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9 16:38:09 조회 : 297         
52번 ●始祖太師(시조 태사)墓壇記(묘단기)- 농암 김창협 기 (3/3) 이름 : 송천 김영동

                 52번 ●始祖太師(시조 태사)墓壇記(묘단기)- 농암 김창협 기 (3/3)

                              < 元文과 풀이 >                                   조사자 松泉 金永東

始祖太師(시조 태사) 墓壇記 ( 묘단기) (農巖集卷之二十四記에서)

글쓴이: 김창협[金昌協]1651(효종 2)~1708(숙종 34). 호는 농암(農巖).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壽恒)의 둘째.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1 始祖太師金公諱宣平。新羅末。爲古昌城主。麗太祖討甄萱。公與權幸,張吉。以郡歸附。

시조태사금공휘선평。 신라말。위고창성주。려태조토견훤。공여권행,장길。이군귀부。

太祖得之。遂有甁山之捷。由是義聲益振。卒以滅萱。本公等三人力也。

태조득지。수유병산지첩。유시의성익진。졸이멸훤。본공등삼인력야。

<풀이> 시조(始祖) 태사(太師) 김공(金公)의 휘(諱)는 선평(宣平)이시니, 신라 말기에 고창 성주(古昌城主)이셨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적에 공께서는 권행(權幸)·장길(張吉)과 함께 군(郡)으로써 귀부(歸附)하여 태조가 이를 얻고 나서 드디어 병산(甁山) 싸움의 승리가 있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의병(義兵)의 성세(聲勢)가 한층 더 떨치게 되어 마침내 견훤을 물리치게 되었으니,이는 본래 공을 비롯한 세 분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2. 策功。首以公爲大匡。權幸,張吉爲大相。俱賜號三韓壁上功臣。爵太師。陞古昌爲安東府。

책공。수이공위대광。권행,장길위대상。구사호삼한벽상공신。작태사。승고창위안동부。

公旣卒。安東民。思其功德。立廟府司。與權張二太師並享。至今不絶。事具退溪李文純公所爲

공기졸。안동민。사기공덕。립묘부사。여권장이태사병향。지금불절。사구퇴계리문순공소위

記中(기중)。

<풀이> 공(功)을 봉하는 데 있어 제일 으뜸으로 공을 대광(大匡)으로 삼았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大相)으로 삼아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는 작호(爵號)와 함께 태사(太師)라는 벼슬을 내렸고, 고창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며, 공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안동 고을 백성들이 공의 공덕을 사모하여 안동부의 아문 안에 사당을 짓고 권 태사·장 태사와 함께 제향(祭享)을 받들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滉)이 쓴〈安東府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墓增修記)〉에 갖추어 있다.

3.蓋當公之守古昌也,羅運旣訖。而逆萱戕虐君父。義在必報。顧公以孑然一孤城。當凶鋒之衝。

개당공지수고창야, 라운기흘。이역훤장학군부。의재필보。고공이혈연일고성。당흉봉지충。

不能自立而有爲。則決策附麗。共滅讎賊。以自伸其義。此殆與張司徒佐漢滅秦楚。以報韓仇者

불능자립이유위。칙결책부려。공멸수적。이자신기의。차태여장사도좌한멸진초。이보한구자

相類。(상류)

<풀이> 대개 공께서 고창을 지키고 계실 당시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었고 역신(逆臣) 견훤이 군부(君父)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의리상 반드시 보복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공께서는 외로이 외로운 하나의 성을 돌보며 사나운 적군의 기세를 막아내려면 능히 자립으로 하지 못할 경우에 고려에 귀부하는 대책을 내려서라도 함께 원수의 적을 물리치고 스스로의 의리를 펴야 할 상황이었다. 이는 마치 장량(張良)이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물리쳐서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은 일과 비슷하다.

