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방랑 시인, 김삿갓의 파란만장했던 여정 시리즈 (2/10)●♣
松泉 金永東
2. 삿갓과 지팡이: 하늘을 가린 삿갓과 평생의 벗 죽장(竹杖)
"나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다." 유교 사회에서 조상을 욕보인 죄는 씻을 수 없는 낙인이었다. 그는 결국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또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자발적 유배'를 택한다. 20대 초반의 젊은 가장 김병연은 자신의 양반 신분을 상징하는 갓(흑립 黑笠)과 도포를 벗어던진다. 대신 하인이나 상주들이 쓰던 거친 '대삿갓', 즉 죽립(竹笠)을 눌러쓰고 집을 나선다. 양반의 검은 갓이 아니라 천한 사람들이 쓰는 삿갓을 선택한 거다. 네,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양반 김병연은 그렇게 죽고, '김삿갓'이 태어났다. 그가 자신의 분신이 된 삿갓을 두고 쓴 시가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김삿갓이 삿갓을 소재로 쓴
영립(詠笠), 즉 '삿갓을 읊다'는 시가 있다. 이 시는 김삿갓 문학의 정수이자, 그의 인생관이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 구절 한 구절 뜯어보면 한자 속에 숨겨진 의미가 아주 깊다. 먼저 시를 낭송해 보자.
浮浮我笠等虛舟 (부부아립등허주) "둥둥 뜬 내 삿갓은 빈 배와 같다네."
一着平生四十秋 (일착평생사십추) "한번 썼다 하면 평생 사십 년이라"
牧竪輕裝隨野犢 (목수경장수야독) "목동은 가벼운 차림으로 들소를 따라가고"
漁翁本色伴沙鷗 (어옹본색반사구) "어부는 본래 모습 그대로 갈매기와 벗하네."
醉來脫掛看花樹 (취래탈괘간화수) "취하면 벗어 걸고 꽃나무를 바라보며"
興到携登翫月樓 (흥도휴등완월루) "흥이 나면 들고 올라 달맞이 누각에 가네."
俗子衣冠皆外飾 (속자의관개외식) "속세 사람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레지만"
滿天風雨獨無愁 (만천풍우독무수) "온 하늘에 비바람 쳐도 나만 근심 없도다." //
첫 구절부터 심오하다. "둥둥 뜬 내 삿갓은 빈 배와 같다.”여기서 '허주(虛舟)', 즉 '빈 배’라는 단어를 쓴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여기서 '허주(虛舟)'는 단순히 ‘사람이 타지 않은 배’가 아니다. 장자(莊子)의 철학에서 나온 개념인데. "빈 배가 와서 내 배에 부딪히면 아무리 성격 급한 사람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즉, '자아와 욕심을 비운 상태'를 뜻한다. 김삿갓은 "나는 이제 욕심도, 이름도, 신분도 다 비워 버린 빈껍데기 같은 존재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아, 그냥 떠돈다는 게 아니라 마음을 비웠다는 뜻이다. 그럼 두 번째 줄, "한번 썼다 하면 평생 사십 년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집을 나설 땐 20대였다? 날카로우시다! 사실 이 시는 김삿갓이 방랑 생활을 오래 한 뒤인 중년 혹은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썼을 가능성이 높다. '사십추(四十秋)', 즉 사십 번의 가을은 그가 삿갓을 쓰고 보낸 기나긴 세월을 의미한다. 이 시가 그의 '평생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줄은 어떤 의미인가?
"목동은 가벼운 차림으로 들소를 따라가고, 어부는 본래 모습 그대로 갈매기와 벗한다."
이 구절은 자신을 자연 속에서 사는 목동이나 어부에 빗댄 것이다. 양반의 무거운 예법과 체면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자유로운 삶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줄이 재미있다. 술 마시고 달구경 가는 이야기이다. "취하면 삿갓을 벗어 걸어두고 꽃나무를 바라보며, 흥이 나면 삿갓을 들고 올라가 달맞이 누각에 간다." 삿갓은 평소엔 하늘을 가리는 형벌의 상징이지만, 술에 취하거나 흥이 나면 자유롭게 벗기도 하고 들기도 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 "속세 사람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레지만, 온 하늘에 비바람 쳐도 나만 근심 없다." 여기서 양반들을 비꼬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정확하다. 여기서 '속자(俗子)'는 점잖은 척하는 양반들을 말한다. 그들의 비싼 갓과 도포는 체면치레용이라 비가 오면 젖을까 봐 전전긍긍하지만, 내 싸구려 삿갓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실전용'이니 내가 더 낫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김삿갓 특유의 '정신승리'이자 '풍자(Satire)'이다. 비참한 현실을 유머와 자부심으로 비틀어버리는 것이다. 삿갓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고,
그의 손에 들린 또 하나의 필수 아이템이 있다? 네, 바로 대나무 지팡이, 죽장(竹杖)이다.
