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번 ●김선평[金宣平] 시조태사부군신도비명[始祖太師府君神道碑銘]♣ (1/3)
조사자(調査者) 松泉 金永東
김선평 金宣平(생몰년 미상), 시조 태사 부군의 신도비명[始祖太師府君神道碑銘]
김영한金甯漢∙
지난 숙종 을해년(1695) 10월에 우리 태사 부군의 묘단墓壇이 비로소 이루어졌는데, 지금까지 230여 년이 지나도록 비석이 없는 것은 ★궐장闕章이다. 후손 ★서규瑞圭가 단소壇所에 성묘하고 종인宗人들에게 큰소리로 “태사 부군의 빼어난 공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비석이 없어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덕을 드러내어 후손이 한층 공경하고 길이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비석뿐인데, 비석을 어찌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모두가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돈을 모아 돌을 마련하고 나에게 기록하게 하였는데, 보잘것없고 얕은 배움으로 어떻게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맡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이 지은 ★「시조태사묘단기始祖太師墓壇記」의 내용이 자세하고 곡진하니 한 마디라도 보태거나 어지럽혀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이에 삼가 「시조태사묘단기」를 그대로 기록하여 서문으로 삼았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시조 태사 김 공의 이름은 선평宣平이고, 신라 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토벌할 때 공이 스스로 권행權幸·장길張吉과 더불어 고창군 군민들과 함께 복종하니, 태조가 그들을 얻어서 마침내 ★병산甁山에서 승리하였으므로 의로운 명성을 더욱 크게 떨쳤다. 결국 견훤이 망한 것은 공을 비롯한 세 분의 힘이었지만, 태조를 왕으로 받들어 세운 공로가 으뜸이어서 공이 대광大匡이 되었고, 권행과 장길은 대상大相이 되었다. 세 분 모두에게 삼한벽상三韓壁上의 공신호功臣號와 태사의 벼슬을 하사하고, 고창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공이 이윽고 돌아가시자 안동의 백성이 그 공덕을 사모하여 관아에 사당을 세우고, 권태사와 장태사를 함께 향사하여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데, 이 사실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지은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공이 고창성주일 때는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었는데, 역적 견훤이 신라의 임금을 죽였으니 의리상 반드시 보복해야 했다. 다만 공이 혼자서 외로운 성 하나로 흉적의 서슬에 맞서려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고려에 힘을 보태기로 결정하고, 고려 태조와 함께 원수를 멸망시켜 스스로 그 의리를 실천하였다. 이는 거의 ★장사도張司徒가 한漢나라를 도와 진秦나라와 초楚나라를 멸망시켜 한韓나라의 원수를 갚은 것과 같았고, 그 유풍에 격발된 백성들도 용감하게 의로움을 지키며, 저 ★야별초夜別抄와 ★홍건적紅巾賊의 난리 때도 백성들이 모두 죽을힘을 내어 임금을 호위하여 마침내 이름다운 풍속을 이루었다. 이는 더욱 공이 우리 고을에 덕을 베푼 것이니, 영원토록 사당에서 제사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공의 무덤은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되었는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묘가 안동부 서쪽 고태장리古台莊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증조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부군府君께서 여러 종인을 데리고 두루 다니며 찾았고, 심지어 글을 지어 천등산天燈山에 빌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안동부 서쪽 10여 리에 있는 태장봉台莊峯은 바로 천등산의 왼쪽 기슭이고, 그 아래 지명이 당동堂洞인데, 마을 사람과 나무꾼과 사냥꾼이 모두 태사묘동太師墓洞이라고 불렀다. ★숭정 병인년(1686)에 종인宗人 ★김연金演 등이 그 이름을 가지고 찾고자 하여 그곳에 갔더니, 신씨申氏가 여러 대에 걸쳐 그곳에 매장되어 있었다. 