시며 잠깐 사이에 서쪽 강가에 닿으셨다.

고산과 간 등은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산도 산길을 가면서 소가 없으면 걷고, 걷다가 지치면 가마를 탔지만, 소를 탄 것은 얼마 안 되고 가마를 탄 것은 더욱 얼마 안 되었으니, 걸은 것이 실제로 3분의 2는 된다. 특히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으로 아마 이것도 세상에 드문 일일 것이다. 나는 아직 젊어서 힘이 강하다고 자부하였으나 다리를 건너자니 떨려서 발을 놓을 수가 없었고, 떨어질까 졸이는 마음은 다리를 건너고 나서도 오히려 더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었다.

박석촌의 냇가에서 쉬면서 내 술을 마셨다. 술이 한 번 돌자 선생님께서 고산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왜 독서를 하지 않는가? 늙고 쇠약해서 고서는 읽을 수 없다 해도 선사의 문집은 읽을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벌을 내려야겠네.” 라고 하시고는, 또 간을 부르시며 말씀하셨다.“너 같은 재주로 열심히 책을 읽지 않으니 너도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다.”라고 하셨다.

한참 있다가 출발했는데, 길을 떠나면서 선생님께서는 장인봉을 돌아보시고는 적이 감격함이 있는 듯했다. 일동(日洞)에 이르니 비가 내릴 듯 했다. 선생님께서는 곧바로 월천으로 가시려 했는데 고산이 자신의 서당에서 주무시기를 청하고, 여러 젊은이들도 걷기가 고생스럽다고 아뢰니 선생님께서 한참 있다가 말씀하시기를,“날은 저물고 길도 멀었으니 어찌 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머물기로 하셨다. 저녁에 비가 시원하게 내리다 곧 그치고 밤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내가 시 한 수를 올리니 선생님께서도 한 수를 지으셨다. 간이 산중에 읊은 시에 모두 차운해서 올리자 선생님께서 자못 허락하셨다.

이날 밤 온 강에 밝은 달빛이 비치고 빈 집엔 고요가 감도는데 선생님의 깨우치심은 밝고 안온하여 전날 밤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여쭙기를,“물을 건너실 때 하필 위험한 다리로 건너신 것은 무엇 때문이신지요?” 라고 하니 말씀하시기를,“평지처럼 디디고 서야 하는데 험하고 평탄한 길이라고 걷는 데 어찌 두 가지 방법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야기가 한때의 사귐에 미치자 젊은 시절 믿음으로 맺고 의리로 따른 친구로 순거(舜擧)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순거는 바로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으로 불행히도 명이 짧아 지금은 죽고 없다.

선생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뜻을 크게 세워야 한다. 수붕 등이 요즘 몹시 풀어져서 조금도 애써 노력하는 마음이 없는데 너희들은 모름지기 서로 꾸짖고 격려를 하도록 해라.” 라고 하시기에, “저희들도 그 지경에 있어서 남을 꾸짖을 겨를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내가 선생님께 여쭙기를,
“‘생업을 꾀하면 점점 재물을 논하는 마음이 생기고, 명예를 좋아하면 아첨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은 언제 지으신 것인지요?” 라고 하니, “젊어서 지은 것인데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네.” 라고 하시자 고산이, “제가 압니다. 이는 열여덟 살에 지으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여쭙기를,“‘순욱론(荀彧論)’을 쓰시자 퇴계 선생께서 감탄하여 마지않으셨다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 󰡒과연 그런 적이 있었지. 내가 논을 쓴 것이 겨우 예닐곱 편인데 이것이 마지막에 쓴 것이다. 선생님께서 의론한 글이 매우 좋다고 하시고 끝내 고치지 않으셨다.”라고 하셨다.그러고 나서 어릴 때 공부하던 순서를 여쭈었더니, “무자년 여름에 《대학》을 읽었는데 이때는 다섯 살 때로 집에 있을 때였고, 조금 자라서 선생님께 《통감》을 배웠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온계에 계셨는데 내가 자주 집에 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님께서 어찌 번거로운 것도 모르고 그리 자주 왔다 갔다 하느냐고 하셔서 그 뒤로는 감히 자주 가지 못했다.”라고 하셨다.

