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8 21:09:52 조회 : 127         
43번 ●의성에 있던 고대국가의 고분군(古墳群) (단촌면 유적(遺蹟)을 중심으로)♣ (1/2) 이름 : 김영동

43번 ●의성에 있던 고대국가의 고분군(古墳群) (단촌면 유적(遺蹟)을 중심으로)♣ (1/2)

따온글 松泉 金永東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과 이사부(異斯夫)가 최전방에 가다,

단촌면 행정 구역/①관덕리(觀德里)②구계리(九溪里)③방하리(方下里) ④병방리(幷方里) ⑤상화리(上禾里) ⑥세촌리(細村里) ⑦장림리(長林里) ⑧하화리(下禾里) ⑨후평리(後平里) // 

신라장군 이사부는 내물마립간의 4세손이니 김이사부이다. 삼국유사에는 박이사부라는 기록이 있으나 활동했던 시기인 6세기에는 성씨를 사용했다는 근거가 모호하므로 왕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주로 법흥 왕과 진흥 왕 때 진흥 왕대에 활약했으니 당시 신라의 확장과 같이하여 512년 하슬라(강릉) 군주로서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정벌하고 550년 죽령을 넘어 단양에서 고구려를 축출하며 529년 금관가야와 562년 대가야를 정벌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이사부(異斯夫)가 고구려, 백제와 일전을 위해 단양으로 북상할 때 사용한 길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형에 종속적이었던 당시 교통로를 거칠게나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삼국시대 세거지의 위치를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 (★ 왕이 여자를 만나러 변방에 가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조문국(召文國)사적지 북쪽으로 삼국시대 세거지가 자리한 의성 읍이 있다. 의성 읍에서 안동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현재 재랫재를 넘어가는 도로를 이용하지만 과거에는 상화리(上禾里)로 돌아가는 길을 이용했다. 이 상화리에 삼국시대 유물산포지(遺物散布地)가 있다.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1500년간 계속해서 사람이 살아온 자리이다. 여기서 부터 좌우로 꽤 험한 산이 자리하고 하화산(下禾山)을 따라 협곡이 북으로 달린다. 그리고 ★하화천(下禾川)은 미천(眉川)과 합류하면서 산줄기에 통로 하나를 뚫어 놓았다. 단촌(丹村)이다. 지형의 중요함은 수천 년 세월에도 인간의 습성을 관통한다. 철도와 고속도로 국도가 교차하는 그리고 하천과 하천이 만든 평야(총적지(總積地)가 시작되는 요충이다. 역시나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인지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모든 시대를 망라한 유물산포지가 가득히 자리한다. 세거지를 증명하는 지표가 하나 더 있다.( 의성 관덕리(觀德里) 삼층석탑/ 경북의성군 단촌면 관덕리 889번지 ) 사찰 터이다. 인근에 무수히 많은 사찰 터가 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작지만 아름다운 석탑으로 유명한 관덕리(觀德里) 사지, 역시 9세기 유물을 품고 아직도 명맥을 잇고 있는 고운사(孤雲寺)가 있다. 그럼 세거지의 조건인 유물산포지와 고분군, 배후산성도 있을까? 삼국시대 상화리 (上禾里)산성이 있다. 그리고 평범한 규모와 수준을 상회하는 거대한 고분군이 자리한다. 