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1 10:43:25 조회 : 942         
화냥년 과 호로자식 의 유례 이름 : 경 진
“화냥년" 과  “호로자식”의 유래
 "還鄕女"와 "胡虜자식 " 

사람들은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자를 나쁘게
욕할 때 “화냥년", 그리고 버릇없는 못된 사람 주로
남자를 말할 때 “호로자식”이란 욕을 하는 경우를
들을수 있다. 이 욕 들의 역사적 유래를 보자 .
 
 ☆ 仁祖때 丙子胡亂의 수난 ☆
 
後金은 1636년 국호를 淸으로 바꾼 후,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兄弟관계를 폐기하고 새로 君臣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했는데 조선이 거부하자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大軍에 밀린 朝鮮軍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仁祖는 삼전도
에서 무릎을 꿇고 淸과 君臣(군신)의 義(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리고 斥和論(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淸으로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청군들은 철수하면서
상당히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갔다.
 
 仁祖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다
며칠후 백성들이 궁궐 앞에 모여들어 淸나라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 는 물론 아내를 구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仁祖는 淸에 끌려간 인원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婦女子들
로서, 그 수가 무려 50만 명이나 됨으로 淸에 사신을 보내어
돌려보내 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淸나라는 끌려간 사람들에 등급을 매겨놓고 엄청난
돈을 요구함으로 仁祖는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이 각자 재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청나라에 가서 데려오도록 하여 상당수의
女子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女人들을 還鄕女(환향녀)라
부르면서 온 동네에서 고생하고 돌아왔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이 還鄕女들은 淸나라에 끌려가서 못된 性關係를
배워와서 온 동네 남자들을 모두 해치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女子들이 사회 문제화되고 있으나
국가에서 묘한 방법이 없으므로 그대책을 각 가정에서
엄히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각 가정에서는 老人들이 밤낮으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부녀자 들의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였음은 물론,
부득이 외출을 할 때도 치마 같은것을 뒤집어 쓴후 눈만
내놓고 다니게 하고 게다가 감시자를 동행케 했다.

 이때부터 오랑케에 끌려 갔다온「還鄕女를 화냥년』
이라고 하며,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환향녀들은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아, 거기서 낳은 자식을 호(胡)로 즉 오랑케의 자식
이라 하여 사회에서 냉대했다.
즉, 還鄕女 나 胡虜자식들은 멸시의 대상이 아닌
국가의 피해자들 이었다.
 
왜냐하면 왕이 평소에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전쟁에 대비도 하지 못했고. 전쟁이
나자 신하들은 왕을 홀로 두고 도망가기 바빴고..

또한 남자들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결국
나약한 여성들만 끌려가서 청군들의 노리개가 되어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다 돌아왔는데

조선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지는 자가 없이 모든
것을 불쌍한 여자들 에게만 죄를 뒤집어 씌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당시에 그들을 괄시, 멸시만 할줄알았지 그들을 국가
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질 못한 산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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