다만 어떤 무덤 뒤쪽 10여 걸음쯤에 옛 무덤 같으면서 평평한 곳이 있었고, ★제체祭砌가 빙 둘러 있어 땅의 윤곽을 분별할 만했는데. 대체로 커다란 무덤 같고, 그 형국形局과 안대案對가 또 옛 서적이나 마을 어른들의 기억과 흡사하여 십중팔구가 부합하였다. 게다가 신씨의 장례에서 실제로 옛 무덤 두 기가 드러나서 다른 곳에 묻었고, 제체 아래에서 또 지석誌石 같은 돌이 나와서 숨겼다고 하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에 여러 종인이 그 일의 전말을 갖추어 관에 송사하였고, 관에서 심문하여 무덤을 쓸 때의 상황을 파악하여 곧바로 파 보았지만, 끝내 지석을 찾지 못하여 증험할 수 없었으며, 관에서도 그 일을 끝까지 밝히려고 하지 않아 결국은 중단되었다. 이윽고 더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는데, 큰아버지께서 “우리 태사께서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는 즈음에 공을 세워 이름이 역사에 드러나고 공덕이 온 고을에 베풀어져 자손이 음덕을 받아 번성하지만, 묘소를 찾을 수 없어 몇 백 년이 지나도록 보살피지도 못하였다. 이번에 다행히 진짜 무덤을 거의 찾을 뻔하였으나, 나쁜 사람들이 몰래 점령하여 무덤이 훼손되고 비석이 없어져 끝내 그 사실을 증명하고 무덤에 흙을 더 쌓아 올릴 수 없어 애통하기 그지없으니, 어떻게 하면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옛날에 제사를 지내는 방법 중에는 무덤을 바라보고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었으니, 지금 그것을 본떠 제단을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선조의 ★체백體魄이 묻힌 곳처럼 느끼고, 밭 갈고 나무하고 풀 베는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예법 상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모두가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모년 모월 모일에 태사묘 동 안에 터를 닦아 제단을 만들었고, 이윽고 제단이 완성되어 제사를 지내니, 종인이 모두 모였다. 이때부터 봄가을로 한결같이 묘지에서 지내는 것처럼 향사하면서 영구히 받들어 행하기로 기약하였다. 또 제단 옆에 비석을 세우고 이 사실을 새겨서 후손들에게 알리기로 하였는데, 큰아버지께서 나에게 그 본말을 갖추어 적으라고 명하셨다고 기록하였는데, 자손에 관한 기록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태사 부군 아래로 혹은 몇 대가 없어졌다고 하고, 혹은 처음부터 없어지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의심되는 것을 의심되는 대로 전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다. 족보에 기록된 여러 파가 저마다 그 파조派祖를 1세로 삼아 지금까지 혹은 30여 세, 혹은 20여 세로 전해 오는데, 뛰어난 재상과 큰 신하가 서로 이어졌고 충성과 절의, 효성과 우애, ★경술經術과 문장이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며, 후손들이 번성하여 온 나라에 가득해 이루 다 적을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부군께서 몸소 힘써 후손들을 보살펴 길이 번창하게 하신 까닭이니 아아, 성대하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羅氏季葉(라씨계엽) 신라의 국운이 다할 즈음에
公守古昌(공수고창) 공께서 고창을 지키셨으나
邦命机隍(방명궤황) 나라의 운세가 이미 기울어
賊勢鴟張(적세치장) 적도의 세력이 크게 뻗쳤네.
擧義佐麗(거의좌려) 의롭게 일어나 고려를 도와
揚武桓桓(양무환환) 무용을 드날려 용맹 떨치고
甁山一捷(병산일첩) 병산의 일전에서 크게 이기니
生靈尊安(생령존안) 백성들 우러르며 편안하였네.
紀功鍚爵(기공양작) 공적을 기리어 벼슬 내리니
是報是酬(시보시수) 진실로 공에게 보답함이요
是尸是祝(시시시축) 시동과 축관이 제사 지내니
垂之千秋(수지천추) 천추토록 영원히 이어지리라
天燈左麓(천등좌록) 천등산 왼쪽 기슭 태장봉에는
衣履攸藏(의리유장) 우리 공의 체백을 모시었는데
奸盜占城(간도점성) 교활한 이들이 몰래 차지해
久失若堂(구실약당) 오래도록 무덤을 잃어버렸네.
春露秋霜(춘로추상) 봄가을 이슬과 서리 내려도
灑掃靡及(쇄소미급) 보살핌이 미치지 못하였으니
若苗若裔(약묘약예) 이처럼 번성한 우리 후손들
痛恨涕泣(통한체읍) 애통하고 한스러워 눈물 흘렸네.
僉謀築嬋(첨모축선) 모두가 뜻을 모아 제단을 쌓고
歲薦蘋藻(세천빈조) 해마다 제수 갖춰 제사 올리니
允合人情(윤합인정) 진실로 인정에 부합하여서
庶慰神道(서위신도) 신도를 위로하여 기도드리네.
