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번 ● 옛 우산국于山國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 (2/6)
따온 글 松泉 金永東
①청동기 시대는 울릉도에 고인돌, 토기, 갈돌과 갈판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②신라에 복속은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 아슬라 주阿瑟羅州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 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 마립간 ] 울릉도에 대한 언급 자체는 더 이전의 중국 측 기록에도 간략하게 나타나지만 최초로 한민족 왕조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이사부의 정벌 이후부터이다. 정벌에 대한 기록은 삼국 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으며, 내용에 큰 차이는 없다. 512년에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배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나누어 싣고, 우산국으로 향했고,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이들을 풀어놓겠다고 위협하자 항복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착안해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 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 사자를 깎는 행사를 하며,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 나오는 가사 '지증왕 십삼 년 섬나라 우산국'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우해왕과 풍 미녀라는 관련 설화가 울릉도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도 신라의 직할령에는 편입되지 않고 존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으로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신라는 외왕 내제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복속 이전 우산국 시절이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전에 역사가 시작되긴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 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통일신라 이후부터라고 한다. 종교는 언젠가부터 신라를 따라 불교를 받아들인 듯. 훗날 고려 시대 ★김유립이 거의 빈 섬이 된 울릉도를 조사했을 때 사람은 없지만 돌로 만든 탑과 불상, 쇠로 만든 종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지리지에 있다. 일본 측 기록인 일본 삼대 실록에 따르면, 863년 11월 울릉도 주민 54명이 지금의 교토부 북쪽 해안지역인 탄고노쿠니丹後國 지방에 표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은 말도 글도 안 통했지만 우두머리 시조사屎鳥舍는 한문을 조금 알아서 자신들을 신라 동쪽의 섬나라 세라국細羅國 사람이라 소개했다. 이를 통해 적어도 통일신라 후기에는 우산국을 세라 국이라고도 불렀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일본 정부는 이들을 같은 시기 일본 다른 곳에 도착한 별개의 신라인 그룹과 함께 돌려보냈다고 한다. 신당서, 태평 광기에 언급되는 장인(국가)이 우산국이라는 설이 있다. ③고려 시대 이후는 후삼국시대인 930년(고려 태조 13년), 우릉도주가 보낸 사신 백길白吉과 토두土豆가 고려로 와서 공물을 바치고 조공 관계가 생겨났다.(고려사절요, 동사강목)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사에서 우산국의 정보망이 본토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어업무역 등 동해안 무역망에서 흘러드는 정보를 토대로 한반도 본토의 실력자를 추려내어 연결을 시도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에 이어 고려 때까지 느슨한 조공 관계가 계속되었고, '고려에 복종하는 고려 본토 바깥의 작은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1004년에 우산국 사람들이 일본까지 표류해서 양식을 주고 돌려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이게 일본 기록에서 최초로 우산국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사례다. 여기서도 우산국을 고려의 속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1018년, 1019년에 여진족 해적의 공격을 몇 차례 받았고[7] 약탈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했다고 한다. 웬 뜬금없이 여진족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려 초기엔 지금의 함경도에 여진족이 거주했고, 지도를 보면 함경도에서 내려오면 울릉도가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다. 참고로 1019년 여진족 해적들은 쓰시마섬, 일본 본토 일부까지 약탈할 정도였으니 중간에 끼인 우산국은 뭐 말할 것도 없다. 1022년 결국 못 견디고 고려 본토로 도망쳐온 우산국 백성들을 예주(禮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정착하게 했다. 우산국이라는 나라가 이때 망했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지만 나중에 텅 빈 섬이 되는 걸 봐선 우산국이라는 나라는 이때 사실상 망했다고 봐야 할 듯.
④우산국 관련 기록은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
안무사금린우환자우산도 헌토산대죽수우피생저면자검박목등물 차솔거인
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男女幷八十六 /
삼명이래 기도호범십오구남녀병팔십륙 /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于山島)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수우피·생저·면자·검박목 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ㅡ 《태종실록》
于山島鬱陵島一云武陵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及業掌空 南峯梢卑 風日清明則峯頭樹
우산도울릉도일운무릉일운우릉 이도재현정동해중 삼봉급업장공 남봉초비 풍일청명칙봉두수
木 及山根沙渚 歴歴可見 風便則二日可到 一説于山鬱陵本一島 地方百里 /
목 급산근사저 력력가견 풍편칙이일가도 일설우산울릉본일도 지방백리 /
우산도와 울릉도 또는 무릉武陵 또는 우릉羽陵 두 섬이 이 현(울진현)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허공에 있는데, 남쪽의 봉우리는 약간 낮다. 바람이 불고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고,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하나의 섬이고 지방은 백 리에 걸쳤다 한다.