관덕리(觀德里), 병방리(幷方里), 후평리(後平里) 고분군이 ★미천(眉川)이 만든 구릉지 배후의 산속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특히 후평리(後平里) 배후의 고분군이 고분의 규모도 매우 크다. 20 m 급의 대형고분이 십 수기이고 10 m 이상급도 100기에 달한다. 지역전체에 능선을 따라 (의성 후평리(後平里), 송내리 고분군 / 경북의성군 단촌면 후평리 산 75번지) 수십 수백기의 횡구식 ★석실묘(石室墓)와 ★회곽묘(灰槨墓)가 대규모로 열 지어 있다. 평범한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고분군이라 보기 힘든다. 대부분 도굴당하거나 후대의 경작으로 파괴되어 많이 손실되었으나 여전히 대다수의 고분들은 그 자리에 있다. 5-6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들, 시기적으로 신라에 복속된 상태로 봐야겠으나 독자적인 모습의 유물과 묘제를 보이고 있다. ( 의성 병방리(幷方里) 고분군 / 경북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 3번지 일원) 금성산 고분군을 만든 집단과 동일한 양식의 토기를 사용하지만 단촌면(丹村面)정치체는 앞트기식 돌방무덤(石室墓)이라는 특유의 묘제 또한 사용하고 있다. 이 집단은 미천을 따라 형성된 충적지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류로 내려가면 나오는 의성 ★윤암리(尹巖里) 고분군이나 안동 조탑리(造塔里) 고분군과 구조와 양상이 동일하여 미천이 만든 충적지에 열 지어 있던 수많은 흔적들은 같은 세력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금성면의 ★정치체(政治體)보다 규모면에서 동일하거나 그 이상이다. 후평리고본군의 20 m 급 대형고분들은 이미 조문국의 그것에 양적으로 우세하다. 이 강대한 세력의 시원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의성에 있던 고대국가는 크게 단밀 면에 있던 ★난미리미동국(難彌離 䉲凍國)과 금성면에 있던 ★여담국(如湛國), ★조문국이다. 단촌면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안동에는 이 영상의 주제와 다르게 따로 다루어 봄직한 ★창녕국(昌寧國)이 있었다는 경상도지리지의 기록이 있다. 경남의 창녕과 한자까지 같다. 안동에는 낙동강이 만들어 놓은 평야나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많아 고대국가가 성장하기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읍니다만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 그 대신 다른쪽으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삼국사기 파사이사금 5년, 서기 84년이다. 고타(古陁)군주 (고타군古陁郡, 고타야군古陁耶郡)가 푸른소를 바치다 라는 기사가 있다. 군주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니 신라에 복속당하기전 ★고타국(古陀國)(고타야군, 고타야국)이라는 나라가 이엇을 가능성이 있겠지. 고고학적 증거는 없으나 위와 같은 신라의 지배활동에 의한 행정구역 명명의 사례는 많으므로 심증은 가지는데 충분하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11년 1월, 서기67년 기사에는 박씨집단의 인물을 나라곳곳의 주주와 군주로 파견했다는 기사가 있다. 즉 단촌면의 거대한 고분군을 조성한 세력은 (의성 관덕리 유물산포지와 고분군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 701-1외) 신라박씨 혈연집단과 토착세력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등장한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 고구려 하슬라(何瑟羅 강릉)주의 주군현성에 ★굴화현(屈火縣)이 등장한다. 