4.而其遺風所激。民勇於義。如夜別抄及紅巾賊之亂。皆能出死力。以衛君上。遂成美俗。

이기유풍소격。민용어의。여야별초급홍건적지란。개능출사력。이위군상。수성미속。

此尤公之所以爲德於一方。而其於廟食百世。宜矣。

차우공지소이위덕어일방。이기어묘식백세。의의。

<풀이> 그래서 공의 유풍(遺風)에 격동되어 백성들도 의리에 용감하였다. 야별초(夜別抄) 및 홍건적(紅巾賊)의 반란에도 모두 나서서 사력(死力)을 다하여 임금을 호위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었다. 이는 더욱이 공께서 한 지방에 덕을 베풀어 놓은 까닭으로 이 세상 오래도록 제향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5. 獨公墓宅。歲久失其處。勝覽記。其在府西古台莊里 而自曾祖文正公府君。嘗率諸宗人。

독공묘댁。세구실기처。승람기。기재부서고태장리 이자증조문정공부군。상솔제종인。

徧行尋求。至爲文以禱于天燈山而竟不得焉。府西十餘里。有峰曰台莊。卽天燈山之左麓也。

편행심구。지위문이도우천등산이경불득언。부서십여리。유봉왈태장。즉천등산지좌록야。

其下地名堂洞。而村人樵獵者。皆稱太師墓洞云。

기하지명당동。이촌인초렵자。개칭태사묘동운。

<풀이> 유독 공의 묘소가 세월이 오래 되면서 그 장소를 잃은 채《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김선평의 묘: 부의 서쪽 옛 태장리(台莊里)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여서 증조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尙憲) 부군께서 일찍이 여러 종인(宗人)을 거느리고 산을 두루 다니며 찾았고, 심지어 축문(祝文)을 지어 천등산(天燈山) 신령께 빌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안동부 서쪽 10여 리에 있는 태장이라는 산봉우리가 있으니 곧 천등산의 왼쪽 기슭이다. 그 밑에 당동(堂洞)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는데, 이 마을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모두 태사묘 마을이라고 일컬었다.

6.崇禎丙寅。宗人金인(土+寅)等。以其名尋求至其地。有申姓者葬其中累世矣。

숭정병인。 종인금인(토+인)등。이기명심구지기지。유신성자장기중루세의。

直一墓後十許武。有若古冢而夷者。堦砌外周。廣輪可辨。蓋類大葬焉。而其形局案對。

직일묘후십허무。유약고총이이자。계체외주。광륜가변。개류대장언。이기형국안대。

又多與古籍及鄕父老所記者合。旣十八九可徵。

우다여고적급향부로소기자합。기십팔구가징。

<풀이> 숭정(崇禎:명 의종의 연호. 천계(天啓)6 년 병인(丙寅:1626인조 4 년)에 종인 ★김인(金仁) 등이 이 이름을 가지고 그 곳에 가서 찾으니 신씨(申氏)라는 자가 여러 대에 그 곳에 묘를 썼고, 바로 그 묘의 뒤편 10여 보에 마치 무너진 고총(古冢)처럼 보이는 것이 평평하게 되어있는데, 계체(階砌가 둘러 있고 윤곽을 분변할 만하여 살펴보니 대체로 큰 묘지와 같고 형국(形局)과 안대(案對)가 또 고적(古籍) 및 시골 부로(父老)들이 기록한 내용과 대개 일치하여 이미 10에 8,9는 입증이 될 만하였다.

7.而又聞申姓之葬也。實發二古冢。瘞之他所。而於砌下。又得埋石若誌者匿之。益可疑。

이우문신성지장야。실발이고총。예지타소。이어체하。우득매석약지자닉지。익가의。

於是諸宗人。相率具其事。訟之官。官爲逮問。果得 其發冢狀。卽掘去之。而石終不可得。

어시제종인。상솔구기사。송지관。관위체문。과득 기발총상。즉굴거지。이석종불가득。

無以爲驗。官亦不肯竟其事。事遂已。

무이위험。관역불긍경기사。사수이。

<풀이> 또 들으니 신씨가 묘를 쓸 적에 실로 두 개의 고총을 파내어 다른 곳에 묻었고 또 그 섬돌아래에서 또 지석(誌石)과 같이 생긴 돌이 나와 감추었다고 하니 더욱 의심스러워하였다. 이에 여러 종인들이 서로 나서서 이 사실을 갖추어 적어 관가에 고소를 하게 되었고 관가에서 신씨를 체포해서 심문한 결과 과연 고총을 파내었다는 사실을 자백 받아 즉시 신씨의 묘를 파내었으나, 돌은 끝까지 찾지 못하여 입증할 수가 없었고, 관가 역시 이 일을 끝까지 추궁하려 하지 않아서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8.旣已無可奈何。則有言曰。惟我太師。功在羅麗之際。名顯史策。德施鄕邦。子姓蔭庥。