ㅡ 《신증동국여지승람》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흑색 산구黑色 山鳩·해의海衣·복어鰒魚·문어文魚·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相距가 각각 50여 리里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하략) ㅡ 《세조실록》 ★우산도(지금의 울릉도)는 고려 중기까지 독립 왕국이었다. 1032년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고려 조정에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직 토착 세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 전까지는 나라처럼 우산'국'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서는 행정 구역처럼 우릉'성'으로 나온다. 이 행정 구역의 변화를 여진 해적 피해로 인한 위상 약화로 보기도 한다. 혹은 이전의 백길과 토두와는 달리 이름이 굉장히 길고 이상한데 어쩌면 차후에 여진 해적이 일부 눌러앉으면서 언어와 종족 구성의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 일 수도 있다. 이후 1141년 울릉도蔚陵島에 사람을 보내 과핵菓核과 나뭇잎 중 이상한 것을 취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1157년 울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조사하게 하는데 거의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있는 무인도처럼 묘사하는데 이 시기에는 우산국인들을 대신해 눌러앉은 여진 해적들도 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와 탐라국이 직접 단절될 법한 사건 없이 탐라국 국민의 혈통이 대체로 제주도로 쭉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당대 우산국 주민들은 여진족 해적의 침략을 받아 대부분은 한반도 본토 울진군 지역으로 이주했고 조선 시대에는 공도 정책으로 인해 한때 거의 사람이 없는 텅 빈 섬이 되었다. 현재 울릉도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19세기 ~ 20세기에 주로 경상도에서 새로 이주한 주민들로, 옛날 우산국에 살았던 주민들과는 큰 관련은 없으며, 우산국 주민들이 대거 이주한 울진군의 경우에는 현재에는 경상북도 산하이지만 1963년 이전에는 강원도 산하였다. 그래서 한반도와 거리 차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사람들의 언어가 본토 경상도 사투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주>
★우해왕과 풍미녀라는 관련 설화는 우산국의 우해왕과 대마도 수장의 딸 풍미녀에 관한 전설은 울릉도(우산국)의 멸망과 이사부의 정벌 배경을 담은 대표적인 지역 설화이다
★우산도(지금의 울릉도)는 고려 중기까지 독립 왕국이었다. 울릉도의 우리나라 영토화는 6세기 초 신라시대가 아니라, 11세기 초 고려 현종 때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사부의 정벌로 우산국은 포말처럼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라에 조공을 함으로써 속국관계를 유지하면서 500년 이상 더 독립왕국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우산국을 최종 멸망시킨 것은 우리 선조가 아니라 여진족이었다는 주장도 새롭다. 만약 우산국이 512년 이사부(본명 김태종) 정벌로 신라 영토에 편입됐다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우산국에 대한 기록이 나와야 한다. 「지리지」에서 신라 시대 섬을 군현으로 설치한 경우는 남해군과 거제 군을 들수 있다.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삼국통일로 신라의 영토가 된 鵠島(곡도·백령도)란 섬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지리지」에는 탐라국이나 우산국이 기록돼 있지 않다.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이 512년 이후 신라에 항복했지만, 신라의 영토 안에 편재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게 김교수의 주장이다. 따라서 512년 이사부의 정벌로 우산국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 귀복해 연합동맹을 구축하면서 공물을 바치는 복속국가로 왕국의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것. 고대사회에서 공물 진상은 복속 또는 속국 화를 의미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적대 화 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졌다. 이사부의 정벌은 우산국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게 아니라, 복속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신라로서도 동해 한가운데 섬나라를 영토화해 직접 통치를 하기 어려웠으므로 우산국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는 선에서 타협을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근거는 고려사에 우산국의 명칭이 드러난다. 고려 현종 때까지다.