안동 임하면이다. 단촌면에서 성황고개를 넘어가면 바로 임하면에 닿는다. 현재 예안면은 고구려의 ★매곡현(買谷縣)이었는데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목간에서 매곡현(매곡촌)이 등장한다. 이 목간은 6세기 제작된것이고 단촌면의 고분들은 5-6세기 조성된것이다. 죽령을 넘어 설치된 단양 신라적성비의 조성 시기는 550년, 6세기중반, 한성백제가 궤멸되고 고구려가 남하했던 5세기말엽(475~ ) 혼란한 한반도의 중원은 여러차례의 공방전으로 얼룩져 있었다. 6세기 중반 남한강방어선까지 올라간 고구려와 신라는 극렬한 대치상태끝에 진흥왕의 등장으로 북진을 거듭하여 신라의 영토는 한강유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하나 있다.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22년9월 서기 500년이다.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 날이군(영주)에서 파로의 딸 ★벽화(碧花)를 만나다. 라는 제목이 있다. 왕이 영주에 갔다가 여자를 만났다 라는 기사인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한 압박이 증가하던시기, 가장 변방이었던 영주에 왕이 여러차례 직접 행차하고 있다. 매곡에 고구려군이 있었으니 중간에 들린 고타군, 안동과 이용했을 교통로인 단촌면 또한 최전방이다. 당연하게도 전쟁수행의 위주안 시기라는 사회배경이 녹아 있다. 그리고 여기서 모산성이 등장한다. 모산성은 삼국사기에 무수히 등장하는 삼국의 격전지이다. 내용으로 보아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성으로 보이는데 (의성 고성산성) 그중 소지마립간 6년 7월, 서기 484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북쪽변경을 침범하여 우리군사가 백제와 함께 모산성(母山城)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현재 모산성의 위치는 진천대모산성, 그리고 의성에 위치한 어떤 성이다 라는 의견이 제사되어 있다. 시간대와 당시 대치중이던 양군의 위치를 고려하면 의성설이 설득력있게 보인다. 특히 임하면에 고구려군이 진출해 있었으니 이곳은 5세기말 최전방으로서 고도의 군사기지, 보급기지화 되어 있었을 터이다. 그 첨단은 안동 현하리의 신라 고분군과, 연대가 특정되지는 않았으나 같은 세거지로 보이는 천지리산성으로 볼수 있겠으며 ★송리산성과 ★조탑리고분군 일대 그리고 의성 상화리산성과 단촌면 일대의 고분군으로 영역을 넓혀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항공사진을 살펴보면 국가유산보존관리 체계에 등록되지 않은 토축이나 석축으로 보이는 독특한 구조물이 많이 관찰 된다. 인근에 구릉지대를 개척하여 만든 경작지가 유독 많은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도 방기된 토탄이나 토촉같은 구조물이 상당히 많이 관찰되며 개중에는 영락없는 성곽도 있다. 후손들이 삭토한 토성에 영향받아 농경지를 조성한것일가? 아니면 신라인들이 조성한 방어시설을 후손들이 이용했던 것일까? 1500년의 세월은 모든 전승을 끊어지게 했다. 나라이름이나 중요했던 전투가 있었던 성곽의 위치마저 현재는 알수 없다. 그러나 대규모 고분군으로 인해 특정시기,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았고 상대적으로 넓은 농경지를 가진 안동이 아닌 의성 단촌면 협곡의 좌우로 세거지를 꾸렸는지 사서와 비교해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빈칸이 너무 넓다. 고구려 최전방 기지로서 신라인들의 기상을 증명할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주>

