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9 15:47:52 조회 : 622         
33번 ●김번金璠의 墓 陰德으로 金貫子서말의 後孫이 排出. ♣ 이름 : 김영동

                                      ●김번金璠의 墓 陰德으로 金貫子서말의 後孫이 排出. ♣

松泉 金永東

㉠김번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번지 석실마을에 있는데, 이곳은 옥관자(玉貫子) 금관자(金貫子) 세말씩 나온다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으로, 부인이 남편을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또한 광중을 파던 중 황금색과 흰색 돌이 많이 나와, 인부들이 이를 모두 걷어 냈는데, 이를 본 학조 대사가, 노란 돌은 금괴이고 하얀 돌은 은괴라고 하며, 자갈 하나가 벼슬 한 자리이니 욕심내지 말고 적당히 넣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집어넣은 금괴가 모두 21개였는데 그의 후손 중에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이 15명 대제학이 6명을 합쳐 21명이 이 묘소의 음덕으로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김번의 묘를 이곳에다 쓴 후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정승 15명, 왕비 3명, 대제학 6명, 판서 35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가 무려 120명이나 배출되었다고 한다. 이 묘소는 조선왕조 말에 있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관련이 있으며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김 조순이 김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조선 23대 순조 때 외척인 김 조순에 의해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박남 박씨도 참여하였다. 순조는 세도정치를 방관하였다. 김 조순㉢ 은 정조가 신임하던 인물중의 하나였다, 순조말년 아들 효명세자㉣가 풍양조씨 가문으로, 안동김씨의 독주를 막아보려 했지만 효명세자는 요절하고, 순조도 몇 년 후 사망, 효명세자의 아들 헌 종이 24대 왕이 되었고, 왕은 다시 풍양 조씨㉤를 육성하고, 안동김씨와 세력 균형을 이루었지만 요절했다. 헌종사후 방계출신의 철종이 25대 왕이 되었고, 철종을 옹립한 안동김씨의 세상이 되었다. 최고 어른인 순원 왕후㉥ 가 안동김씨 집안이고,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였고, 나중에 순원 왕후가 사망했지만, 이미 김 조순의 아들 김 좌근㉧ 이 반 안동김씨 일파를 몰아내며 측근세력들로 조정을 꾸려놓았기에, 철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안동김씨 일파들은 뇌물을 받으며 관직을 분배하는 등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만연했다. 요직을 꿰차고 있는 권력자들이 뇌물을 바친 이가, 지방관의 관직 즉 사또의 자리를 나눠주는 형태가 보편적이었다. 그들은 뇌물이 투자였다. 뇌물로 그 이상의 재산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중앙관직은 어렵지만 지방관직은 가능하다, 고을의 세금징수권이 있기 때문, 중앙관직은 지방관직에게 뇌물을 받고, 지방관직은 백성들에게 고혈을 짜내는 방법이다. 지방관의 권력 강화는 정조의 정책이었다. "삼정의 문란" ㉨은 당시 지방은 향촌사회 내에 재지사족在地士族 ㉩들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이들이 중앙에 반발할 때도 있었다. 왕권강화로 지방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정조는 지방관의 힘을 강화, 향촌사회 내에 재지사족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세금징수권이 있는 지방관은 부패해질 가능성이 크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시켜 지방관의 부패함을 철저히 관리, 정조 사후 순조 때는 지방관의 견제가 약해지고, 탐관오리들의 가람주구㉪가 심해져 순조때는 민란이 많이 있었고, 홍경래의 난㉫도 민심반발이며, 지방관의 부패가 극심한 때는 철종 시기였다. 안동김씨의 부패함과 독주가 절정에 달했다, 평민처럼 보낸 철종은 세금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안동김씨 일파의 방해로 저지당했다. 세금제도 문란을 “삼정의 문란”이라 한다. 3가지 세금제도, "⓵전정"-소득세, -지방관이 일부는 고을에 쓰고 나머지는 중앙에 받친다. 지방관이 빼돌린 세금이 30-40%나 된다. 중앙은 더 뜯어 내라하고, 지방관은 무슨 명목을 붙여, 백성들을 털어갔다, "⓶군정" 15-60세 남자 군복무의무, "포"라는 화폐 중 하나인 옷감을 고을에 제출, 군역을 면제, 지방관이 강제 차출, 포를 15세 이하 어린아이들과 60세 이상 노인에게도 포를 물렸다. 죽은 사람에게 까지 세금, 이웃이나 친족이 도망간 사람의 세금 량까지 백성이 부담, "⓷환정"- 환곡 --저이자 대출시스템, 지방관은 고리대금으로 전략, 삼정의 문란은 계속 누적되어 철종때 정점을 찍었다, "임술농민봉기"㉬는 철종 13년 1862년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진주목사 호병원과 경상우병영사령관 백 낙신㉭이 합작하여 못된 짓을 했다. 진주에서 한양으로 보내는 세금이 연 쌀4만석인데 떼먹은 세금이 연 쌀 6만석이었다. 진주농민들의 민란은, 안핵사 박 규수 ㉮는 효명세자 친구이며, 개화파스승이었다, 박 규수의 고발로, 홍병원과 백 낙신을 유배 령에 처했다. 진주사건이 전국으로 퍼져 1862년 3월-5월까지 충청, 경상, 정라 삼남지방에서 농민봉기가 연쇄적 발생하였다, ⓵경상도에는 함양, 거창, 성주, 울산, 김천의 개령, 군위에서, ⓶전라도에는 익산, 함평, 부안, 장흥, 순천, 강진, 남원, 영광, 고창, 화순에서, ⓷충청도에는 청주, 공주, 논산, 진천, 부여, 옥천, 등지에서 일어났다. ④경기도의 광주와 ⓹제주도까지 봉기발생, 연쇄적으로 봉기 1862년 봉기를 "임술농민봉기" 라 한다. 박규수는 삼정의 문란을 철종에게 해결해 줄 것을 상소, "삼정이정청" ㉯신설되었다, 부패한 정치인 총책임자는 김 좌근㉰ 이었다. 삼정이정청은 흐지부지 해산되었다, 철종은 술과 음란생활에 젖어 생활, 철종은 건강이 악화되었고, 술과 여자에 빠져 놀거나 병으로 골골, 임술농민봉기가 철종 죽기 1년 전이다. 왕실과 신하들은 맨봉에 빠졌다. 철종은 아들들을 낳기는 했으나 전부 요절, 방계 중 왕실의 최고 어른은 풍양 조씨의 조대비㉱ 이다. 조대비가 결정한 사람이 흥선 대원군㉲ 의 아들 고종이다. 흥선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안동김씨를 숙청했다. 는 편견은 있으나 안동김씨를 끝까지 존중해 주었다. 김 좌근과 아들, 좌근에게 명예직, 아들 김병기㉳에게는 중앙직, 김병학㉴은 영의정, 세도정치의 김조순-김좌근-김병학은 서울의 안동김씨계파에 국한, 이들을 장동 김씨라 한다. 김상헌,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 김제겸, 김조순, 김좌근, 김문근, 김병학, 깁병시, 김병기, 등 척화파로 노론을 이끌며 당쟁을 주도하고 60년간 세도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잃어버린 60년 세도정치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느꼈나? //

