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7 07:45:01 조회 : 452         
51번 ●백두산은 왜 반쪽일까? ♣ 이름 : 송천 김영동

51번 ●백두산은 왜 반쪽일까? ♣

따온 글 松泉 金永東

백두산白頭山 가운데 호수가 있다 천지天池이다. 천지 호수 한가운데에는 동북쪽 ★안부鞍部와 서남쪽안부로 줄이 그어져 있다. 선의 남쪽 54.5%는 북한 땅, 선의 북쪽 45.5%는 중국 땅이다. 백두산 전체로 보면 중국이 약 3/4이고 북한이 약 1/4 이다. 대부분 관광은 중국 땅에서 한다. 흔들리는 이야기는 "북한이 한국전쟁 참전의 대가로 천지의 절반을 중국에 넘겨줬다?"

1. [백두산은 왜 반쪽이 되었나.]

지금부터 300여 년 전 조선 숙종 때 17세기말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를 오가며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이 늘면서, 조선과 청 사람사이에 충돌이 잦아졌다. 1710년에는 조선 사람들이 강을 건너가 청나라사람 5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청은 이를 계기로 국경을 분명히 하자고 1712년 "★목극동穆克登" 이라는 관리를 백두산에 보냈다. 조선 조정은 백두산을 기준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을 지킨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목극등穆克登"을 맞았다. 목극동은 조선 측 고위관리들의 동행을 사실상 거절한 채 산에 올라, 두강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을 스스로 정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다. 비석내용은 " 西爲鴨綠(서위압록), 東爲土門(동위토문)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 강을 경계로 한다. 비석이 선 곳은 천지가 아니라, 천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4 ㎞ 떨어진 해발 2000 M 의 고개였다. 이때 정한 국경에는 천지가 들어있지 않았던 셈이다. 그리고 비석에 새겨진 두 글자 토문土門이 이후 200년 넘게 이어질 논쟁의 씨앗이 됐다.

2. [토문은 어느 강인가? ] ★토문강土門江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걸까? 청나라 쪽은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국경은 "두만강"이 된다. 조선쪽에서는 토문이 "★송화강松花江"으로 흘러드는 다른 물줄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렇다면 두만강 북쪽의 넓은 땅, ★간도가 조선 땅이 된다. 19세기 들어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 사람들은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이주해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1880년대 청나라가 이 땅의 조선 사람들을 내보내려하자, 조선은 국경을 다시 확인하자고 나셨다. 그렇게 1885년 ★을유감계乙酉勘界, 1887년 ★정해감계丁亥勘界라 불리는 두 차례의 국경회담이 열린다. 조선 측 대표는 감계사 "★이중하李重夏"였다. <두 차례국경회담이 결렬되었다. 조선 측 감계사 이중하, 토문의 정체, 두만강 어느 지류가 경계인지 이견, 끝내 합의하지 못함. > 양측은 백두산과 강줄기를 직접답사 했지만, 토문을 어떻게 볼지, 두만강의 어느 지류를 경계로 할지를 두고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다만 이 무렵 조선 측도 내부적으로는 두만강이 경계라는 쪽으로 입장을 조정하고 있었다는 < 토문은 두만강인가? 청나라는 토문=두만강, 조선일부는 송화강 지류, 조선도 내부적으로 입장을 조절했다는 연구도 있음> 연구도 있다. 토문해석은 지금도 학계에서 견해가 갈리는 문제이다.

3. [남의 손으로 그어진 선]

<▶백두산 국경300년-①1712 백두산정계비--②1885년 을유강계--③1887년 정해강계--④1909년 간도협약(일본. 청)--⑤1962년 조중변계조약--⑥1964년 조중국경 의정서.--⑦2000년조약전문 공개> ★목극등穆克登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청나라 측 대표였던 오라총관의 이름은 목극등(穆克登)이다. 비문 한자 원문은 大淸 (대청)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오라총관 목극등 봉지사변 지차심시)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륵석위기) 康熙 五十一年 五월 十五일 (강희 오십일년 오월 시오일) • 烏喇摠管 穆克登 (오라총관 목극등): 청나라의 관직인 오라총관 목극등이

• 奉旨査邊 (봉지사변)은 황제(강희제)의 뜻을 받들어 국경을 조사하고자 • 至此審視 (지차심시)는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고 • 西爲鴨綠 東爲土門 (서위압록 동위토문)은 서쪽은 압록강으로 하고, 동쪽은 토문 강으로 한다 •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고어분수령상 륵석위기)는 그러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하노라 • 康熙 五十一年 (강희 오십일년): 1712년(조선 숙종 38년) 5월 15일 감계사 "★이중하李重夏 는 이중하(李重夏, 1846~1917)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백두산 국경선(토문강 및 간도 문제)을 지켜 낸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이다. • 임무수행은 1885년(을유년)과 1887년(정해년) 두 차례에 걸쳐 토문감계사로 임명되어 조선의 국경을 조사하고 청나라 대표들과 회담을 벌였다. • 강경한 외교 태도는 청나라 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조선의 주장을 거절하고 위협할 때,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단호하게 국익을 지켰다.

