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3 15:46:30 조회 : 242         
45번 ●의성구봉산(九峰山)성산산성( 城山山城)과 진보현(의성읍)♣ (2/2) 이름 : 김영동

45번 ●의성구봉산(九峰山)성산산성( 城山山城)과 진보현(의성읍)♣ (2/2)

따온 글 松泉 金永東

의성은 비슷한 높이의 얕은 산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아득한 지형 한가운데 자리한다. 높은 산은 어쩌다가 갑자기 솟아 있을 따름이고 하천이 만든 침식이 아래로 파고들어 그 와중에 골짜기는 깊은 곳이다. (견훤과 홍술의 격전) 지형 특징 때문에 교통로는 하천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세거지도 마찬가지였다. 경북내륙의 오래된 유물산포지, 문명이 싹트기 시작한 곳은 모두 그러했다. 시간이 흘러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힘과 세력이 이동하고 과거의 영화가 남겨진 곳들을 현재의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의성 금성면의 조문국은 특기할만하고

의성 단촌면과 안동 일직면에 걸쳐있는 삼국시대 고분군, 유물산포지는 후백제 견훤이 공격로를 삼아 복속을 위해 노력한 이유를 반증한다. 현재 의성군청 소재지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세거지가 자리 잡으면서 그이전시대의 영화를 찾기가 어렵지만 철파리, 후죽리, 도동리 등 외곽지역에 삼국시대와 신라발해시대의 유물포산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치선리에는 삼국시대의 산성도 남아 있다. 그런데 치선리의 입지와 지형적 조건을 보면 다스리기 위한 치소성의 면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분명 의성에 가깝게 치소성 혹은 산성을 구축해 놓았을 것이다. (의성 고성산성(古城山城) / 경북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45) 의성 서쪽 남대천 너머에는 구봉산이 있다. 9개의 봉우리가 연이어 둘려있다 해서 구봉산이다. 실제로 보면 아주 얕은 봉우리들의 연속이라 봉우리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만 남쪽 능선으로 오르기 시작하면 산성의 입지다. 라는 것이 대번 느껴진다. 골짜기를 두르고 있는 절묘한 성곽의 입지이다. 기록을 한번 살펴보겠다. 1833년 발간된 경상도읍지(在縣南五里)에 보면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하며 현의 남쪽 5리에 있는 성곽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만력정유년(1597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정벌하기 위해 명군 엽사총이 의성 현에 머무르면서 조성한 둘레 4-6리의 토성이다. 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남쪽 끝부분에 유구가 많이 남아있다. 일반적인 우리의 토성축조 경향, 즉 토석 혼축이나 판축 등이 아닌 단순히 흙을 쌓아올린 모습이 확인 된다. 그런데 말미에 더 깊게 들어 갈수 있는 단서가 등장한다. (경상도읍지(★今峰燧地也) "봉화대가 있던 자리다" 대동지지(1864)를 보면 역시 왜병을 맞아 명군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대동지지(因古址改築屯于此 인고지개축둔우야)4권 "옛성을 개축하여 주둔했다" 현재 팔성리 성산산성의 모습은 단순한 토성이라고 보기에는 특징점이 많다. 남서쪽 구릉부에 남은 토단의 모습은 방어를 위해 쌓았다기보다 경계의 의미로 바라보는 것이 적합하다 할 만큼 극소의 규모이다. 그러나 서성벽 축조는 이야기가 다르다. 서쪽능선 정상부를 모두 깍아 도로에 가까운 평지를 만들어 두었고 구봉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이 지형은 과거 항공사진에서 확인이 가능하고 해당 시점에 경작지화 되어 있지만 상대적을 완만한 구릉이 있는 서북성벽 외곽 능선에는 오히려 관찰이 되지 않는다. 1954 직접 성벽을 따라가면 그 모습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며 성벽으로 떨어지는 듯한 경사도 확인 할수 있다. 따라서 삭토 등으로 인한 성곽조성 이후에 경작지가 들어선 것이라 판단할 수 있겠다. 현재 고성산성의 모습은 명군이 조성한 것이겠지. 그럼 대동지지의 기록처럼 옛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을까? 봉수대가 존재했었다는 것에 주목해보기로 한다. 구봉산 정상부는 민묘가 들어서고 오랜 세월에 의한 퇴락으로 봉수대가 있었던 흔적을 찾기에 아주 어렵다. 