또 여쭙기를,“어려서 독서하실 때 몇 번 읽으시면 외우실 수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열서너 살 이전에는 열 번 읽으면 외우지 못하는 게 없었는데, 열다섯 살 이후부터는 숙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보통 책들도 거의 모두 백번 넘게 읽었다.”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자리에 드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산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내가 아직 곤하게 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코 고는 소리가 누구한테서 나는가?” 라고 물으시니 간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내가 잠결에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잠결에도 불러 깨우치게 한다는 것으로 이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많이 들었다.


12일 .
바람은 잠잠했으나 날씨가 고르지 않았다. 새벽에 고산이 술을 대접하며 내게 말하기를,
“지난번 자네가 산에 갔다 여기 와서는 맛좋은 술이 막 익었는데도 주인이 없어서 마시지 못하고 뚜껑만 열어보고 갔다고 하던데, 어찌 그리 옹졸한가?” 라고 하여 내가,“두려워서 감히 마시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어른이라면 그런 예의가 있어야지 뭐가 옹졸한가?” 라고 하시니 간이 말하기를, “오늘은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만, 손님은 많고 술은 많지가 않군요.” 라고 하니, 고산이 말하기를, “있긴 한데 시고 탁해서 어쩔거나. 그렇지만 젊은이야 술을 좋아하니 뭘 가리겠나?” 라고 하고 술을 걸러 내오게 하여 큰 술잔으로 거의 예닐곱 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백운지(白雲地)로 떠났는데, 고산 어른의 선영이 있는 곳이다. 승려로 있다가 환속한 두세 사람이 재사에 살고 있었는데 마련한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앉아 있는 사이에 눈꽃이 하늘을 뒤덮어서 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산이, “날이 개지 않으면 묵어야겠습니다.”라고 하여 내가,“옛날에 바다를 건너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파도가 드세게 일어나서 배가 많이 뒤집히는 것을 보고는 건너지 못하고 망설였는데, 조금 있다가 한 군자를 만나게 되어 몹시 좋아하며 짐을 꾸리면서 갑자기 여우같이 날래게 움직이더랍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 사람의 위엄 있는 얼굴과 덕 있는 모습이 바다 신을 잠잠하게 할 것이니 내가 믿고 가겠다.’고 하더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다가 잠잠해지고 건너자마자 바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번 우리 산행도 그렇습니다. 산에 오던 날은 아침에 바람이 불다가 오후에 그치더니, 산을 내려가는 날은 밤에 바람이 불다가 아침에 그치는군요. 또 진사일(辰巳日)에는 계속 비가 오고 맑은 날이 적었는데 그저께와 어제는 모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동짓달은 그 기운이 당연히 맵고 날씨도 찹니다. 그런데 며칠간은 따뜻하여 춥지 않았고 기운도 맵지 않았으니, 이번 산행에 어찌 믿을 데가 없었겠습니까? 또 길을 떠날 때에는 이 눈이 다시 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크게 웃으시며,“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자네는 참으로 갖다 붙이기를 이리도 좋아하는가?” 라고 하셨는데 조금 있으니 과연 날이 맑아졌다. 이에 선생님께서 절구를 하나 지으셨고 나와 간이 화답하였다.

식사 후 다시 길을 떠났다. 퇴계 입구에 이르러 이 선생의 집과 묘를 지나갈 때에는 모두 말에서 내렸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는 천연대(天淵臺)에 올라가려 했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게 될런 지는 모르겠다. 그때 누가 배 찰방이 왔다고 전했다. 일행이 모두 그는 지난번에 갔었다고 하면서 다시 물어보도록 하였다. 찰방 정윤위(鄭允偉)였다. 관직이 같아서 잘못 전한 것이었다.

온계로 돌아왔다. 조금 있자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밤이 되자 펑펑 쏟아져 거의 한 자나 쌓였다. 오춘당이 시로 희롱하기에 화답하였다. 예천(醴泉) 황회원(黃會元)이 길을 가다 선생님께서 산을 여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사운시(四韻詩)를 지어서 춘당 편에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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