삿갓이 하늘을 가리는 방패라면, 지팡이는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창이자 의지할 다리였다. 김삿갓은 이 지팡이를 소재로도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데, <죽장(竹杖)>이라는 시를 소개하면.
携爾同行幾箇春 (휴이동행기개춘) "너(지팡이)를 끌고 동행한 지 몇 번의 봄이던가."
前程寧惜路登頻 (전정영석노등빈) "앞길이 험하다고 어찌 자주 오르내림을 아끼랴"
擧來直指千峯月 (거래직지천봉월) "들어 올려 곧바로 가리키니 천 봉우리에 달이 뜨고"
倒去橫麾萬壑雲 (도거횡휘만학운) "거꾸로 휘두르니 만 골짜기의 구름이 흩어지네." //
와. 스케일이 엄청나다? 지팡이 하나 들었을 뿐인데, 달이 뜨고 구름이 흩어진다니 마치 무협지의 고수 같다. 맞다. 이게 바로 김삿갓 시의 매력인 '호기(豪氣)'이다. 남들이 보면 그저 거지꼴을 한 나그네의 낡은 나무 막대기일 뿐이지만, 김삿갓의 시 속에서 이 지팡이는
세상을 호령하는 '지휘봉'이 된다. '천봉월(千峯月)'과 '만학운(萬壑雲)’이라는 웅장한 대구(對句)를 사용해서,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우주적인 스케일로 확장시켜 버린다. 첫 구절에서 "너(지팡이)를 끌고 동행한 지 몇 번의 봄이던가"라고 했는데, 지팡이를 마치 친구처럼 대한다. 정확한 관찰이다. 김삿갓에게 지팡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였다. 외로운 방랑길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물에 인격을 부여해서 '너'라고 부르며 대화를 나눈 것이다. 삿갓과 지팡이, 둘 다 대나무로 만든 거다.
그렇다. 그래서 사자성어로 '죽장망혜(竹杖芒鞋)'라는 말이 있다.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이라는 뜻으로, 가장 소박한 차림으로 떠나는 여행을 의미한다. 김삿갓은 스스로를 '죽장군(竹將軍)'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대나무 지팡이를 인격화해서 '장군'이라고 부른 것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고 친구처럼 지낸 것이다. 고독이 느껴지면서도 참 낭만적이다. 김삿갓 시는 한자를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다. 사실 김삿갓 시의 진가는
'언어유희(言語遊戱, Wordplay)'에 있다. 어려운 한자를 썼지만, 그걸 우리말 소리로 읽으면 욕설이 되거나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영립>이나 <죽장>은 비교적 진지한 정통한시(正統漢詩)에 속하지만, 한자를 가지고 노는 '파자(破字)'와 '이중적 의미'가 폭발한다. 비극적인 운명 때문에 삿갓을 썼지만, 그 삿갓 덕분에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시를 읊을 수 있게 된 김삿갓. <영립>과 <죽장> 두 편의 시를 통해 그의 비장하면서도 호탕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머리엔 삿갓, 손엔 지팡이, 그리고 가슴엔 붓 한 자루 품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양반집 도련님이었던 그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장 오늘 저녁 먹을 밥과 잠잘 곳부터가 문제였다.
과연 조선 팔도의 인심은 그를 반겨주었을까?
★허주(虛舟)' : 나'라는 아집과 욕심을 비워냄으로써 타인의 허물에 초연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무아(無我)의 경지를 의미한다.
★천봉월(千峯月)은 '일천 개의 봉우리에 뜬 달'을 뜻하는 한자어로, 주로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운 달빛, 그리고 맑고 깊은 마음을 비유하는 문학적 표현이다.
★만학운(萬壑雲) 은 '일만(萬) 골짜기(壑)에 피어오르는 구름(雲)'을 뜻하는 한자어로, 주로 첩첩산중의 웅장하고 깊은 풍경이나 속세를 벗어난 자연의 정취를 묘사할 때 쓰이는 시어(詩語)이다
★죽장망혜(竹杖芒鞋)는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이라는 뜻으로, 먼 길을 떠날 때의 매우 간편하고 소박한 나들이 차림새를 이르는 말이다
★정통한시(正統漢詩)는 당나라 때 확립된 엄격한 규칙(평측과 압운)을 지키는 근체시(近體詩)를 뜻한다. 한자의 소리와 성조, 시의 형식에 맞추어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슬픔도, 고통도 좌절도 인생의 일부이다. 슬픔도, 고통, 좌절도 가슴에 안아보고, 지워보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