<주>

㉠김번(金璠)은 (1479년 ~ 154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문서(文瑞)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은 '호리병이나 옥항아리에 물이 가득 담긴 형태'를 뜻하는 풍수지리상의 대표적인 길지(吉地)이자 천하명당을 의미한다

㉢김조순(金祖淳, 1765년 ~ 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신안동(新安東),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종묘의 정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 조선의 왕세자.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이다. 아들 헌종이 아버지 효명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면서 묘호를 올려 익종(翼宗)대왕이 되었다가 대한제국 고종 때인 1899년(광무 2) 고종의 양아버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재추존됐다. 이때 문조(文祖)로 묘호가 바뀌었으나, 일반적으로 효명세자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풍양조씨 : 경기도 남양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조맹(趙孟)이다.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이조판서 조엄이 풍양 조씨였으며, 조선 후기 안동 김씨와 세도를 다툰 조만영·조인영 형제는 그의 손자다.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년 6월 8일 (음력 5월 15일) ~ 1857년 9월 21일 (음력 8월 4일))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정비(正妃)이자 문조(효명세자, 文祖)의 어머니이며 헌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신안동(新安東)이다.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1837년 4월 15일(음력 3월 23일) ~ 1878년 5월 31일(음력 5월 12일))는 조선 철종의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이다. 본관은 신안동(新安東)이다.