발굴이 진행된 성곽도 아니어서 더더욱 객관적 지표를 찾기가 어렵다. 다만 일제강점기 지도에 석축으로 표현되어 있으니 20세기 초까지는 봉수대의 모습이 완연했을 것이다. 인근에 성을 뜻하는 지명이 남아있으니 제작자는 성곽이라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겠지. 아무튼 이 봉수의 정식 명칭은 ★"의성 팔성리 고성산 봉수지"이다. 1998년 의성 문화원 향토사연구소와, 2004년 대구대박물관에 의한 지표조사가 있었다. 연대는 삼국시대부터이다. 고성산봉수지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등장한다. 고성봉수는 남으로 영니산 봉수(盈尼山烽燧=의성 금성산), 북으로 마산봉수(馬山烽燧)와 연결된다. 라고 되어 있다. 이미 조선 초부터 고성산, 옛성이 있는 산으로 불리고 있다. 의성의 삼국시대 치소성에 가장 근접한 성곽이 기록으로 증명되는 순간이다. 기록으로 확인하고 다시 성곽을 바라보니 고성산성이 다르게 보인다. 동쪽에 남대천을 두고 해자를 삼은 것은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기 전 토착세력이 먼저 자리 잡아 세거지를 형성하였고 남쪽 끝에 위치한 ★치선리산성(致仙里山城)은 신라가 이 지역을 복속 한 후 토성이었을 고성산성에 대응해 지배력 강화를 위한 석성으로 수축하였음을 추론하게 한다. 이곳에 있던 재지세력, 즉 토착세력은 독립적이었을까? 금성 면에 있던 조문국의 영향권에 있던 세력일까? 그것도 아니면 넓은 배후지를 가지고 고대로부터 문명을 영위한 단촌 면의 고대 세력일까? 삼국사기 잡지 지리 신라 문소 군을 보면 "삼국사기 잡지 지리 신라 무소군 문소군(聞韶郡) 본래 조문 국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의성부이다. 거느리는 현은 넷이다." 의성의 고대 세거지 들을 확인 할 수 있다. 문소군(금성면)을 중심으로 비옥현(비안면), 안현현(안계면), 단밀현(단밀면), 진보현(의성읍)이 있는데 각각 현재의 금성면(문소군), 비안면(비옥현), 안계면(안현현) 단밀면(단밀현), 그리고 의성읍(진보현)이 가장 널리 이해되고 있다. 진보현이 의성읍이 된것은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다. 신라본기 경명왕6년 1월 "929년 6월 이달에 진보성 장군 ★홍술(洪術)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후삼국시대는 우리역사의 전국시대이다. 수많은 세력이 나타나고 합쳐지며 격동의 세월을 만들었다. 최후에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려와 견훤을 중심으로한 후백제, 마지막 불씨로 남은 신라로 수렴되며 결전의 순간으로 달려갔다. 각 세력을 구성하는 면면은 지역적으로 독립된 호족에 근원하였으며 홍술도 의성에 자리한 호족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고려와 신라의 교통을 막으려 안동과 의성에 군사력을 집중한 견훤의 전략적 판단을 미루어 볼 때 홍술도 본인이 지키는 진보성, 의성읍의 전략적 중요성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터이다. 혹설에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을 지키려한 충절을 기려 신라시대 금성면을 중심으로 하던 문소군을 고려초에 진보성을 중심하고 의성(義城)이라 바꿔 이름했다고 전해진다. 설화를 떠나 고려사의 정황도 진보성이 의성읍이라는 것에 상당부분 부합한다 물론 청송의 진보를 진보성이라고 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성에 홍술을 파견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고려초 호족들을 수호신격화하여 세거지의 중심성곽에 ★성황사(城隍祠)를 마련하여 모셨는데 홍술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의성의 남쪽인 금성면에 이 성황사(城隍祠)가 있었지. 고려사절요 929년 7월기사 "견훤이 의성부를 침공하여 성주 홍술을 죽이고 순주(풍산읍)를 치다" 라는 기록이 있으니 의성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이후 북쪽으로 이동하여 풍산(豊山)을 공격하니 의성읍에 있던 세거지를 건너뛸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중심전투는 의성읍에 있던 성, 어쩌면 오늘 다녀온 고성산성이 바로 그곳일수도 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골짜기와 능선에서 ★견훤(甄萱)과 홍술,★견신검(甄神劍)과 ★유금필(庾黔弼)이 마주서서 삼한일통의 평행선을 교차시키기 위해 칼을 뽑았을 것이다. //