① 芋陵島(우릉도)에서 白吉(백기)과 土豆(토두)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 백길에게 正位, 토두에게 正朝의 품계를 각각 주었다. (「고려사」 세기 태조 13년 8월) (서기 930년)
② 우산국이 동북 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였으므로 ★李元龜를 그곳에 파견하여 농기구를 주었다. (「고려사」 현종 9년 11월) (서기 1018년)
③ 우산국 백성들로서 일찍이 여진의 침략을 받고 망명하여 왔던 저들을 모두 고향에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사」 현종 10년 7월) (서기 1019년)
④ 도병마사가 여진에게서 약탈을 당하고 도망하여 온 우산국 백성들을 禮州(경북 영해)에 배치하고 관가에서 그들에게 식량을 주어 영구히 그 지방에 編戶로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 (「고려사」 현종 13년 7월) (서기 1022년)
「고려사」 ①의 기사는 이사부의 정벌 기록 이후 418년이 지난 기록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병산전투(안동)에서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잡은 때였다. 우산국은 독자세력을 유지하면서 후삼국의 쟁패전을 나름대로 관찰하다가 판세가 급격하게 고려에 기울면서 고려에 공물을 바치며 조공 국으로 입장을 확인했다는 것. 나라國라고 자처하지 않고 우릉도라는 명칭을 쓴 것은 반도의 주도권을 쥘 나라에 스스로를 낮춰 표현한 것이 기록에 남았다는 해석이다. 이에 고려는 우릉도 사신에게 정위, 정조의 품계를 주어 정치적 복속관계를 형성했다. 정위, 정조는 향리나 탐라의 왕족, 여진의 추장 등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 수여하는 향직이다. 후삼국 통일을 목전에 둔 고려로서는 현실적으로 지배권을 확보하기 어려운 울릉도를 독립국가로 인정하며 복속관계를 맺는 것으로 타협했다는 해석이다. ②~④의 기사는 고려 현종 때인 1018~1022년에 함경도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략했을 때의 기록인데, 이때 우산국이라는 명칭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고려의 군현제가 완성되는 현종 9년을 전후한 시기에 우산국이 고려의 군현에 속해 있지 않은채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김교수는 주장한다. 고려 현종이후 우산국이라는 기록이 사라진다. 그러면 우산국은 언제, 어떻게 멸망했을까. 김호동 교수는 「고려사」에서 우산국 기록이 사라지는 고려 현종때 여진족의 침략에 의해 우산국이 멸망했을 것으로 보았다. 함경도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여진족(동여진)의 땅이었다. 이곳의 여진족은 육상으로, 해상으로 고려를 침략, 약탈을 일삼았다. 이들은 일본 쓰시마 큐슈까지 침범해 일본에서는 刀伊賊(도이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동여진은 11세기초 고려의 동해안 북쪽 접경을 침범하기 시작해 울진까지 내려왔다. 고려의 동해안이 여진의 군사적 위협에 노출됐고, 고려 조정은 ‘동북의 해적’을 막기 위해 동해안에 대규모 축성사업과 수군 및 함대 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동여진 해적들은 공격목표를 바꿔 울릉도와 일본을 침공했다. 1019년(현종 10년) 여진 해적이 50척의 선단을 이끌고 쓰시마섬, 이키섬. 하카다 등지를 침입해 큰 피해를 입힌다. 일본 조정은 사원에서 제사를 지내며 여진 해적을 물리치도록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 해적은 일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고려 동해안과 우산국을 거쳐 가면서 노략질을 했고, 우산국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여진족의 침공으로 울릉도는 쑥대밭이 됐고, 그때부터 거의 사람이 살지 않게 됐다. 고려 의종 11년(1157)의 기록에는 “울릉도가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석불, 철종, 석탑’ 등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 때 높은 수준의 불교문화를 갖고 있던 울릉도가 여진족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것이다. 김호동교수는 현종 때를 마지막으로 우산국의 명칭이 보이지 않고, 그 후 우릉도 내지 울릉도라는 병칭이 보인다는 점에서 우산국의 멸망시기를 여진족의 침공으로 자립기반을 잃은 11세기 초로 잡았다. 섬에 살던 주민들은 모두 육지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했고, 그 과정에서 우산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울릉도가 있으며, 울진현에 귀속해 있다”고 정리돼 있다. 이는 조선조 세종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에 울릉도가 고려의 군현에 편재돼 있어 영토화 했음을 보여준다. 김호동교수는 “삼국시대라는 인식의 틀을 깨, 탐라국·우산국·가야등의 역사를 포괄하는 고대사를 그려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반론>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울릉군 소재)은 “이사부 정벌로 우산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것은 이나다고 한 주장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경북 울진군청 소속 심현용 박사(고고학)는 “이사부(본명 김태종) 정벌로 우산국이 조공관계를 유지하며 복속한 사실로도 영토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립은 고려 전기에, 명주도감창전중내급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생애 및 활동사항
은 1157년(의종 11)에 명주도감창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殿中內給事로 왕명을 받아 우릉도羽陵島: 지금의 경상북도 울릉도)에 사람이 살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였다.
★이원구李元龜는 고려 시대 현종 재위기인 11세기 초에 활약한 무신이자 관료이다 통주성 사수 (1010년~1011년): 거란의 제2차 침입 당시 방어사防禦使로 재직 중이었다. 우산국 농기구 전달 (1018년)은 우산국(울릉도)이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1018년(현종 9) 11월에 그곳으로 파견되어 민생 안정을 위한 농기구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