3. [남의 손으로 그어진 선 ] 결론은 조선도, 청나라도 아닌 제3자의 손에서 나왔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간도조약을 맺은 것이다. 간도협약 제1조(요지)두만강을 청. 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상류에서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석을수石乙水"를 라는 지류를 경계로 삼는다. 라고 정했다. 1909년 간도협약 국경의 출발점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식을수" 200 년 전 세운 정계비가, 이 협약으로 국경의 출발점으로 다시 쓰인 셈이다. 같은 날 일본은 청나라와 만주협약도 맺어,(★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 彦吉, 간도 협약 일본 측 서명) 남만주 철도 부설권 같은 이권을 챙겼다. 간도를 넘겨주는 대가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 우리외교는 2004년 "간도협약은 무효(당사자인 대한민국의 뜻과 관계없이 체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라는 입장을 밝힌바있다. 당사지인 대한민국의 뜻과 관계없이 맺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해 백두산정계비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지금은 사진과 탁본으로만 남아있다.

4. [알고 보니 비밀조약] 해방 뒤 한반도는 둘로 나뉘었고, 중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리고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김일성과 "저우언라이(Zhou Enlai)(주은래, 周恩來)"가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에 서명한다. (962년 전후 중국이 국경을 서둘러 정리한 이유(분석) 소련과의 갈등, 인도와의 국경분쟁) 당시 중국은 소련, 인도등과 국경 갈등을 걲고 있었고, 북한과의 국경을 조용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64년 3월20일에는 베이징에서 구채적인 경계를 적은 "의정서"가 서명되었다. 의정서에 따르면 천지의 경계는, 호수를 둘러싼 능선의 서남쪽 안부와 동북쪽까지 그은 직선이다. 이직선이 천지를 북한 54.5%, 중국 45.5%로 나눈 것이다. 두만강 상류의 경계는 "간도협약"의"석을수"보다 북쪽인 "★홍토수"로 정해졌다. 압록강과 두민강의 섬과 모래톱 451곳도 함께 나뉘었다. 북한이 264곳, 중국이 187곳이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 봉"과 옛정계비 터(1712년 천지남동쪽 4Km )북한 쪽에 들어갔다. 이 조약으로 북한은 "간도협약"때보다 약 280㎢의 땅을 더 확보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천지를 중국에 떼어뒀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1712년의 정계비, 1909년의"간도협약"도 천지를 경계 안에 두지 않았다 ( 북한이 천지절반을 중국에 넘겼다. 1712 정계비, 1909년 간도협약 모두 천지는 경계 밖, 1962 조약으로 천지54% 확보, 더 얻었다는 해석이 현재 우세(연합뉴스 2025) 그 기준으로 보면 이 조약으로 북한이 오히려 천지의 절반 이상을 얻은 셈이라는 해석이 현재는 우세하다. 다만 이 조약은 "비밀조약" 이었다. 조중변계조약--양국 모두 공식 공개하지 않는 조약, 유엔 사무국 미등록 . 의정서 서명 (1964. 03. 20 베이징) 두 나라 모두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았고, 유엔에도 등록하지 않았다. 조약의 전문이 세상에 알려진 건 2000년이다. 중국 엔지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된 조약 집을 바탕으로, 한 일간지가 그해 10월에 내용을 공개했다. 체결 된지 38년만이었다.