迺礱穹石(내롱궁석) 마침내 커다란 돌을 갈아서
峙于崇岡(치우숭강) 묘단에 비석을 우뚝 세우고
文簡善述(문간선술) 문간공이 자세히 기록했으니
刻視茫茫(각시망망) 새겨서 후손에게 길이 전하네. //
임신년(1932) 겨울 10월 아무 날에 세우다. 후손 통정대부 비서원 승 ★영한甯漢이 짓고, 후손 가선대부 동지돈녕원사 ★용진容鎭이 삼가 쓰고, 후손 숭록대부 판돈녕원사원임 규장각 직제학 ★종한宗漢이 삼가 ★두전頭篆을 쓰다. //
<주>
★궐장(闕章)은 책이나 문서의 내용 중 일부가 누락되거나 빠진 장(章) 또는 글귀를 의미한다.
★김서규 (金瑞圭,1875년(고종12) 11월 10일 ~ 1935년 8월 17일) 본관: 안동(安東)
본적은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 가족 관계는 아버지는 김병목(金炳穆)이며, 부인은 나숙하(羅淑河)이다. 주요 이력은 1902년 대한제국 외부(外部) 견습생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외부 주사를 거쳐 1904년 경상남도 동래·옥구·창원 감리서의 주사를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관료(도지사 등)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자는 중화, 호는 농암·삼주, 본관은 안동이다.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이며, 이이의 기발이승설을 지지하고 성리학과 문장·서예에 뛰어났다. 학문: 이이의 기발이승 설 옹호 및 경학 연구 / 김창협은 조선 후기 병조참지, 예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저서로는 『농암집』 등이 있다.
★‘시조태사묘단기(始祖太師墓壇記)’는 조선 시대 문인 농암 김창협(金昌協)이 안동김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 김선평(金宣平)의 묘단을 세운 사연과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병산甁山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맞붙은 고창전투(병산전투)의 요충지를 가리킨다.
★삼공신묘증수기三功臣廟增修記」는 「안동부 삼공신묘증수기(安東府三功臣廟增修記)」는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李滉)이 안동의 삼공신(三功臣) 사당을 고쳐 지은 후 기록한 글입니다. 현재 《퇴계집》 제42권에 수록되어 있다 후삼국 시대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기여한 안동 호족들의 활약과 고창전투(古昌戰鬪) 등의 역사적 사실이 이 글을 통해 전해진다
★장사도張司徒는 중국 초한지(楚漢志)의 영웅이자 한(漢)나라의 창업 공신인 '장량(張良)'을 의미한다.
★야별초夜別抄는 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최우 집권기에 조직된 군대로서 삼별초(三別抄)의 모체가 된 부대를 말한다.
★홍건적紅巾賊은 붉은 두건을 쓴 도적이라는 뜻으로,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 한족 반란군이다. 원나라에 반발해 화북과 강남 일대에서 백련교가 중심이 되어 봉기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시대 성종의 명으로 노사신, 양성지 등이 편찬한 관찬 지리지로 이후 중종 때 증보되어 전국의 지리, 역사, 풍속 등을 종합적으로 담고 있다.
★김상헌金尙憲 부군府君은 문중이나 후손들이 그를 높여 부를 때 ‘김상헌 부군(府君)’이라고 칭한다.
★'숭정연간'은 (인조~효종)'을 언급,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은 1628년~1644년에 해당하며 조선 인조 시기와 겹친다. (1686년, 숙종 12년 / 숭정 병인년)
★김연金演은 김공망(金公望, 1482~1528)의 아들 또는 후손 계열로 역사 기록(예: 문화류씨 가정보 등)에 등장한다.
★제체祭砌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로 쌓아 만든 제단의 섬돌(계단)을 의미한다. 체백體魄은 사람의 육체와 정신(또는 넋)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경술經術은 유학(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오경(四書五경)을 연구하고 학문을 닦는 일, 또는 그러한 학식과 정치적 식견을 뜻한다.
★김영한 (金甯漢)생몰년도는 1878년(고종 15년) ~ 1950년자 / 호: 기오(箕五) / 급우재(及愚齋), 동강(東江) 본관은 안동(安東) 조선 후기 최고의 세도가문인 신 안동김씨(장동김씨) 가문이자,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13세손이다.
★용진容鎭(1878~1968)은 서화가 구룡산인(九龍山人) 선생이다. 구한말 영의정을 지낸 문청공(文淸公) 김병국(金炳國)의 당 조카손자(작은아버지의 증손)이다. 활동: 영운(潁雲), 향석(香石), 구룡산인(九龍山人) 등의 아호를 사용하였으며, 문인 화와 서예에 매우 뛰어난 대한민국 초기 서화계의 거장이었다.
★종한(宗漢, 1844년 ~ 1932년)조선 말기의 고위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조선 왕조에서 이조참판, 함경남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근대 금융업에 관여하여 한성은행 은행장을 역임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두전頭篆은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전서체(篆字體)로 가로로 돌려가며 새겨 놓은 글씨를 뜻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