★이사부(異斯夫, 생몰년 미상) 또는 태종(苔宗)은 신라 지증왕 ~ 진흥왕 시대의 장군 · 정치가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다.

★石室墓(돌방무덤) 넓적한 돌을 이용해 무덤 안의 방을 만든 돌방무덤을 뜻한다.

★회곽묘(灰槨墓)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주로 사용한 무덤 양식으로, 무덤 속에 석회를 채워 단단한 벽을 만든 무덤이다.

★정치체(政治體) 고대에 형성되었던 국가 형태

★미천(眉川) 경상북도 의성군과 안동시를 흐르는 하천 /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금봉리에서 발원하여 안동시를 거쳐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

★하화천(下禾川)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에 위치한 하화천(下禾川)은 낙동강 수계의 미천(眉川)으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이다

★윤암리(尹巖里)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에 위치함

★난미리미동국(難彌離 䉲凍國) 진한의 12개 소국 중 하나로 전해진다. 삼국시대 초기 삼한 중 진한(辰韓)에 속했던 작은 나라로,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타국(古陀國) 경북 안동 지역의 신라 시대 옛 지명인 고타군(古陀郡)이나 가야의 소국 명칭에서 유래한 한자 표기이다.

★여담국(如湛國) 삼한 시대 진한(辰韓)의 소국 중 하나였던 여담국(如湛國)의 위치를 대구광역시 군위군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조문국(召文國)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에 있었던 원삼국시대 초기 국가로 소문국(召文國) 또는 조문국이라고도 한다.

★창녕국(昌寧國) 원삼국시대 변한(弁韓),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에 있던 소국들 중 하나이다.

★굴화현 (屈火縣) 삼국시대 고구려의 지명(또는 신라의 옛 지명)으로, 757년(경덕왕 16)에 곡성군(曲城郡)으로 개칭된 곳이다.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또는 청송군 일대로 비정된다

★매곡현(買谷縣) 본래 고구려의 매곡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선곡현(善谷縣)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 예안(禮安)이라는 지명으로 개칭되었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 혹은 기원전 5년?~80년 8월, 재위: 57년 11월~80년 8월)은 신라의 제4대 이사금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이다.

★송리산성(松里山城)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위치한 신라 시대의 산성을 뜻한다

★조탑리고분군(造塔里 古墳群) 경상북도 안동의 조탑리(造塔里)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 당시 이 지역에 탑을 세웠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소지왕과 벽화(碧花)

소지왕(479~500)은 신라 21대 왕이고 벽화(碧花)는 영주의 옛 이름인 날이군의 통치자였던 파로의 딸이었다. 당시 소지왕은 예순이 넘은 나이였고 벽화는 열여섯 살 난 낭자이다.

벽화가 살았던 날이군(지금 영주)은 고구려로 통하는 죽령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군사요충지였다. 날이군의 세력가인 파로는 소지왕이 날이군에 행차할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의 딸 벽화를 소지왕에게 바치기로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 아릿따운 낭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벽화였으며 국색이었다고 한다. 파로는 소지왕을 이틀간 극진히 대접하였고 변방 순시를 마치고 떠나는 날 벽화를 곱게 단장 시켜서 색비단 포장수레에 실어 왕에게 헌납하였다. 환궁 길에 오른 소지왕의 머릿속은 이미 벽화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대소신료들의 눈도 있고 해서 가까스로 욕망을 억제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며칠 후 소지왕은 궁궐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달을 쳐다봐도 벽화의 얼굴이 떠오르고 별의 수만큼 그리움이 몰려왔다. 왕이 날이군에 도착하자 파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왕을 맞이했고 소지왕은 그토록 그리던 벽화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변복을 하고 날이군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고타군 (지금의 안동땅)에서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는데, 임금은 집주인 노파에게“요즘 백성들이 왕을 어찌 생각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노파는 “지금 왕은 날이에 있는 벽화에게 반해 변복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용이 물고기 옷을 입고 다니면 어부한테 잡히는 법인데 천승지족(千乘之足) 즉, 높으신 몸으로 자신에 신중하지 못한 왕을 어찌 성군이라 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노파로부터 일장 훈계를 들은 소지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영주지방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소지왕이 노파의 말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내기고을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내기고을의 벽화는 다시 오기로 약속한 왕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다 지친 나머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왕의 무신(無信)함을 원망하다 서귀대 위에 탑을 쌓아 ‘무신탑’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주 왕실에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는 소지왕이 정사를 팽개치고 날이군으로 벽화를 만나로 간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벽화를 몰래 궁궐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달 후 소지왕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후궁이 된 벽화는 왕자를 낳았는데 왕위는 잇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소지왕이 죽자 벽화는 순장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경주에서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 고분에는 금관, 은관을 비롯해 2만 4천 9백점의 유물이 나온 경주 98호 고분인데. 이 고분의 주인공은 신라 21대 소지왕이며 왕과 함께 순장한 여성은 왕의 총애를 받던 후비 벽화라는 학설이 발표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골편은 60세의 남자와 15세 가량의 여성의 것」이라는 발굴단의 해부학적 보고를 바탕으로 「삼국사기」소지왕조 문헌기록을 분석한 결과 소지왕과 벽화의 순장 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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