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26 11:44:51 조회 : 3554         
5000년 歷史 를 움직인 10人의 大 한국인 이름 : 관리자
  • 5. 김옥균

    쇄국 빗장 풀고 개혁·개방 선도한 시대의 풍운아

▲ 1872년 알성문과 장원급제/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 방문/ 1884년 갑신정변 주도 / 1884년 일본 망명/ 1894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자객에게 피살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묘책은 무엇일까? 한 세기 전 풍운아 김옥균((金玉均·1851~1894)을 고뇌하게 한 화두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대고 무력에 호소하는 유혈 쿠데타라는 수단으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고 했으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아시아 3국이 힘을 모아 서구의 침략을 막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제창한 바 있다.

오늘 우리 지식사회는 세 가지 해법을 내놓는다. 한국사학자들은 제국과 당당히 맞설 민족을 단위로 하는 자주적 국민국가의 완성을, 경제사학자들은 제국과의 타협을, 그리고 서양사학자들은 유럽공동체(EU)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 이를 먼저 고민했던 김옥균은 분명 선각자다.

그러나 국민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를 세우려고 했으면서도 제국과 타협하려 했으며, 민족을 넘어 일종의 동아시아 공동체도 모색했던 이중성과 모호함이 그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그만큼 시대와 지향에 따라 긍부(肯否)가 엇갈리고 호오(好惡)가 교차하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그를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기억하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러운" 인물로 깎아내린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생각을 함께한 개화파 인사들의 평가가 엇갈릴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은 내용이었을 것 같은 북한학계의 평가도 늘 변해 왔다. 주체사상이 대두하는 1950년대 중반을 경계로 그에 대한 평가가 '친일주구'라는 악평에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을 주도한 혁신관료'라는 찬탄으로 뒤바뀌었으니 말이다.

오늘 우리 학계의 김옥균관도 평자가 서 있는 곳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서로 충돌한다.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이 하나 되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가슴에 품은 한국사학자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던 그의 이상에는 공명하되 일본에 의존하고 민중의 힘을 도외시한 그의 전략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이처럼 김옥균에 대한 기억의 편차가 크다는 것은 갈가리 나뉜 우리 사회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다원화한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시금석일 수도 있지 않을까?

허동현_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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