㉧김좌근(金左根, 1797년~186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척으로 안동김씨 세도기 후반의 중심인물이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경은(景隱), 호(號)는 하옥(荷屋),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아들이자 김유근의 동생이며,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남동생이다. 익종의 외숙부였다. 순탄한 벼슬생활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삼정(三政)의 문란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 국가 재정의 근간이었던 세금 제도인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곡(구휼미)이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변질되면서 백성들을 극심하게 착취한 현상을 말한다. 이로 인해 농민의 삶이 파탄 나고 전국적인 대규모 민란(임술농민봉기 등)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재지사족(在地士族)은 조선 시대 지방(향촌)에 거주하며 대대로 양반 신분과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던 지배층을 뜻한다. 이들은 중앙 관직에 진출하거나 낙향한 가문들로, 향약과 유향소를 통해 지방관을 견제하고 농민을 지배하며 향촌 사회의 권력을 독점했다.

㉪가렴주구 : '가혹하게 거두고, 빼앗고 요구한다.'는 뜻으로,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을 가리키는 사자성어이다.

㉫홍경래의 난 : 조선 순조 11년(1811년) 음력 12월 18일에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킨 반란.

㉬임술농민봉기(壬戌農民蜂起) 혹은 임술민란(壬戌民亂)은 1862년, 조선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심화된 체제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수백 년이 흐른 상태였고, 이 과정에서 세금 제도의 문란 및 지배 계층의 횡포가 자행되었다. 피지배 농민 계층의 생활고는 가중되었고, 불만은 누적되었다.

진주목사 홍병원(洪秉元)은 1861년 철종 12년 겨울에 부임한 진주 목사이다. 부임 직후 환곡(관아의 곡식) 비리를 조사하던 중, 그가 이전의 가혹한 징수 방식을 답습하고 향리들을 옹호하자 분노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1862년(임술년) 진주 농민 항쟁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경상우병영사령관(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은 1862년(철종 13년) 진주 민란의 원인이 된 탐관오리이다.

㉮안핵사 박 규수는 1862년(철종 13년), 진주 농민항쟁(민란)의 사태 수습과 진상 조사를 위해 파견된 안핵사로 활약했다.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은 1862년(철종 13년) 임술농민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조선 후기의 임시 관청이다.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기득권층의 미온적인 태도로 한계가 있었다.

㉰김좌근(金左根, 1797년~186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척으로 안동김씨 세도기 후반의 중심인물이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경은(景隱), 호(號)는 하옥(荷屋),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의 아들이자 김유근의 동생이며,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남동생이다. 익종의 외숙부였다. 순탄한 벼슬생활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조대비(趙大妃) :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1809년 1월 9일(1808년 음력 12월 6일) ~ 1890년 5월 23일(음력 4월 17일))는 조선의 추존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이다. 추존 국왕인 익종(문조 · 효명세자)의 아내이자 헌종의 어머니이며 고종의 양모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왕이 아닌 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섭정이 되어 1863년부터 약 10년간 집권하며 세도정치 타파, 왕권 강화, 쇄국정책을 추진한 조선 말기의 핵심 정치가이다.

㉳김병기(金炳冀, 1818년~1875년)는 조선 후기의 외척이자 권신이다.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본관은 신 안동 김씨이다. 생부는 김영근(金泳根), 양아버지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 아호가 사영이라 사영대감으로 불렸으며, 동명이인인 다른 여러 김병기와 구분을 위해 주로 사영 김병기로 불린다.

㉴김병학(金炳學, 1821년 ~ 187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등을 지냈고 불우한 처지의 왕족 흥선군을 각별히 대우한 일로 흥선대원군과 교분이 두터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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