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20 14:17:17 조회 : 1129         
●안동김씨 김번(金璠)부인 南陽洪氏의 이야기● 이름 : 송천 김영동

●안동김씨 김번(金璠)부인 南陽洪氏의이야기●

松泉 金永東

어느 부잣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실 묫자리 찾았다. 지관(地官)을 불러 명당(明堂)중의 명당을 골라 두었다. 온 가족이 정성을 다해 장례(葬禮)를 준비하던 때였다. 출가한 딸이 친정에 와 일꾼들의 밥을 지었다. 한참 묘(墓)를 파다가 모두 점심을 먹으려 내려갔다. 텅 빈 묘터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 딸이 물동이를 이고 묫터로 올라갔다. 잘 다듬어 놓은 광중(壙中) 안에 물을 콸콸 쏟아 부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던 듯 흙으로 덮어 두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다시 묫터로 올라왔다. 덮어둔 자리를 열자 물이 흔건하게 고여 있었다. 사람들은 기겁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관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물이 나는 곳은 흉지(凶地) 라 시신(屍身)을 모실 수 없다. 상주(喪主)인 오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딸이 조심스레 오빠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버리는 땅이라면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제 남편 묫자리로 쓰고 싶으니 저에게 주십시오. 오빠는 쓸모없는 땅이라 여겨 흔쾌히 허락했다. 물 나는 흉지를 어찌 쓰려느냐? 그리 하거라. 딸은 그 자리에 남편을 정성껏 모셨다. 물을 부어 만든 가짜 흉지는 천하의 명당이었다. 그 후 딸의 집안에는 경사(慶事)가 끊이지 않았다. 자손들 중에는 정승(政丞) 과 판서(判書)가 줄을 이었다. 친정의 복을 시댁으로 옮겨온 셈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무릎을 치며 감탄(感歎)했다. 딸의 남다른 기지(機智)가 가문(家門)을 일으켰다고 말이다. 이일로 명문가(名文家)가 된 자손들이 대대로 번창(繁昌)했다. 고 한다. 지혜를 발휘해 스스로 복을 쟁취한 이야기이다. 실례를 들면 안동김씨 김번(金璠)의 묘 이야기이다. 김번(1479~1544)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연산 군 2년(1498)에 2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8년(1513) 35세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관직은 통훈대부, 평양부 서윤 겸 춘추관 편수관에 이르렀으며 사후에는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세자좌빈객에 증직추서 되었다. 김 번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 읍 덕소리 산 5번지 석실마을에 있다. 김 번 묘의 주산(主山·뒷산)인 백봉산(白峰山, 590m)은 잣 봉산 또는 묘적 산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1910년 이후 평내 동 일대에 잣나무가 많아 잣나무 백(栢)자를 써서 백봉 산이라 이름 붙였다. 주산은 혈(穴·정기가 모인 자리)의 뒤쪽에 우뚝 선 산으로 혈을 향해 불어오는 뒷 바람을 막고, 혈을 맺기 위해 연결된 용맥(龍脈·산줄기)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주산은 비탈이 심한 석산(石山)이나 험산(險山)이 아닌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진행하다가 마치 거북이가 머리를 조용히 숙이고 정지해 있는 듯한 형세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안온한 느낌의 산이어야 한다. 김 번 묘는 주산에서 뻗어 내려온 용맥이 줄기용에서 가지용으로 바뀌어 좌우로 요동을 힘차게 치면서 내려와 자리를 잡았으며, 묘의 배꼽 부위부터 머리까지 생기가 치솟는 명당에 해당한다. 혈을 중심으로 왼쪽의 산 능선을 청룡(靑龍)이라 하고, 오른쪽의 산 능선을 백호(白虎)라 부른다. 이들의 주된 역할은 혈장(혈의 중심 부분과 그 주변)에 부는 바람을 차단하는 것이다. 청룡과 백호가 바람을 막기 위해 2~3겹으로 거듭 감싸주면 더욱더 좋으며, 혈에서 바라볼 때 만약 청룡과 백호 너머로 들판이나 강물이 보이면 장풍(藏風·바람을 가둠)이 되지 않은 것으로 흉하게 본다. 