5. [장백산이 된 백두산] 지금 국경에서 백두산의 약 4분의 3은 중국

지금 국경에서 백두산의 약 3/4은 중국 지린성에 속한다. 중국은 이산을 장백산, 장바이산이라 부른다. 중국은 이 일대를 대규모 관광지로 개발했다. 정상 아래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셔틀버스, 그리고 북파, 서파, 남파라 불리는 탐방로가 있다. (동북공정 2002-2007 고구려. 발해사(渤海史)를 중국 지방정권사로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주도, 한국은 동북아역사재단 등으로 대응함)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이 진행한 동북공정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보는 시각을 드러내 한국과 큰 갈등을 빚었다. 이 무렵부터 한국에서는 중국의 장백산 개발 역시 같은 흐름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물론 중국은 자국영토의 관광개발이라는 입장이다.(하나의 산, 두개의 지질공원-2019년은 북한, 백두산으로 신청, 2020년에는 중국은 칭바이산으로 신청, 중국 쪽은 2024년 3월 칭바이산 세계제질공원 등재했음) 2024년3월 유네스코는 백두산의 중국 쪽 지역을 칭바이산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지질공원에 등재했다. 사실 북한은 한해 앞선 2019년에 백두산이라는 이름으로 신청했지만, 코로나로 현장실사가 늦어졌다. 북한 쪽 백두산은 2025년 4월에야 세계지질공원이 됐다. 하나의 산이 두개의 이름으로 따로 등재된 것이다. 두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초국경 지질공원으로 지정됐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학계에서 나온다(예로 스페인. 프랑스의 피레내-몽페르뒤공동 세계유산) 한국관광객이 갈수 잇는 길은 사실상 중국쪽뿐이다. 북한 쪽 동파코스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이 민족의 영산이라 부르는 산을, 장백산이라고 적힌 입장권을 들고 오르는 셈이다.

6. [대한민국은 어디에 서있나? ]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이 국경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조중변계조약 당사자가 북한과 중국이고 대한민국은 당사자가 아님, 유엔에 등록되지 않은 조약이다)먼저 대한민국은 조중변계조약의 당사자가 아니다. 조약은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어졌다. 우리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과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이 된다면 이 조약을 그대로 이어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견해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직접 효력이 없는 조약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주변국의 동의가 필요한 통일과정에서, 기존 국경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통일 독일이 기존국경을 그대로 인정한 사례가 자주 거론된다. 백두산의 국경은 끝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한반도 통일이라는 숙제와 함께 여전히 열려있는 질문이다.

7. [잠든 화산, 나뉜 산 ] 그런데 사람이 그은 선과 상관없이, 이 산은 원래 하나의 거대한 화산이다 백두산 ★밀레니어 분화 946년, 백도산은 역사시대에 기록된 가장 강력한 분화가운데 하나를 일으켰다. 이때 뿜어져 나온 마그마는 수십㎦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천고명(天鼓鳴) "하늘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고려사에는 그해 하늘에서 북소리가 울렸다는 기록이 있고, 일본나라지방에는 흰재가 눈처럼 내렸다는 가록이 남아있다 지금의 천지도 바로 그런 분화로 생긴 거대한 분화구에 물이 고인 호수이다. 유네스코도 백두산을 앞으로 다시 분화할 가능성이 큰 화산으로 소개하고 있다. /

<주>

★안부(鞍部)는 산의 능선이 말의 안장(鞍) 모양처럼 움푹하게 들어간 고갯마루 부분을 뜻하는 지형학 용어이다.

★목극동穆克登은 1712년(조선 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정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청나라의 관리이자 외교관인 목극등의 다른 표기이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조선 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백두산에 세웠던 비석이다.

★토문강土門江은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공식 표기이다. 흙으로 된 문(현문)이 있는 강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송화강松花江은 만주어로 '숭가리(Sungari)'는 은하수(하늘의 강)를 뜻하며, 백두산 천지(하늘 못)에서 흘러내린 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간도間島는 • 옛날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할 때, 강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종성(穩城) 앞 두만강 사이에 있는 섬(분계섬)을 일컫던 말이 점차 북쪽 땅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을유감계乙酉勘界의 을유년(1885년), 勘界(감계)는 국경의 경계선을 조사하고 고쳐서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정해감계(丁亥勘界)는 정해년(1887년)국경의 경계선을 조사하고 고쳐서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이중하(李重夏, 1846~1917)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의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19세기 말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 당시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寧斷吾頭 不可縮國境)"라는 명언을 남기며 간도 영토를 지켜낸 대표적인 외교적 의인이다

★석을수石乙水는 두만강의 지류이자 백두산 물줄기 중 하나인 지명(강 이름)이다.

★조중변계조약은 1962년 10월 12일 북한과 중국이 평양에서 체결한 국경 획정 조약으로, 백두산 천지, 압록강, 두만강 등의 국경선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맺어졌다.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총리이자 외교부장으로, 마오쩌둥과 함께 현대 중국을 건설하고 이끈 핵심 지도자이다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 彦吉는 (1864년 7월 22일 ~ 1924년 4월 26일)는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제2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다.

★홍토수(紅土水)는 백두산 인근에서 발원하는 두만강의 최상류이자 원류가 되는 하천이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물줄기이다.

★백두산 밀레니어(Millennium Eruption)분화는 서기 946년 (西紀 九百四十六年)에 실제 분화가 발생한 연도. <끝>

▶가슴에 사랑이 있으면 세상이 온통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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