기이무가내하。칙유언왈。유아태사。공재라려지제。명현사책。덕시향방。자성음휴。

不爲不蕃。而衣冠之葬。失不知處。歷幾百年。灑掃莫及。今幸幾得眞兆。而顧爲奸人盜占。

불위불번。이의관지장。실불지처。력기백년。쇄소막급。금행기득진조。이고위간인도점。

塋域毀傷。碑版泯滅。卒無以驗其實而加封築焉。痛心疾首。其何以慰追遠之思。

영역훼상。비판민멸。졸무이험기실이가봉축언。통심질수。기하이위추원지사。

<풀이> 일은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자 의논하기를, <<우리 태사께서는 신라와 고려의 시대에 공로가 있어서 이름이 역사에 드러나고 공덕이 향방(鄕邦)에 베풀어졌으며, 자손들이 그 음덕을 입어서 번창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의관 등이 묻어 있는 묘소를 실전하여 장소를 모른 채 몇 백 년이 지나도록 향사 享祀를 지낼 길이 없다가, 지금 다행히 진짜 묘소를 찾을 번하였으나 간인(奸人)의 도굴로 인하여 묘역이 훼손되고 비석이 인멸되어 마침내 그 사실을 입증하여 봉축(封築)을 가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을 정도로 걱정되니 조상을 추모하는 그리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는가.

9.唯古者之祭。固有望墓而壇者。今若倣而爲之。使來者得以彷像其體魄所在。而耕犁樵牧。

유고자지제。고유망묘이단자。 금약방이위지。사래자득이방상기체백소재。이경리초목。

亦無敢闌入焉。則於禮其或可。咸曰然。

역무감란입언。칙어례기혹가。함왈연。

<풀이> 예전의 제사도 본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올린 사례가 있으니, 지금 만약 이 사례를 본떠 제단을 쌓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 체백(體魄)이 계시는 곳을 짐작하게 하고, 또한 밭을 갈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이들이 역시 감히 들어갈 수 없게 한다면 예법에 있어 옳을 수도 있소.>>하니, 모두들 그렇다고 하였다.

10.遂卜用某年某月某甲子。除地爲壇於洞中。旣成而祭。宗人咸會。 自是春秋享祀。

수복용모년모월모갑자。제지위단어동중。기성이제。종인함회。 자시춘추향사。

一如上冢儀。期永久遵行。而且謀立碑壇側。鑱記其事。以詔後之人。伯父命昌協草具其本末。

일여상총의。기영구준행。이차모립비단측。참기기사。이조후지인。백부명창협초구기본말。

以備立言者採錄。謹書之如此云 //

이비립언자채록。근서지여차운 //

<풀이> 드디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갑자년에 날짜를 잡아 동네 안에 터를 닦고 묘단을 쌓아 제사를 올리기로 하였다. 공사가 이루어지고 나서 제사를 올리니 종인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로부터 봄가을의 제향을 일체 묘소에 올라가서 거행하는 예의처럼 봉행하고, 영원히 준수하기로 약속하고 또 제단 옆에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새겨서 후인들에게 깊이 전할 것을 도모하였다. 백부(伯父:壽增)께서 창협에게 명하여 이 사실의 전말을 갖추어 적어서 뒷날 입언자의 채록에 대비하라고 하시므로, 삼가 이와 같이 쓰는 것임. 후손 창협 적음. //

<주>

★김인(金仁)은 조선 인조 4년(1626년) 병인년, 종인(宗人)이었던 김인(金仁) 등은 옛 문헌의 기록과 구전을 바탕으로 경상북도 안동부 서후면 태장리(당동) 일대를 직접 수색하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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