또한 청룡과 백호는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을 때의 양팔로 보는데, 팔이 안으로 구부러지듯이 유정한 모습으로 혈을 감싸고 있어야 한다. 김 번 묘는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는 형상이어서 묘의 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관쇄(關鎖·문을 잠금)가 잘 돼 있으며, 청룡과 백호 너머로 보이는 것이 없기에 장풍 또한 양호하다. 안산(案山·앞산)은 묘 앞쪽에 있는 산으로 앞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안산은 묘에서 바라볼 때, 높으면 눈썹 정도, 낮아도 심장 정도의 위치가 적당한데, 만일 눈썹 위치보다 훨씬 높은 산이면 위압감을 주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안산으로 볼 수 없다. 김 번 묘의 안산은 묘 앞쪽에 조성한 나무들이 그 역할을 충실히 잘하고 있다. 김 번 묘는 주산에서 내려온 용 맥과 좌청룡, 우백호, 안산을 제대로 갖췄을 뿐만 아니라 묘의 중심 부분에 정확하게 혈처(穴處·혈 자리)를 잡아 조성한 명당이다. 그러나 명당에 시신을 안치해도 광중(壙中·무덤구덩이) 깊이가 낮으면 온전히 안식을 취할 수 없는 흉한 터가 된다. <주재민 글> 이곳에 자리 잡게 된 연유가 있다. 김 번의 큰아버지인 학조 대사는 풍수에 식견이 있는 스님이었고 세조 때 국사(國師)로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고승이었다. 그가 양주 화엄사에 있을 때 어느 날 김 번의 처가 이곳을 지나다가 처갓집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는 자리가 예사로운 자리가 아니었음을 간파하고 나중에 남편이 죽으면 이곳 방앗간 자리에 묻으라고 권고했다 한다. 이곳은 옥관자(玉貫子) 금관자(金貫子) 세말씩 나온다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으로 우리나라 풍수 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다녀온 조선의 8대 명당 중 한곳이다. 김 번의 부인은 남양홍씨로 훗날 남편이 죽어 그곳에 묘를 쓰려고 하니 친정에서도 이곳이 천하 명당임을 알아차리고 있었는데 딸이 광중에 물을 붓는 등 묘를 쓰지 못하도록 회유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부인은 학조대사가 일러준 말을 상기하며 이를 눈치 채고 “상관없으니 그냥 쓰겠다.”고 하여 남편을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또한 광중을 파던 중 황금색과 흰색 돌이 많이 나와 인부들이 이를 모두 걷어 냈는데 이를 본 학조대사가 노란 돌은 금괴이고 하얀 돌은 은괴라고 하며 자갈 하나가 벼슬 한 자리이니 욕심내지 말고 적당히 넣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집어넣은 금괴가 모두 21개였는데 그의 후손 중에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이 15명 대 재학이 6명을 합쳐 21명이 이 묘소의 음덕으로 나왔다는 전설도 있다. 하였 튼 김번의 묘를 이곳에다 쓴 후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정승 15명, 왕비 3명, 대제학 6명, 판서 35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가 무려 120명이나 배출되었다고 한다. 이 묘소는 옥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은 형국과 같다하여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의 명당으로 유명하다. 혈장 좌우측 용호는 관쇄를 해주지 못하고 벌어진 상태지만 자기 안산으로 그 공간을 막아주니 혈전의 장풍에는 큰 피해가 없다. 수세는 좌수도우(좌 선수)이고 자좌 오향에 좌측에서 들어온 물이 향을 지나 우측 정미 방으로 빠져나가니 88향 법으로도 자왕 향이다. 그 당시에는 88향 법이 아직 우리나라에 통용되기 전이지만 좋은 향임에는 분명하다. “地理五訣 (①龍 (용할 용): 산의 흐름과 맥(脈) ②穴 (구멍 혈): 기가 모이는 자리 ③砂 (모래 사): 혈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이나 언덕.④水 (물 수): 혈 주변을 흐르는 물의 형태와 방향(득수, 파구)⑤向 (향할 향): 혈에서 바라보는 방향, 즉 좌향(坐向)“ 자왕 향은 후손들이 장수하고 인정이 왕하며 발부발귀(發富發貴)한다. 고 한다. <따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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