<주>

★성산산성(城山山城) 경북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있는 산성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경상도 의성현 고적조에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9,000척(尺),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고 전한다. 금성산 고성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북동쪽에 위치한 금성산의 금성산성을 가리킨다. 금성산고성이 소문성(문소성)으로 추정된다.

★치선리산성(致仙里山城)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致仙里)에 위치한 산성으로, 지명은 옛날 미모가 뛰어난 선녀가 내려온 마을이라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대동지지(因古址改築屯于此 인고지개축둔우야)4권 (의성 금학산 고성 / 황산성 관련)《대동지지》 의성현 성곽(城郭)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임진왜란 시기인 선조 30년(1597년), 조선을 돕기 위해 온 명나라 장수(天將, 천장)가 왜군을 정벌할 때, 옛 성터(고지)의 지형을 활용하여 성을 다시 쌓고 군대를 이곳에 주둔(屯于此)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성은 둘레가 5리 남짓 되며, 대동지지 집필 당시에도 그 유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의성 팔성리 고성산 봉수지 / 의성읍 팔성리에 위치한 고성산 봉수지는 조선시대 군사 통신시설인 봉수대가 있던 자리로, 현재의 구봉산 정상부(봉우재) 일대에 해당한다. 주요 특징위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도서리·용연리 사이에 걸쳐 있는 구봉산 정상 (옛 지명 고성산 또는 성산) 역할: 전국의 5대 직봉 노선 중 제2로 내지봉수 라인에 속하며, 남쪽의 영니산 봉수(또는 대야곡)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마산 봉수대로 전달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현재 현황: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며 원형은 유실되고 터와 이름(봉우재)만 남아 있으나, 향토사 연구 등을 통해 옛 위치와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今峰燧地也(금봉수지야) 지금의 이마미네(今峰)가 바로 봉화를 올리던 터(燧地)이다"라는 뜻

★홍술(洪術)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진보성 성주 및 의성부 성주를 역임한 장군이다. 그는 신라 말에 진보성주 장군으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922년(태조 5)에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929년(태조 12)에 의성부의 성주 장군으로 있다가 후백제의 견훤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사후에는 의성의 지역민들에 의해 성황신으로 받들어졌다.

★성황사(城隍祠) 성곽과 해자를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며, 마을이나 고을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성황신을 모시던 전통 장소를 말한다.

★견훤(甄萱) 867년 ~ 936년 10월 1일(음력 9월 8일)(율리우스력 9월 26일))은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초대 국왕이다. 892년에서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하였다.

★견신검(甄神劍) 후백제의 제2대이자 마지막 왕

★유금필(庾黔弼), 874? ~ 941년 음력 4월)은 고려(高麗)의 무신(武臣)이며 개국공신이다. 평주(平州) 출생이며, 평산 유씨(平山 庾氏)의 시조이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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