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8 09:08:39 조회 : 8120         
안동김씨 종회소 유례 이름 : 경진

 

安東金氏宗會所創建由來

高麗成宗癸未 西紀 九八三年에 安東太師廟 金權張三功臣廟가 入廟된 後 吾金의 勢力이 沈滯하였다가 朝鮮 仁祖時 政丞이신 仙源淸陰兩相公께서 나시기 前에는 太師廟亨祀를 權門이 主管하고 있어 中位인 權太師公 位牌는 元位처럼 모시고 金張兩太師公의 位牌는 配亨처럼 낮게 만들어 모실 뿐 아니라, 獻酌 또한 中位인 權太師公位牌에 미리 올리는 等 그릇된 儀典을 恣行하였는 故로 淸陰尙憲相公께서는 그 是正을 나라에 上訴하였고 그 後 英祖때까지 吾宗先賢들께서도 是正上訴를 올리는 同時 權門에게도 이 是正을 促求한 結果 나라에서 金權張三公獻酌을 同時에 올리도록 下命하였음에도 不拘하고 權門은 依然中位 權公에 先酌함으로 吾宗은 이같이 首功인 我始祖金太師公께 後酌함을 더 참을 수 없어 英祖四十三年 丁亥 一七六七年에 參判楓溪應淳公의 發論으로 我始祖太師公을 別廟分奉할 目的으로 京鄕吾宗이 鳩財募金하여 安東市木城洞四十九의 三番地 二百十八平垈地위에 廟宇를 따로 짓고 分奉하려하매 權門이 여러번 勤謝하고 그煎대로 一廟並亨할 것과 同時獻酌하기를 懇請함으로 別廟分奉 計劃을 中止하고 目的을 달리하여 그 後 三年지난 庚寅 一七七○年에 安東金氏宗會所를 創建하게 된 것이다. 이때 南原垣行公께서 親히 쓰신 金氏宗會所란 額字가 지금까지 擖板되어 있으며 그後 養根公께서 垣墻을 쌓고 補修하였으며 또 그後 三十八年이 지나 純祖五年甲子一八○四年에 進士正根公撰 景億公謹書로 된 宗會堂重建記가 있고 全國花樹會名簿와 全國宗會會員名簿가 保存되어 있는바 京宗中의 達淳 義淳 履翼 諸賢의 自筆 筆蹟이 있으며 年年歲歲 끊임없이 全國吾宗이 모여 都錄을 닦고 하였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京宗中은 自然 參席이 없어지니 가까운 安東市郡會員만 모여 每年 百世一室을 想起하고 있다. 庚寅六二五動亂時에 爆擊으로 宗會堂 東쪽 서까래에 불이 붙어 활활타는 찰라 또 一彈의 爆擊이나자 그바람에 서까래에 붙은 불이 鎭火되었으니 이는 祖先의 神助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書籍匱를 人民軍이 파헤쳐 가지고 휴지로 찢어버리려 할 때 人民軍中 金이 찢어버리지 말라 하여 그 書籍이 지금까지 保存되고 있다. 이집 前面柱에 붙어 있는 板刻四個額字는 丁未一九○七 純宗六年 처음 붙었느나 六二五時 紛失한 것으로 辛卯 一九五一年 三月에 金泰鎭公의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서 擖板하였다.

分兄弟身莫如同姓 自祖宗親均是子孫 百世敦睦花樹同情 千載居住桑梓故鄕

분형제신막여동성 (分兄弟身莫如同姓)

자조종시균시자손 (自祖宗視均是子孫)

백세돈목화수동정 (百世敦睦花樹同情)

천재거주상재고향 (千載居住桑梓故鄕)

천년을 지켜온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에서

백세를 정으로 화목하게 지내니 바로 화수이며

조상으로 부터 한 동족이니 모두 같은 후손이라

형과 아우로 몸을 나누었으되 모두 동성이다.

  ◁ 이전글   다음글 ▷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